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였냐 하면, 냉장고의 사용법에 크나큰 전환의 계기가 찾아든 무렵이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즉 올 것이 왔다. 란 느낌. 그러니까, 어느 날 냉장고의 문을 열었는데 그 속에 여전한 풍경이펼쳐져 있었다. 두 개의 맥주캔과 김치통, 입을 쩍 벌리고 있는 15리터짜리 우유팩과 한 줄의 계란, 입을 허 벌린 채 나는 생각했다.
환장할 노릇이군.
그것은 모든 인류에게 부끄러운 풍경이었다. 이 환상적인 냉장시대에 겨우 이따위로 냉장고를 사용해왔다니. 과연 이 정도로 몰지각한 인간이었나? 나는 자성(自省)했고, 두 개의 맥주캔과 김치통과 우유팩과계란들을 모두 끄집어냈고, 냉장고의 내부를 윤이 나도록 청소했고, 이제 앞으로는 뭔가 근사한 용도로 냉장고를 사용하리라는 굳은 각오를다져나갔다. 그게 인류에 대한 도리야. 변질된 우유를 싱크대에 버리며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훌륭했던 각오와는 달리, 막상 그 용도에 대해선 뾰족한 생각이 떠오르질 않았다. 고민은 날이 갈수록 깊어갔지만 - 뭐야, 사지선다.
형이 아니잖아. 친구들은 그런 식으로 나의 고민 자체를 부정했고 - 자식, 보기보다 태평한 성격이네. 선배들은 태평한 얼굴로 그런 대답들을늘어놓았으며 - 싫어, 재밌는 얘기나 해줘. - P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