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8
아서 밀러 지음, 강유나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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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은 노동의 기쁨을 누리고 싶지만 자본은 일개인간의 그런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다.  기쁨과 보람은 자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완수해야 할 일개부품의 할당량일 뿐이고,  '감정과 의지'를 가진 일개부품을 움직이게 하는 투자가 필요없는 촉매제일 뿐이다.  일개부품에 불과한 세일즈맨이 채운 할당량에 따르는 보람과 기쁨은 자본의 이윤율에 차압당한지 이미 오래이다.  인간의 노동을 통한 스스로의 보람과 생활의 추구라는 자가순환적 고리는 깨어져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일즈맨은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다.  보람과 기쁨은 이미 저당잡힌지도 모른 채,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모든 것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충실한 자본의 부품으로서 보여준 역할에 대한 보상으로 받은 돈으로 또다른 자본순환의 산물들을 구입하고 채워가며 그것으로 든든함과 만족을 느낀다.  직접 몸을 움직여 삶의 공간에 채워넣은 물건은 없고 벌어온 돈으로 무언가를 채워넣는 역할 외에는 직접적으로 삶을 꾸리지도 못하지만 그는 언제나 뿌듯함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자기자녀들의 롤모델로 자랑스레 제시한다.


  세일즈맨의 기쁨, 역할에 대한 보람..  그것을 한 인간의 존엄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자본의 위기앞에서 자본은 그 존엄을 지켜줄 수 있을까?  아쉽지만 작품에서는 그런 대인배적인 자본을 느낄 수가 없다.  대공황의 어려움 앞에서 이미 오래도록 쓰인 부품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져 무참히, 단숨에 버려진다.  회사를 물려받은 사장앞에서, 자신이 갓 태어난 사장의 이름을 만들어주었을 정도로 사장의 나이보다 더 많은 햇수를 회사에서 일한 소모된 늙은 부품은 단 한마디에 해고를 당한다.  그것도 사장은 최신 생활전자기기를 앞에다 놓고 자랑아닌 자랑을 하면서 말이다.  위기에서도 자본은 최고의 이윤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 부품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무참히 버려지는 모습, 이런 모습은 현재의 우리사회에서도 익숙한 모습이다.


  꿈과 존엄을 이어나갈 유일한 뿌리를 잃은 세일즈맨은 급격히 시들어간다.  희망속에서 마냥의 긍정으로 바라보던 자신의 아들들의 모습도 시든 눈빛속에서 별볼일 없는 실체를 파악한다.  평생을 지탱하던 자존심과 정체성은 한순간에 꺾여버린다.  자본의 권력을 쥔 이의 단 한마디, '해고'라는 말에 의해..  그리고 그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한다. 


  대공황을 직면에 둔 1920년대 후반의 모습이라지만, 100여년의 차이를 두고도 작품이 고발하는 자본체제하의 인간의 가치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함을 느낀다.  해고는 살인이라는 요즘의 말이 무척이나 실감이 났던 작품.  그것이 직접적인 살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삶을 유지케하는 모든 수단과 희망을 단 하나의 유일한 끈으로 거머쥔 자본이 자신의 이윤과 이윤율을 위해 그 끈을 일방적으로 휘두르면 인간은 뿌리가 잘린 나무마냥 급격히 시들어버린다.  그리고 죽는다.  우리는 대체 지난 200여년간의 자본사회에서 이런 위태로움을 어떻게 참아내며 살아왔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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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경제 - 재벌과 모피아의 함정에서 탈출하라
김상조 지음 / 오마이북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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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현상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이해와 해석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생각을 바탕으로 수많은 의견과 비판을 내놓는다.  이것은 언뜻보면 다양한 이해와 판단이 공존하는 활발한 대화의 장을 연상시키지만, 현실에서 보면 진보 또는 좌파적 공간에서의 분열로 망하는 현상의 원인이었다. 


  많은 경제서를 읽은 것은 아니지만 최근의 경제서들을 읽다보면 현시대의 경제적 현상을 가지고 다양한 해석을 내리는 모습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같은 진영의 경제학자라 하더라도 각각 다른 해석을 내놓는 것을 보면서 경제란 문제도 단지 몇가지의 시각과 판단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특징이라면 서로간의 이해와 비판이 사뭇 자의적이랄까 또는 서로간의 보이지 않는 벽같은 것이 존재하는 느낌같은 것이었다.


  최근의 경제서들에 대한 여러 평들을 읽다보면 이 책은 왠지 많은 비판속에 휩싸인 듯한 느낌을 받는다.  특히 장하준의 비판이나 장하준의 책과 비교한 어떤 글을 보자면, 저자 김상조는 박정희의 그림자를 현시대에까지 억지로 끌어들여와 비판하고 재벌은 해체의 대상이다라는 식의 주장을 하며 현재의 자본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하고 있고 경제적 논의에 정치적 의도를 주입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책을 읽기전 '쾌도난마 한국경제'와 함께 읽은 글에서 받은 나의 선입견은 사뭇 강렬하게 뇌리에 박힌채로 책을 읽었다.


  내용은 가장 객관적인 통계를 바탕으로 구체적이고 명쾌한 설명을 통해 한국경제의 현상에 대해 쉽게 설명하지만, 그것이 통계나 표에 익숙치 못한 일반인들에게는 이 역시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리고 저자는 너무 몸을 사린다.  문제를 진단한 후에 마땅한 대안도 내놓지 않는데다가 자신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도 종종 단호함을 숨긴다.  그저 자신의 부족함만을 강조할 뿐이다.  책을 내놓을 만큼의 경제학자로서 너무 소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정도이다.


  하지만 그가 비판받은 부분, 그는 박정희를 현시대에까지 끌어들이지 않는다.  다만 박정희가 구축한 경제체제 내에서의 부작용들과 그것이 현재에까지 미친 부분들을 짚어줄 뿐이다.  재벌에 대한 비판역시 그는 해체수준의 주장을 하지 않는다.  다만, 재벌의 개혁이 필요한 이유를 대안은 제시하지 않는 수준에서 재벌이 우리사회와 경제에 미치는 심각한 위해를 짚어나가며 설명한다.  기억나는 것은, 이전에 활발하게 벌여왔던 소액주주운동에 대하여 장하준은 '재벌의 해체를 목적으로 하는 운동으로 이미 국경이 사라진 경제환경에서 자칫 기업을 통째로 국제투기자본에 넘겨줄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한 행위'라 비판하였지만, 저자는 '소액주주운동을 통하여 재벌기업의 주식을 소유한 사람들의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고 이를 이행함으로 재벌의 사회에 대한 올바르고 도덕적인 활동과 기여를 유도하려 했다' 고 이야기한다.  같은 경제학자라 해도 자신의 이해에 따른 의미해석의 차이를 발견하게 된 순간이고, 직접 읽어보지 않았더라면 서평의 내용만으로 넘겨짚을뻔 한 저자의 생각이었다.


  복지에 대한 저자의 생각도 눈여겨볼만 하다.  우리가 복지의 이상으로 생각하는 스웨덴이나 덴마크 식의 복지를 우리사회에 대입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위험한 부분들을 짚어주고 또한 그들의 복지가 단지 짧은시간 안에 이룩한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들이 그렇게 만들어나갈 수 있었던 사회적 환경과 결과물을 통하여 우리가 지금 직면한 경제사회적 환경을 바탕으로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고민하게 해준다.  이 부분에서는 '쾌도난마 한국경제'에서도 언급했던 홍기빈 저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의 내용을 연상케 한다.  어쩌면 두 책의 내용에 있어 얼마 되지않는 공통적 이해의 접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이 책은 통계를 바탕으로 하여 우리나라의 현 경제적 현실을 주도면밀하게 분석하고 있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통계나 표에 익숙치 않은 나에겐 그닥 쉽게 들어오지 않는 책이었다.  명쾌한 대안이 없는 소심함에도 조금은 답답함을 느끼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국사회 내에서 실질적인 경제운동을 이끄는 사람으로서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시선을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입체적으로 함께 설명함으로서 경제현상의 포괄적 이해를 돕는다는 면에서 커다란 장점을 지닌 책이다.  그리고, 실제적 이해와 진실은, 직접 보아야만 알 수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해 주었던 독서였다.  그만큼 우리는 각자만의 이해와 비판속에서 서로에게 시선을 건네기엔 소홀함을 안고 살아간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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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몸의 역사
자크 르 고프 지음, 채계병 옮김 / 이카루스미디어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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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러움에의 의미부여와 자연스럽지 않음에의 의미부여는 그 비중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을지언정 차별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있었음이 분명하다.  매스미디어의 부추김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현대사회의 몸에 대한 노출의지의 과잉이 금욕과 숨김에 의미를 부여하던 중세의 시대엔 처벌의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몸의 사용과 표현의 의지가 시대를 막론하고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중세엔 금욕, 고행, 절제를 도덕과 종교적 미덕으로 삼았지만 그것은 미덕을 위한 옮은 행위로 간주되었을 뿐이지 인간본성의 자유의지 자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등동물이라면 생식의 의미를 넘어선 서로간의 쾌락과 관계를 위한 행위인 섹스의 문제에 있어서도 굳이 생식목적의 의미로서만 의미부여를 하며, 남녀가 침대에 알몸으로 누울 수 있는 허용기준까지 제시하던 중세사회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계급적 차이가 엄연한 신분이나 종교적 지위로 존재하던 중세사회에서 그런 인간 자유의지의 통제는 사회계급구조의 유지수단과 하층계급에 대한 통제수단,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유지케하는 의미부여의 수단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는 인간 스스로 거부할 수 없는 본능적인 힘이 존재하는지, 지배계급안에서는 암묵적 허용안에서 기준을 일탈하는 현상을 보인다.  엄격한 금욕을 요구하는 종교집단에서의 영아살해문제라던지 지배계층의 불륜같은 일련의 현상은 이미 획득한 권력을 바탕으로 눈치껏 누리던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니었을까.  상대적으로 이러한 현상에 대한 하급계층이 표현하는 불만에 대응하는 방법은 동성애자에 대한 탄압이나 마녀사냥등의  소수자들에 대한 희생에 시선과 관심을 돌려줌으로서 해결이 가능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시대는 변한 시점에서도 사회가 인간의 몸에 대해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로부터 사회는 어떤 제반의식을 가지게 되는가까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다.  이야기는 중세의 시점에서 시작하고 중세에서 마무리되지만, 소수자에 대한 억압, 여성에 대한 지배의식과 차별문제, 종교가 강요하는 금욕과 절제등의 현시대적 현상에까지 이어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이야기의 형식에 논문과도 같은 딱딱함이 느껴지고 인용형식의 문장이 많아 읽는데 약간의 거슬림이 있다.  그래서 쉽게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면이 없쟎아 있지만, 다루는 주제가 나름의 흥미를 유발하고 있어 어렵지는 않게 읽힌다.  몸에 대한 사회인식은 어떠했는가라는 내용을 생각해보면, 어느정도 사회사상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면 생각의 영역을 쉽게 확장하게 만드는 자극을 담은 책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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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시대의 사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7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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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감정은 과연 제도와 질서에 의해 통제될 수 있는 것인가.  제도안의 질서를 지켜가면서 개인의 감정을 절제함이 인간사회를 가능케 한다는 논리도 한때엔 존재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헤게모니를 거머쥔 이의 사회통제수단 논리였을 뿐, 인간의 자유의지와 감정은 곳곳에서 통제의 틀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동시에 사랑이라는 감정은 과연 인생의 시간적 흐름에 있어 어느 시기에 국한되는 한정적인 것인가.  우리는 노년의 사랑을 주책이라 폄하하던 시절을 기억한다.  하지만, 노년에도 사랑이란 그것이 육체적이던 정신적이던 유효함을 우리는 알아가기 시작하고 있고 이 역시 제도나 질서가 통제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감정임을 알 수 있다.

 

  몇 안되는 주요인물들을 통해 사랑의 다양한 모습과 쟁점을 담아낸 이 작품은 그래서 함축적이다.  제도가 만들어낸 사랑없는 결혼, 결혼이 통제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 육체적 쾌락의 자연스러움과 추구의 당연함, 인생 전체를 아울러 기다리는 사랑, 그리고 노년의 꺼지지 않는 사랑에의 갈망.. 이 작품은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와 인간사회의 제도와 질서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인간의 근본성에 비중을 두고 그것에 자연스러움을 강조한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것, 자아 스스로의 만족과 만족을 통한 관계의 부드러움은 결국 인간 본성에의 존중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것은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사랑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관계에 대한 의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콜레라가 의미하는 것은 결국 콜레라와 하수도 사이의 상관관계가 밝혀진 작품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시기의 간접적 표현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계급적 차이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인간 자유의지에 따른 사랑의 역학은 대부분 상류계급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 모습은 어떤면에서는 극단적이다.  주인의 불륜앞에서 입을 다물어야 하는 마부의 모습이나, 콜레라와 내전에 희생된 시체들이 둥둥 떠다니는 강물위의 뱃전에서 이루어지는 감정의 역학들,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여행지 주변에 널린 콜레라와 학살에 희생된 채 부풀어오르는 시신들은 어떤면에서는 사랑의 계급적 성격을 의미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또는 상류계급이기에 편입되어야만 하는 답답한 관습속에서 더욱 몸부림치는 사랑의 감정에 대한 간접적 표현인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류의 유럽식 상류계급의 사랑은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고리오 영감'을 연상케하는 그들의 사랑의 방식은 읽는 동안 잠시 지루하고 까끌거리는 느낌을 주었달까?  하지만 다 읽어갈 즈음에는 에로틱한 내용과 더불어 '내 육신이 가장 찬란했던 시절의 향수와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읽는 이로 하여금, 어딘가 답답했던 감정에의 자유로운 발산을 생각케 하고, 좀 더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인간관계에의 욕구를 느끼고 고민하게 만들어준다.  어쩌면 그것은 제도에의 작은 저항이자 균열에의 의지일 수도 있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사랑의 모습을 함축하여 제시하고, 이를 통해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에 충실한 방법으로 제도와 관습에 균열을 유도하는 저항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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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GPE 총서 1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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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를 바라보는 관점은 물론 큰 틀에서 대동소이하겠지만 경제학자가 바라보는 복지의 문제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하나의 투자요소였다.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일상인으로서는 어떠할까?  보통의 삶은 모여 사회를 이루고 삶을 살아가는 일은 순간순간의 정치라 정의하면 시스템 안에서의 존재해야 할 복지의 문제는 정치사회적인 요소일 것이다.  그리고 정치사회성은 나름의 사상성을 간직한다. 


  복지는 정치적이고 사상적인 문제이다.  이는 복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장밋빛 미래에 순간 환호하는 그런 것이 아닌, 끊임없이 싸우고 고민하며 사상적 프레임과 경제적 문제와 충돌하며 오랜시간을 두고 만들어가야 하는 복잡다단한 일이라는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의 처참했던 노동자의 삶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모습을 갖추기까지엔 대략 150여년이 걸렸음은 이에 대한 간접적인 증명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유토피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실은 엄연히 자본이 지배하고 있다.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와 본성자체가 비인간적인 자본주의의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을 꿈꿀 수 있을까?  막연한 상상속의 유토피아는 후천세상 개벽같은 뜬구름이다.  그러나 일상 정치의 활동과 궁극적인 이상과 가치를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으로서 현실성있는 '잠정적 유토피아'가 제시된다면 우리의 꿈과 희망은 좀 더 가시적일 것이다.  그리고 가시적인 꿈과 희망을 향해 나아감을 시작할 가장 근본적인 바탕으로 지금 현재의 현실을 두고, 때마다의 현실적 여건을 바탕으로 단계적인 실현을 거쳐나가면 우리는 자본의 비인간성을 가장 효율적으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스웨덴의 복지국가 설계자 비그포르스가 구상하는 복지의 개념은 매우 현실적이다.  사민주의적 입장에서 자본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잠정적 유토피아의 개념에 따른 대략의 지점을 제시한 뒤, 지금 현재의 정치사회 경제적 환경을 바탕으로 토론과 타협을 통한 정책을 단계적으로 하나하나 만들어간다.  그 과정은 방향성을 잃지 않기위한 치열한 노력이고 하나하나 계단을 오르듯 서서히 진행하는 인내의 시간이었다.  우파가 지배적이던 20세기 초반의 스웨덴 정치환경에서 토론과 타협을 통해 하나하나 정책을 적용해나가고 국민들을 설득하고 공감을 이끌어내며 만든 복지시스템은 지금 복지논쟁이 화두가 되어 이런저런 제안이 들끓듯이 제시되고 있는 우리사회에서 잠시 모든 의제를 내려놓고 돌아볼만한 일이다.  


  그가 만들어 낸 복지시스템은 단순히 구제와 도움의 모습이 아니다.  완전고용과 고용을 통한 노동으로 기본적 삶과 풍요를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지원함으로 사회적 낙오를 최소화하는 것이 목표이다.  사회적 낙오는 단기간 내에 시스템안으로 귀속될 수 있도록 활동을 지원한다.  단지 아수라의 경쟁에서 싸우다 낙오된 이들에게 빵만 쥐어주는 개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인 것이다.  복지의 개념은 우리가 생각해오던 그런 단순함이 아니고 사회시스템 곳곳에 녹아들어가 다른 프레임들과 어울려 공존하는 유기적 순환체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그포르스의 구상은 그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  그리고 나름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모습은 그의 사후에나 보여졌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상과 실천성을 바탕으로 구상했던 잠정적 유토피아의 개념과 때마다의 현실을 바탕으로 방향성을 잃지 않으며 단계적으로 실현시켜나갔던 과정이었다. 그가 보여준 과정은 어쩌면 타협적이고 개량적이라 평가될 수도 있지만, 막연하거나 완벽한 이해와 분석이 없는 이상에의 무모한 동경은 오히려 비극적 결말을 만들어내었다는 역사적 순간들을 생각해보면 그의 판단은 최고의 이상을 실현시킨 가장 구체적인 방법이었다. 


  우리의 현실에 그의 생각을 대입해보자.  우리의 이상과 실천성을 바탕으로 구상할 수 있는 잠정적 유토피아는 어느 지점에 존재하는가.  그리고 지금의 현실적 토대를 바탕으로 가장 먼저 실천하고 적용할 수 있는 정책과 실천은 무엇이 있는가.  당장의 욕구와 조급함을 버리고 조금은 느리고 차분하게 한발을 내밀어 디뎌야 할 방향은 과연 어느쪽인가 하는 고민은 너도나도 다급하게 제시하는 복지에의 제안을 떠나 제일 먼저, 그리고 근본적으로 이루어야 할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장하준, 유종일, 이종태의 경제대담내용이 많은 부분에서 떠올랐다.  그들의 착한 자본주의, 그리고 홍기빈의 대안적 제 3의 길은 과연 얼마나 잘 어울리고 합리적인가라는 점에서는 좀 더 고민을 요하긴 하지만, 짧은 지식으로는 비그포르스가 보여주었던 현실을 바탕으로 만들어가야 할 우리의 첫 발걸음은 장하준류의 경제학자들이 방법론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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