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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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는 분명 베스트셀러다. 최근 보니 한국에서도 대략 60쇄 가까이 팔린 모양이다.
베스트셀러, 특히 문학 분야에서의 베스트셀러를 읽고 만족한 적이 드물어서 선뜻 읽을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코엘료의 소설이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매우 많이 읽히는 듯하여 처음으로 그의 책을 손에 잡았다.
베스트셀러답게 잘 읽힌다.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학교보다 여행을 더 좋아하여 양치기가 된 안달루시아 지방의 산티아고는 어떤 아이가 자신을 이집트의 피라미드로 데리고 가서 보물을 발견하게 한다는 꿈을 두 번 꾸게 되는데, 해몽을 하는 노파로부터 그 일이 그대로 현실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얼마 후 그는 또 어떤 노인과 대화하게 되는데, 자신이 살렘의 왕 멜키세덱이라고 주장하는 그 노인 역시 산티아고에게 피라미드로 가라고 한다.
이에 산티아고는 기르던 양들을 처분하고 아프리카로 향한다. 도착 즉시 자신의 전재산을 도둑맞은 후에 그는 그곳의 크리스털 가게에서 직원으로 일하기 시작하고, 그의 상업적 기량에 힘입어 몰락하던 가게는 번성한다. 1년 후 여행을 떠나기에 충분한 돈을 모은 산티아고는 귀향하고 싶은 마음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복귀의 가능성은 언제든 열려있다는 생각에 다시 여행을 시작하기로 한다.
이집트로 떠나는 대상에 합류할 때, 그는 연금술에 빠져 사막의 오아시스에 산다는 연금술사를 찾아가는 영국인을 만난다. 학교보다 여행을 선택한 산티아고와는 달리 책에만 빠져 사는 영국인은 인간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주는 만물의 정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산티아고는 그의 책을 읽게 되지만, 그 속의 과학적 실험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대상 행렬이 오아시스에 도착한다. 산티아고는 거기서 파티마라는 처녀를 만나 순식간에 사랑에 빠진다. 그는 파티마와 함께 있기 위해 보물을 포기할 생각을 한다. 사막에서 군대의 침입을 예감한 그는 이를 부족장들에게 말한 후, 연금술사를 만나게 된다. 군대는 실제로 오아시스를 침입했고, 산티아고의 경고 덕택에 격퇴된다. 산티아고는 부족장들로부터 많은 돈을 받게 된다. 그리고 연금술사는 그를 피라미드로 안내해주겠다고 한다.
사막으로 떠난 두 사람은 얼마 후 사막의 군대에 붙잡히고, 산티아고는 이번에도 다시 돈을 다 빼앗긴다. 그리고 연금술사가 그들에게 산티아고가 바람으로 변하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하여 목숨을 구한다. 뜻밖에도 산티아고는 실제로 바람을 일으키고, 바람과 해와 대화하고 천지만물을 만든 손에 기도한 끝에 스스로 바람이 된다. 그는 만물의 언어를 배운 것이었다.
연금술사는 산티아고에게 직접 금을 만들어 건네준다. 그리고 오아시스로 되돌아간다.
이윽고 산티아고는 피라미드에 도착한다. 근처의 한 언덕에서 어떤 병사의 꿈 이야기를 듣고 그는 보물이 자신의 고향에 묻혀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꿈 이야기를 듣는 것이 그가 피라미드로 왔어야 하는 이유였다.
그리고 그는 고향에서 보물을 발견하고, 파티마에게로 가기로 한다.


줄거리를 적다 보니 좀 길어졌다.


이야기는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면서 동화적인 분위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비현실적인 인물들은 수많은 경구들을 읊조린다. 그 경구들의 내용을 대략 요약해보면 이런 것이 되겠다.


세상 만물에게는 자아가 있고, 그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개별 존재의 목적이다. 이를 '자아의 신화'라 부른다.
세상에는 이 자아의 신화가 실현되도록 도와주는 표시들이 있으며, 개체들은 이렇게 세상이 개체들의 자아 실현을 도와주는 조건 하에 있으므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는 확신과 이 목표를 향한 굳은 의지를 가진 개체들은 누구나 저 '자아의 신화'를 쓸 수 있다.
현재 속에서 늘 인내하고 노력하다보면 조만간 기회가 온다. 그리고 이 기회에 나의 노력이 더해질 때 우리는 목표에 성큼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
물론 시련과 시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시련이나 시험도 확신과 의지로 이겨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신의 뜻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뭐 좀 새로운 이야기가 있는가? 내가 보기엔 없다. 오히려 흔해빠진 이야기고, 빈약하고 일면적이며 그래서 오류가 많은 이야기다.
확신과 의지를 잃지 않으면 반드시 성공한다, 이런 이야기일 뿐인 것이다.
우선 확신과 의지를 잃지 말라는 이야기는 뭐 새롭지도 않고 나쁠 것도 없다. 그러려고 노력해야지.
그런데 '그러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주장은 대단히 의심스럽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실패는 모두 개인의 의지박약 탓이라는 말인가?
이런 인식이란 참으로 소박하고 어리숙하다.
삶은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사회적 조건에 의해서도 좌우되며, 여기에 우연도 작용한다.
그럼에도 모든 문제를 개인에게만 돌리는 것은 사회에 면죄부를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삶과 운명에 대한 더 깊은 성찰을 가로막는다.
'성공 = 준비(노력) + 기회'라는 공식도 틀릴 것이 없는, 이미 잘 알려진, 그래서 진부한 것이다.
게다가 도대체 이 책이 말하는 '성공'이란 무엇인가?
보물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보물, 즉 금화와 보석과 황금이 가득 담긴 궤짝은 전혀 산티아고가 자신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무수한 사람들의 눈물어린 피땀을 착취해간 어느 권력자나 부호의 것일 터.
그것을 혼자 차지하는 것이 이 책이 말하는 '성공'이다.
이는 마치 로또에 당첨되어 보겠다고 매주 로또 살 돈을 벌기 위해 무진 노력하거나
해저의 보물선을 찾는 데 전재산을 쏟아붓는, 그런 삶을 살아라는 것과 다름 없다.
물론 이 책에서의 보물이란 그저 성취의 상징일 뿐이며, 이를 오로지 물질이나 타인의 노동을 편취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자구에 매달리는 일차원적 해석이라는 주장도 있을 수 있겠다.
그렇다면 코엘료는 참으로 잘못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 것이다.
농부와 세 아들에 대한 이솝우화보다 훨씬 못하다.
또 이 책은 과연 무엇이 성공인가, 인생의 목적은 성공에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코엘료에게는 결국 보물로 상징되는 물질적 성공이 인생의 목표라는 것이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기정사실인 것이다.
그런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이 책이 많은 위안과 의지력을 제공해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지금, 그런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세상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결국 이 작품은 진부하고 편협한 관념과 자본주의적 가치관에 충실한 인간관을 보여주는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작품이 이토록 크게 성공한 것이 전혀 놀랍지 않으며, 또한 아주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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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62537.html







오늘 <한겨레>는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오역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는 최재봉 기자의 기사를 실었다.

우선은 반길 일이다. 번역에 대한 토론은 많을 수록 좋다.

그런데 이 기사를 읽으면서 왠지 나는 심정이 불편하기도 했다.

무엇때문이었을까.

이런 불편한 심정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 기사를 다시 한 번 읽어보았고, 어느 정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논란이 되는 부분은 대작 <안나 카레니나>의 단 한 개의 짧은 문장이다. 

나의 평소 생각은 대략 100페이지에 하나 정도의 오역이 생기는 것은 거의 피할 수 없는 일이고, 따라서 눈 밝은 독자가 그런 오류를 발견한다면 지적하여 고칠 수는 있겠지만, 역자를 탓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역자도 인간이고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실수를 한다. 그런 실수는 거의 필연적이기까지 하다. 작심을 하고 달려들어 찾자고 하면 100페이지에 오역 하나 없는 번역본이란 아마도 단 한 권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정도의 빈도를 훨씬 넘어서는 잦은 오역이 발견되는 경우에만 역자를 비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기사에 따르면 한 누리꾼이 역자에게 이 문장이 오역이 맞다면서 사과를 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이런 식이라면 아예 세상의 모든 역자들에게 사과를 요구해야 할 것이다. 다른 나라라고 역자가 신이 아닌 다음에야 오역이 발견되고, 실제로 나는 영역본들에서 더러 오역을 발견하기도 했다. 결국 세상의 모든 역자들은 사과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요구가 정당한가? 역자의 번역을 둘러싼 사정을 안다면 과연 이런 식으로 비판할 수 있을까?

며칠 전에 한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가난과 병으로 죽었다. 그만큼은 아닐 지 몰라도 한국에서 번역자의 위치도 아주 낫다고 볼 수 없다. 번역은 한마디로 돈이 안 된다. 학적 성과로 인정되지도 않는다. 그러면 왜 번역을 할까? 그 얼마 되지도 않은 돈이라도 필요할 수도 있고, 그래서 시간상 따지고 보면 편의점 알바보다 별로 나을 것도 없는 보수를 위해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판을 두드려야 한다. 게다가 전문적이거나 높은 수준의 독자를 요구하는 책의 경우 팔리지가 않아 2쇄도 못 찍은 책들이 수두룩하다. 그런 경우 처음에 받은 소액의 인세가 전부다. 

그런 어려운 조건 속에서 번역을 해서 내놓았는데 독자들이 단 한 문장의 번역이 잘못되었다면서 공개적으로 사과하기를 요구한다면, 정말 누가 번역을 할 맛이 나겠는가. <안나 카레니나>와 같은 대작의 번역에서 문제삼을 것이 그 한 문장 뿐이라면 오히려 칭찬을 받아 마땅한데도 말이다.

두꺼운 번역본에서 오역 한 문장을 찾아내기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걸 찾아냈다고 기고만장하여 공개사과를 요구하는 꼴이 볼성사납다.

'로쟈'라는 필명으로 인터넷에서 유명해져서 <한겨레>에 번역 칼럼을 쓰고 있는 이현우의 태도도 마뜩잖다.

번역 평론을 하려면 진지하게 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올리거나 해야 할 것이다. 딱 한 문장에 대한 비교로 신문칼럼을 쓰다니 대단히 불성실한 것이 아닌가. 이런 칼럼은 너무나 쓰기 쉽다. 한 번역본을 읽다가 이상한 문장이 있으면 원문과 영역본, 다른 번역본과 대조해보면 작업 끝이다. 그걸로 번역본에 대한 평가를 했다고 할 수 있는가? 턱도 없는 일이다.

이현우는 적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지 않은 번역본에 대해서는 신문에 글을 쓰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의 칼럼과 논란 기사를 보면서 이제 사람들은 민음사판 <안나 카레니나>는 사지 말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이현우의 주장도 그런 것인가? 그런 주장을 할 만큼 번역본을 자세히 검토해보았는가?

적어도 <교수신문>에서 번역본을 평가한 필자들은 이런 태도가 아니었다.

역자 연진희씨에게 사과를 요구한 그 누리꾼은 "번역은 의견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역인가 아닌가가 있을 뿐"이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그는 아마도 근래에 왜 수사학이 새롭게 주목을 받아왔는지, 해체론은 또 무엇이었는지, 왜 작가의 본국에서도 문장의 뜻을 놓고 서로 다른 해석이 충돌하기도 하는지, 그런 이야기들을 들어보지도 못한 모양이다.

나로서는 <안나 카레니나> 번역본의 한 문장이 오역인가 아닌가에 대해 별로 열을 올릴 생각이 없다. 이런 데 열을 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굳이 칼럼과 기사로 알려져야 하는 이유도 알 수 없다. 적어도 제대로 된 번역비평은 이런 데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관심 있는 분은 여기에 내가 올려놓은 <더 리더>에 대한 나의 리뷰를 읽어보시기 바란다. 나는 한 문장의 오류를 발견하고 그런 글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그 숱한 오역들에도 불구하고 왜 역자에게 굳이 '사과'까지 요구하지는 않았는지 잠깐만이라도 생각해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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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서양문학사 상권 청소년을 위한 역사 교양 14
김계영 지음 / 두리미디어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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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은 <청소년을 위한 서양문학사>다.

이 제목은 상당히 눈에 띈다.

첫 번째 이유는 '서양문학사'라는 거창한 표제에 있다. 과연 한 사람의 저자가 '서양문학사'를 쓴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책 검색을 해보면 '서양문학사'라는 제목을 내건 책은 이 책이 유일하다. 그리고 이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서양문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도 그의 전문적 지식은 대개 한 나라의 한 작가, 좀 더 나아가면 한 시대 혹은 사조 정도에서 그친다. 좀 더 폭넓게 공부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전문분야에 몇 작가나 한두 시대를 더할 수도 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한 나라의 문학의 일부분을 제대로 아는 데 그치는 것이다. 그래서 <영국문학사>, <독일문학사>를 쓴다는 것만 해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작업이다. 이런 책을 쓰게 되면 상당부분은 자신이 읽지 못한 작품,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시대에 대한 다른 참고문헌들의 기술을 정리하는 수준에서 원고를 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서양문학사>라니!

하지만 서양문학 전체의 흐름과 주요작가들, 시대들의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싶은 독자들은 제법 있을 것이다. 전체에 대한 개괄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개별적인 작가와 시대에 접근하고 그들의 위상을 미리 파악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어느 한 작가, 한 시대만 독서를 제한하지는 않을 터, 이런 개괄은 모든 문학애호가에게 필수적인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불가능성과 필수성의 역설적인 결합으로 인해 '서양문학사'는 오랫동안 매우 허전한 구멍으로 남아있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은 '서양문학사'라는 제목을 당당히 달고 있다. 도대체 누가 이런 걸 썼을까? 저자에 대한 정보를 보니 그는 디드로를 전공한 불문학자다. 여느 서양문학 전공자들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이력을 갖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서양문학사를 썼을까?

책을 읽어본 결과, 해답은 백과사전들에 있었다. 책 내용의 대부분이 여러 백과사전들에서 거의 옮겨온 것들이다. 시대사적 정리 부분에서는 일부 저자 자신의 원고가 사용되기도 한 듯하지만, 작가와 작품에 대한 설명은 거의 백과사전에서 따온 것들이다. 그러니 딱히 저서라고 하기도 어렵다. 일종의 편집본이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이 책은 '저서를 가장한 편집본'이라는 악명 높은 관행을 보여주는 나쁜 사례로 치부되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저자는 솔직히 이렇게 밝히고 있다.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기는 했지만 필자가 서양 문학 전체를 통괄하는 작업을 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미 나와 있는 많은 서양 문학 관력 책들과 문학사전, 백과사전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상권, 7쪽)

출처들을 개별적, 구체적으로 밝힌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의 편집본적인 성격을 전체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발언이다.

편집본이라도 이 책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대, 작가, 작품의 순서를 잡아 일목요연하게 배치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의미를 갖는다. 독자들은 여러 문학사전, 백과사전들을 이리 저리 뒤적거리면서 때로 방향감각을 상실하거나 머리 속이 뒤죽박죽이 되는 사태를 이 책을 통해 피할 수 있고, 작심만 하면 짧은 시간 안에 서양문학사 전체를 큰 어려움 없이 머리 속에서 개괄할 수 있다. 편집 자체가 이미 상당한 공로인 셈이다. 이런 편리한 일은 이런 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게다가 책에는 내용과 연결되는 사진들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고, '청소년을 위한'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만화 삽화들도 있다. 물론 이 삽화들은 너무나 평범한 상상력만을 보여주고 있어 실소를 자아내기도 하지만, 그래도 책이 너무 딱딱하게 느껴지는 것을 어느 정도 막아준다.

책 제목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청소년을 위한'이라는 부제다. 방금 말했듯 만화 삽화가 사용된 것, 모든 문장이 경어체로 작성된 것 등이 청소년 독자를 염두에 두고 집필된 책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실은 이 책을 놓고 청소년/성인 독자를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사전들에서 사용된 어휘들과 문장들이 거의 그대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내용이 평이한 편이다. 그러니 청소년이 읽어도 좋고, 어른들이 읽어도 전혀 문제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청소년이 읽어도 무리가 없는 서양문학사' 정도가 올바른 제목이 될 듯 싶다. 그러나 누가 책 제목을 이렇게 붙이겠는가?

나는 이 책을 한 번에 읽지 못하고 띄엄띄엄 읽는 바람에 상하권을 모두 읽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그래도 알던 내용을 다시 확인하고, 모르던 내용을 배우고, 시간적 순서를 새롭게 기억하는 등의 일을 하면서 이 책을 읽는 내내 즐거웠다.

서양문학작품을 즐겨 읽는 독자들 모두에게 일독을 적극 권하고 싶은 책이고, 문학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 뿐만 아니라 역사와 사상에 대한 정보도 상당히 얻을 수 있는 책이기에 청소년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청소년이라고 해도 고등학생 정도는 돼야 볼 수 있을 듯 싶다. 두고두고 사전처럼 쓸 수도 있다.

저자라기보다는 편집자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겠지만, 어쨌든 이런 큰 작업을 무리 없이 해낸 김계영님의 수고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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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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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이 무서운 속도로 팔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제 장하준의 책을 읽어봐야 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나는 그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풍문은 많이 들었고, 심지어 국방부가 그의 책을 금서로 정하는 바람에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한층 더 유명해졌다.

읽으면 득이 되리라는 짐작은 갔지만, 책 내용에 대한 안내들로 보건대 별 새로운 이야기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나같은 경제학의 문외한들조차 상식의 눈으로도 알 수 있는 이야기들로 보였다.

문제는 그가 제기하는 것으로 짐작되는 문제들이 발견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와 같은 사람들의 주장들이 현실적으로 힘이 없는데 있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이 불티나듯 팔린다는 것이 아닌가.

중요한 건 이 사실이었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경우처럼, 이 책의 눈부신 판매속도 자체가 중요한 현상이었다. 독자들, 나아가 국민들이 이러한 책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현상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뭔가 좀 달라지려나.

그래서 <정의란 무엇인가>의 경우와 비슷하게, 나는 이번에도 약간 늦게 이 현상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주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이 책은 한마디로 아주 잘 쓴 책이다. 어렵지도 않다. 술술 읽힌다. 그럼에도 아주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 구성되었으며, 어느 한 문장도 허술하지 않다. 들어갈 이야기들이 다 들어갔고, 전개되어야 할 논리가 다 전개되었다. '그들'의 논리는 간략하지만 충실하게 요약되었고, 따라서'우리'의 공격은 소위'허수아비 공격의 오류'에 빠져들지 않았다.

이 책에서 공격하는 수많은 논리들이 지금 이 나라를 지배하는 정치세력의 논리라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금융위기로 인한 위기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국민들의 몸부림이 바로 이 위기를 초래한 논리로 무장한 사람들을 통치자로 선택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에서, 무척 아이러니하다.

'작은 정부', '지식 경제', '기업 하기 좋은 나라'(기업에게 좋은 것은 나라에게도 좋다는 등식), 노동 유연성', '기회 균등', '트리클다운 정책'...

이 모든 것들이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의 핵심적 구호들이었고, 이 책은 이런 구호들이 얼마나 허술하고 비현실적이며 소수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입장에 서있는지를 폭로한다. 그리고 그 폭로는 <파이낸셜 타임스>가 평가했듯이"반박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장하준의 이 책이 이렇게 대박을 터트리기 위해서는 금융위기가 먼저 있어야 했다. 이 책이2007년쯤에 출판되었더라면 아마도 지금보다는 훨씬 덜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결국 철학만이 아니라 경제학도 미네르바의 부엉이라고 보아야 할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장하준의 책을 읽기 전과 읽고 난 후의 변화는, 직감과 추측, 순수한 논리성에 머물렀던 많은 것들이 통계 등의 경험자료에 의해 확인되었다는 것과 더불여 여러 새로운 논거들을 얻은 데 있다. 이만하면 충분한 소득이다.

그래, 이 책을 읽은 수많은 독자들도 나처럼 이렇게 많은 것들을 확인했을 터이니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가 시장의 결과에 대해 과감하게 문제를 제기할 때만이 더욱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333쪽)

촛불시위는 결국 이 책에서 비판하는 자유 시장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이기도 했다.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소통이 안 되는 불통세력이 권력을 잡고 있다면?

"적어도 지금까지 고안된 제도 중에서는 민주주의 정부가 사회적으로 제기되는 여러 상충된 요구들을 조정하고, 더욱 중요하게는 사회 전체적으로 복지 수준을 향상시키는 가장 우수한 장치이다."(338쪽)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이 작금의 한국현실에도 타당하려면"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정부가 여러 상충된 요구들을 조정하기는 커녕 스스로 어느 한 쪽 편인 경우도 있다"는 말을 덧붙여야 했을 것이다.

유일한 희망은 앞으로 있을 선거들에서 자유 시장 자본주의 세력이 선출되지 않는 것이다. 이 책으로 인해 약간이라도 그런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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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간 사계절 1318 문고 61
지크프리트 렌츠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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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의 원제는 Schweigeminute이다. 이 말을 원뜻 그대로 옮긴 것이 <침묵의 시간>이라는 한국어 제목이지만, 대개는 '묵념 시간'을 의미한다. 실제로 슈텔라 선생님의 추모식에서는 묵념이 행해진다. 그러나 실은 이 책의 원제가 뜻하는 바는 소통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만 비로소 온전히 보존될 수 있는 사태를 말한다. 153쪽을 보자:

"우리가 함께 발견하고 함께 나눈 우리만의 영역이었죠. 이 영역은 결코 남들에게 누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누설하는 순간 내게 전부였던 것이 단번에 사라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죠. 어쩌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침묵 속에 머물고 지켜져야 할지 모릅니다. 선생님, 그래서 나는 추모사를 맡지 않았습니다."

누설하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것 - 그것은 왜 그럴까? 우선 떠오르는 것은 세상 속의 편견들과 저급한 관심들이다. 학생과 선생의 사랑. 바로 며칠 전 이런 사건이 세간에 알려졌다. 중3과 30대의 여선생님이었던가, 그 두 사람의 육체관계를 포함한 사랑이 있었다는 것이 보도되자마자 세상은 오랜 만에 먹잇감을 찾은 야수처럼 그 이야기를 물어뜯었다. 하긴 20년이 넘는 나이의 차이라면 한 편이 미성년자가 아니라도 그리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한 편이 13살이라니! 사태는 분명해보였다. 누구도 13살 소년이 선생님에 대해 느꼈을 감정의 종류에 대해, 그리고 선생님이 그 제자에게 느꼈던 감정에 대해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관심은 오로지 두 사람 사이의 육체관계에만 집중되었고, 반응은 경악이었다. 내밀한 감정을 위한 공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소위 원조교제와 조금도 다름 없는 취급을 받았다.

이 책의 주인공 크리스티안과 슈텔라의 나이 차이는 위의 사건보다 훨씬 적다. 크리스티안은 18세였고, 슈텔라는 여전히 여학생으로 보이는 모습이니 그보다 아마 5년정도 연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면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선생과 제자 사이의 추문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크리스티안의 입장에서는 그들로부터 전혀 인정받고 싶지 않은 세인들 앞에서 공연히 자신과 슈텔라를 옹호하고 진실을 바로잡아야 하는 지경에 처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의 '침묵의 시간'은 오랫 동안 지속될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그는 추모사를 하지 않았다.

'추문'이라는 시선을 거두고 보면, 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첫사랑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한 소년이 몇 년 연상의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신분(여기서는 선생과 제자이지만 귀족과 평민, 부자와 빈자 등 여러 다른 변주들이 있다) 차이 때문이 사랑의 미래는 밝지 않다. 어려운 사랑을 이어가던 중, 한 사람이 사고로 생명을 잃고 만다. 남은 사람은 망자를 추모하며 슬픔에 잠긴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골격이다.

80줄을 넘어선 독일의 대가 지크프리트 렌츠는 사랑 이야기를,특히 성적인 사랑 이야기를 소설에서 쓰지 않기로 유명했다. 이 때문에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런 그가 80줄을 넘긴 나이에 처음으로 사랑 이야기를, 그것도 침대에서의 사랑까지 포함하는 사랑 이야기를 썼다. 작품은 발표된지 2주만에 <슈피겔> 베스트셀러 리스트 2위에 올랐다. 렌츠의 고정독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다른 독자들까지 이 작품을 사서 읽은 것이다.

80이 넘은 노작가가 아마도 60년대쯤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여 쓴 이 이야기가 왜 2008년의 독일독자들의 마음을 건드린 걸까?

이에 대한 대답은 독자들마다 제각기 다르겠지만, 이 책이, 이 책에서의 사랑이 어딘가 혹독한 현대로부터 벗어나 있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그들의 사랑을 지켜보는 작가의 시선이 반가우리만치 전통적인 예의를 갖추고 있다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바다와 섬과 갈매기와 방파제, 화물선 등으로 이루어지는 해변 소도시의 풍경. 방학이면 그냥 해변에서 놀아도 좋은 느림의 시간. 그 속에서 슈텔라는 스코틀랜드 대표가 그림에서 그렸듯이 "긴 머리에다 꿈을 꾸듯 몽롱하고 커다란 눈을 가진 인어"(114)처럼 돌아다닌다. 누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왜 그녀가 크리스티안을 사랑의 파트너로 삼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 그녀 자신도 대답할 수 없으리라. 단지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분위기가 있었고, 어떤 접촉이 있었으며, 그 접촉이 예상치 않았던 감정을 일으켰고, 그들은 그 감정을 좇았다는 것, 그것이 전부이리라. 하긴 사랑에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설명할 수 있다면 과연 그것이 사랑일까.

어떤 의미에서는 슈텔라가 뜻밖의 사고로 죽은 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죽지 않았다면 조만간 두 사람의 관계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은 사회에 의해 발각되었을 것이고,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서보다 세인의 시선에 대해 더 집중해야 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사랑은 아름다움만을 간직한 그대로 남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크리스티안의 시점에서 서술되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성장과 사랑과 고통, 열정과 죽음, 그 후의 오랜 슬픔에 대한 이야기다. 영원히 지속시키고 싶었던 벅찬 행복의 경험 -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을 꾸는 데 그쳤을 그 경험을 크리스티안은 실제로 할 수 있었고, 그의 이야기는 아마도 수십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알려질 수 있었을 것이다. 경험하지 못했던 꿈으로서만도 아름다운 이 성장기의 사랑 이야기를 읽으며 누구는 사랑을 위한 용기를 얻을 수도 있겠고, 누구는 오랫동안 덮어두었던 꿈의 기억을 들추어볼 수도 있겠다. 그런 일들이 쌓여 우리가 좀 더 사랑할 줄 아는 존재가 된다면 세상도 좀 더 살만해지지 않을까. 돈이 짤랑거리는 소리만 가득한 이 세상이 아무래도 좀 흉하고 피곤하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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