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미제라블 한빛비즈 문학툰
SunNeKo Lee 그림, 정미선 옮김, 빅토르 위고 원작, Crystal S. Chan / 한빛비즈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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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읽어야 하는데 부모가 빼앗아 읽는다는 문학툰! ‘주홍글자에 취향을 저격당했기에 다른 작품도 역시 기대 한가득이었다. ‘레 미제라블은 굉장한 도전이었으리라 생각하는데, 그 어느 출판사의 번역본을 사더라도 4~5권은 거뜬한 분량이기 때문이다. 장발장의 이야기는 물론 격동하는 시대에 맞추어 전투하는 분량만 책 한 권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과연 한 권의 만화로 압축하는 것이 가능한가 의문이 들었는데, 위고의 낭만주의적 성향에 포인트를 두어 주요 인물인 장발장의 감정선을 따라 가면서 이 도전을 해결했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 왕정과 공화정이 격동하는 혼란기, ‘비참한 사람들이라는 제목답게 사람들은 가난, 폭력, 범죄, 혁명 등에 휩쓸리는 삶을 산다. 선한 마음을 갖고 살고 싶어도 악행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삶을 유지하기조차 힘든 상황.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일단 살고 봐야 하는지, 그럼에도 인간으로서 마지막 선은 넘지 말아야 하는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우리는 장발장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답을 구할 수 있다. 원작을 처음 읽을 당시 엄청난 두께와 지루함에 꽤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 제대로 즐기지 못했던 원작의 감동이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어서 만족스럽다.

 

마지막까지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 했던 팡틴이나 장발장, 전형적인 악인으로서 등장하는 테나르디에, 고리타분하고 철저한 정의를 준수하는 자베르 경감과 같은 다양한 인물 군상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고통이라는 근원적인 문제 앞에서 어떤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지에 대한 대답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들이 결국은 장발장을 중심으로 흘러간다는 점에서, 위고가 어떤 식으로 사람들이 살기를 바랐는지 추측할 수 있다. 빅토르 위고가 이탈리아어 출판업자에게 보낸 편지가 유명한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인류의 고통은…… 멈추지 않소. 인간이 무지하고 절망적인 곳, 여성이 빵을 위해 자신을 파는 곳, 어린이가 교육이나 따뜻한 가정이 없어서 고통 받는 곳이면 어디라도 레 미제라블이 문을 두드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오. 문을 여시오. 당신을 위해 내가 왔소.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한 범죄자로 남을 수 있었음에도, 미리엘 주교의 마음에 감화되어 세상과 고통받는 사람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던 장발장은 단순히 코제트의 행복을 넘어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인물의 상징이 되었다.

 

너의 행복은 내 평생의 사명이었다.

 

워낙 방대한 분량에, 역사, 문화 등 인간의 총체적인 것들이 담겨 있어 단 한 권의 만화로 모든 것들을 담아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러나 과감하게 주제 의식을 취사선택한 도전은 꽤나 성공적인 듯하다. 원작을 도전할 엄두도 못 내는 사람들이나 어린이들이 미리 즐기기에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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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부처는 고민이 없다냥 - 고양이처럼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84가지 방법
미야시타 마코토 지음, 김희은 옮김 / 한빛비즈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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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경전, 특히 법구경은 반야심경 등과 결이 다르다. 반야심경 등은 철학적인 측면이 강했다면 법구경은 짧은 격언의 형태로 서술되어 있어 불교에 전문적이지 않은 사람들도 명언집을 읽듯이 친절하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의 목적을 잃거나 방황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현대인들에게 법구경이 도움이 되는 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불경에 관심이 없다면 쉽게 손이 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종교의 가르침을 가장 충실하게 이행하는 존재는 사람이 아니라 다름 아닌 동물인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종교적 가르침이 아무리 교훈적이고 훌륭해도 인간인 이상 끊임없이 고뇌하고 잘못을 반복하기 마련이라 실제 실천으로 옮기기에는 꽤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동물들은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는데, 오히려 그 충실함이 인간과 같이 복잡한 고민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동양사상, 특히 불교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자연스럽게 불교의 가르침과 고양이의 모습에서 공통점을 발견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법구경의 귀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해주기 위해 고양이 부처가 찾아왔다.

 

법구경이 집필된 시기가 시기인 만큼, 지금 시대와는 일부 맞지 않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고양이 부처는 우리에게 반드시 전해주고자 한 메시지 84개를 엄선하여 소개한다. 우선 너무 무겁지 않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데, 법구경의 메시지를 고양이 언어(?), 그리고 고양이 식의 해석으로 소개한다.

 

사서 고생하는 인간임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욕심 때문에, 질투 때문에, 혹은 더 완벽해지고 싶은 마음 때문에 만족할 줄 모르고 더욱 발버둥 친다. 부처가 되기 힘든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반면 고양이가 부처로 등장한 것은 영원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변하므로 걱정하거나 집착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짧은 토막글들로 이루어져 있어 가볍지만 메시지만큼은 제법 묵직하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충분히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로 가득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에 하나씩 읽어도 좋고, 그날그날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도 좋을 것이다. 백날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불교의 기초 용어도 친절하게 정리할 수 있는 것도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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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자 한빛비즈 문학툰
SunNeKo Lee 그림, 정이립 옮김, 너새니얼 호손 원작, Crystal S. Cha / 한빛비즈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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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통을 저지른 죄로 가슴에 'A'라는 표식을 달고 살게 된 헤스터 프린. 사람들의 멸시를 감내하면서도 겸손과 인내, 선행을 잊지 않는다. 자신이 있는 곳으로 찾아온 남편 칠링워스의 온갖 계략에도 굴하지 않은 채, 사생아 펄의 아버지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모든 것을 스스로 감내한다. 세월이 흐르며 헤스터 프린의 A는 간통에서 능력’, ‘천사A로 의미가 변화한다.

 

이미지 효과는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이전에 글로 읽었을 때는 제목과 함께 헤스터 프린에 초점을 맞추어 읽었다. 반면, 만화로 다시 읽게 되니 이번에는 아서 딤스데일 목사에 몰입이 되는 것이었다. 비단 제목 주홍글자는 헤스터 프린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라는 것의 일반화된 명사이고, 좁게는 헤스터 프린뿐만 아니라 아서 딤스데일과 칠링워스, 넓게는 죄가 필연인 우리 인간 모두에 해당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주홍글자는 죄에 대한 낙인이다. 헤스터 프린이 멸시를 당하면서도 표식을 떼지 않고, 아서 딤스데일 목사도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며 고통을 겪었다는 것에서 주홍글자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글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주홍글자는 과오를 저지르는 인간은 어떻게 죄에 대처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모든 것을 감내하는 헤스터, 괴로워하고, 스스로 합리화하려하다가 늦으나마 모든 것을 용기내어 고백한 딤스데일,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은 안중에도 없는 칠링워스. 각 인물의 유형은 인간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물상이다.

 

만화로 주홍글자를 읽었을 때 상당히 핵심을 잘 짚었다고 생각했다. 줄거리를 잘 요약한 것도 훌륭했지만, 헤스터 프린에게만 집중되기 쉬운 작품의 내용을, 주변 인물에게도 비중을 잘 분배했다. 딤스데일의 혼란함, 칠링워스의 집착도 섬세하게 잘 표현하여 에 대한 인물의 다양한 대처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 헤스터의 딸 펄의 표정을 통해 헤스터가 느끼는 죄의식의 두려움도 잘 표현했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무엇보다 정성을 잘 들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헤스터 프린의 'A‘ 문자에 있었다. 만화책 특성상 1도 인쇄를 하고 A는 먹으로 색칠해도 됐을 것을, A를 부각시키기 위해 A를 빨갛게(인터넷상에서는 C로 출력된다) 채색하여 2도로 인쇄했다. A 하나만 채색하며 굳이 인쇄비용까지 높인 바 이건 진심이 아니면 시도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른 시리즈도 전부 다 읽을 생각이다...! 4권밖에 없다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계속 출간할 것이라고 믿는다(?) 부모와 아이가 함께 읽어도 정말 좋을 것 같다. 요새 만화책은 퀄리티도 좋다. 소년조선일보 어린이 만화 코너에 익숙하다 이런 작품을 보니 그저 감개무량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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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시작하지 못하는 당신을 위해 - 잘하고 싶어 시작을 망설이는 세상의 모든 완벽주의자들을 위한 진짜 완벽주의 활용법, 2023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윤닥 지음 / 한빛비즈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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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애들이 장래희망으로 대통령, 우주비행사, 공룡(?)을 꿈꿀 때, 나는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 장래희망이었다. 과학이나 문학을 비롯하여 음악, 미술, 체육, 심지어 온갖 신비주의적인 요소까지, 누군가 나에게 물었을 때 거침없이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꿈이었다. 그렇다 보니 나에게 ‘지식’은 필수요소였고, 이는 책을 탐독하는 계기가 되었다.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자마자 부모님을 졸라 한국/세계 위인전 전집을 들여놓고 읽었고, 다섯 살 때는 삼국지를 독파했다. 10살이 되어 한국문학전집을 장만해 읽기 시작했으며, 이는 결국 지금 세계문학전집에 몰입하는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었다.

부모님이 나에게 책을 읽으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지만, 나는 미친 듯이 몰두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완벽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으리라. 그렇다 보니, 나는 남들의 눈에 완벽해 보여야만 했고,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꼈다. 일본어를 독학으로 배웠고, 지금도 프랑스어를 시작했으며, 뜨개질, 요리를 비롯하여 온갖 것에 발을 들이밀고자 하는 것 역시 이와 크게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나에게 완벽한 인간이란 도달해야 할 존재였다.

하지만 완벽하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사실 완벽한 전자두뇌를 꿈꾸며 성장해 왔지만, 사실 절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세상 모든 분야를 배운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인간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는데다가, 인간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해 컴퓨터가 개발되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기계와 혼자만의 대결을 펼치며 스스로 괴로워하고 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윤닥(윤동욱)은 완벽주의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스스로도 완벽주의 때문에 고통받았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완벽주의는 사실 그 누구라도 충분히 겪을 수 있는 현상임을 알려준다.

완벽주의는 그 자체만으로는 어느 한쪽으로만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지 않다. 완벽에 완벽을 기한다면 정체되어 있던 현 상황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과도한 완벽주의는 자신과 타인에 대해 실망을 낳고,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보며 좌절하고 우울에 빠질 수 있다. 즉, 완벽주의는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느냐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과도한 완벽주의를 줄이고, 보다 생산적인 완벽주의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책에 소개된 완벽주의 테스트를 해 보았다. 나의 경우, 자책형 완벽주의로 평가되었다. 사실 그 누구도 나에게 뭐라고 한 적도 없는데, 남의 눈치를 보다가 작은 실수에도 남들이 비웃을 것이라는 온갖 확증편향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괴로워하는 타입이다. 저자도 이야기하지만, 자신 또는 가족의 우울증으로 내원한 사람의 상당수에는 완벽주의가 있었다고 한다. 나 역시 이래저래 고통스러웠는데, 강박에 가까운 완벽주의가 있었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은 성과주의 사회다. 물론 외국도 결과를 중시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정해진 루트를 따르지 않으면 인생이 망한 것처럼 묘사한다. 인문계가 아니라, 꿈을 위해 기술학교로 진학하면 극구 반대하고, 사회에서는 차별이 만연하다. 우리는 남들과 획일적이어야만 안정감을 느끼게 되었다. 남들과 동일해져야만 한다는 과도한 완벽주의는 결국 모두를 힘들게 하는 것이다.

목표는 원대하게 갖는 것이 좋지만, 오히려 추상적인 원대한 목표는 완벽주의자들에게는 고통이 된다. 목표는 합리적인 선에서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종이에 기록하자. 실제로 걸린 시간을 체크해보면, 나의 불안과 걱정이 사실 유난스러웠음을 알게 될 것이다.

♥ 완벽주의를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완벽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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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맨션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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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기상학자 로렌즈는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큰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나비 효과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는 초기의 사소한 변화가 전체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의미한다. ‘82년생 김지영’으로 젠더 가치관에 나비 효과를 일으킨 작가 조남주가 새로운 나비 효과를 불러일으킬 신작, ‘사하맨션’으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어느 기업이 낙후된 도시에 투자를 하자, 도시는 기쁜 마음에 기업에 각종 혜택을 준다. 그러나 그 혜택은 독이 되어 도시는 파산을 하게 되고, 기업은 그 도시를 인수하여 독립된 도시국가, ‘타운’이 된다. 자본이 있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은 주민, 수치스러운 조건을 통과하면 계약직 인생 L2 되며,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사하’라고 불린다.

사하는 사전적으로 쏟아져 내려간다는 뜻이다. 끝없이 아래로 몰락하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표현이다. 사하는 건설이 지지부진한 맨션에 입주하여 살아간다. 애초에 맨션은 자본력이 있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시설을 의미한다. 맨션 시설은 열악하고, 사하는 국가의 지원은 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가장 하층 계급이 상류 계급의 상징인 집에서 산다는 것은 모순이며 이 두 계급의 간극을 독자들에게 더 넓혀 보여준다.


-음각으로 새기고 녹색 페인트를 채워 넣은 ‘사하맨션’ 글자가 ‘사하’와 ‘맨션’으로 나뉘었다. 사하맨션. 사하, 맨션. 표지석의 ‘사하’ 글자 뒤쪽으로는 검고 커다란 쓰레기 봉지들이 산짐승의 시체처럼 축 늘어진 채 쌓였고, 누런 오수가 흐르고 있다. (p.34)


갈라진 간판은 어우러질 수 없는 두 계층의 단절을 의미한다. 하층 계급을 의미하는 ‘사하’의 글자 뒤에는 쓰레기 봉지들이 널리고 오수가 흐른다. 상류를 의미하는 ‘맨션’의 글자가 아니라 하류를 의미하는 ‘사하’의 뒤에 널린 쓰레기는 사회적 약자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타운이 생기면서 집단에 소속되지 못한 사람들은 어디에도 떠나지 못하고 맨션에 묶여 살며 사회적 디아스포라가 된다. 디아스포라끼리 생활과 규범, 관습을 유지하며 지내듯, 사하맨션 사람들 역시 그들끼리의 공동체를 이루며 생활한다. 사하들의 공동체는 그들이 살기 위한 마지막 발버둥이다.

하지만 사하들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으며 통제가 가득한 헤게모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강제적으로 사회적 디아스포라가 된 이들은 그들의 정체성마저 방향성을 상실한 모습을 보인다.


-우리는 누굴까. 본국 사람도 아니고 타운 사람도 아닌 우리는 누굴까.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성실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뭐가 달라지지? 누가 알지? 누가, 나를, 용서해 주지? (p.51)


그들의 삶은 하루하루 제자리이다. 과거 소위 ‘나비 혁명’을 일으켰으나 흐지부지 실패한 기억들은 그들에게 저항심마저 짓누른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인간답게 살고 싶은 욕망이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니다.


-살아만 있는 거 말고 제대로 살고 싶어. 제대로 사는 일. 어쩌면 내 혼란과 의문의 맥락도 이것이 아니었을까. (p.272)

-아무것도 몰랐다. 이렇게는, 살았다고 할 수 없겠지. 살아 있다고 할 수 없겠지. (p.325)


사하들의 인간다운 삶에 대한 욕망은 나비 효과처럼 점점 확장된다. 작품 곳곳에 나비에 대한 메타포가 이를 암시한다. 허망하게 삶을 살다가 점점 신념을 가지고 끝내는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한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마음이 사람을 움직이죠. 신념은, 그 자체로는 힘이 없더라고요. (pp.283-284)


신념 그 자체로는 힘이 없다. 생각만 하면 거기에서 그칠 뿐이다. 작품 후반, 진경이 행동에 옮긴 것은 나비 효과에서 등장하는 거대한 ‘태풍’이다. 이 태풍은 사하들의 진정한 삶이라는 욕망이 응집되어 있으며 총리관 습격이라는 실천으로 구체화된다. 타운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진실을 알아버린 진경의 좌절은 이미 사하들의 선례를 보았을 때 당연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진경의 말은 타운의 예측을 벗어난다.


-당신 틀렸어. 사람들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어. 그리고 나는 우미와 도경이와 끝까지 같이 살 거고. (p.368)


겉으로 보기에는 사하맨션에서 전처럼 삶을 이어가기에 원래 자리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하는 사그라든 듯했던 저항심이 다시 불씨를 잇고 있다.

영향을 주지 못할 것 같은 미약한 불씨도 큰 불로 번질 수 있다. 비록 사회적 약자들은 당장 큰 변화를 주지 못할지라도 이들의 미약한 불씨는 점점 나비 효과처럼 번져 나갈 수 있다. 절대로 강자는 약자를 위해 그들의 권리를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개인 단위라면 간혹 그럴 수는 있어도 집단에서는 더더욱. 약자들이 그들의 권리를 얻기 위해서는 결국 그들이 행동할 수밖에 없다. 신념 그 자체로는 힘이 없다고 했던가. 약자들의 신념은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적극 소리를 내고 부딪쳐야 한다. 유리 천장이라는 용어가 있다. 위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보이지 않는 사회적 장벽을 의미한다. 하지만 왜 굳이 ‘유리’일까. 유리는 아무리 단단해도 힘에 부칠지언정 깨진다. 방탄유리도 무한정 총을 막아주지 못한다. 우리들의 끝없는 목소리와 부딪힘은 언젠가 한계에 다다른 사회의 방탄유리를 깨부술 단 한 발의 총알을 장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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