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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생의 첫날
비르지니 그리말디 지음, 이안 옮김 / 열림원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24살 봄에 나홀로 일본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그때 나는 학생도 아니고, 직장인도 아니라서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막막한 상태였다. 문제는 무언가 하고싶은 것조차 없는, 모든 것에 의욕이 없었다는 것. 무슨 생각이었는지 일본어나 영어를 전혀 못하면서 덜컥 비행기표와 숙소를 알아보고 일본으로 향했다. 혼자 한 여행이어서 입에서 냄새가 날 정도로 하루종일 아무 말 없이 걷고, 보고, 듣기만 했는데 그 일주일이 지금도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그때 나는 벤치에 앉아서 하루종일 멍때리기도 하고, 어딘가 목적지가 생겨서 지도를 보고 향하다가 헤맬 때는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사람구경을 하고, 즉흥적으로 일정을 바꾸며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나의 선택으로만 지내보았다. 현실이 싫어서 무작정 도피했지만 혼자만의 시간이 나쁘지 않았고 그리 외롭지도 않았다. 머릿속은 생각으로 가득 차기도, 텅 비어버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그 시간이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나의 첫 번째 괄호 안의 시간들이었다. 여행 중반부터 내 삶에 열정과 의욕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돌아온 이후로 내 인생의 2막이 시작되었다. 이 책의 마지막장을 덮고 나니 그때가 떠올라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마리, 안느, 카밀은 각각 자신만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여자들이다. 마리는 평생 좋은 엄마, 좋은 아내로 살아왔지만 그녀를 제일 지지해주고 아껴주었어야 할 남편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상처를 가지고 있고, 안느는 평생 한 남자만을 바라보고 살아왔는데 단 한번의 실수로 상대방의 신뢰를 잃고 버림받았다. 카밀은 뚱뚱하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좋아하던 첫사랑에게 굴욕적인 일을 겪고 성형미인으로 새인생을 살지만 아직 자존감이 회복되지 않은 상황이다. 세 여자는 '고독 속의 세계 일주'라는 프로그램으로 세계일주를 하는 여객선을 타고 100일간 일곱 개의 바다를 건너고 다섯 개의 대륙을 지나 서른여섯 개의 나라들을 방문한다. 이 여객선의 규칙은 커플은 탑승이 금지되고 배 안에서 연애 행위 또한 일체 금지라는 점이다. 여하튼 뭍에서 겪은 아픈 상처를 간직한 채 배에 오른 세 여자의 자아찾기 여행은 이렇게 해서 시작된다.
내가 여자여서 그런지 책 속의 여주인공들이 나이, 성격, 개인의 상처가 각각 다른 데도 불구하고 마리, 안느, 카밀 모두에게 감정이입이 쉽게 되었다. 그녀들이 하와이에 있으면 나도 하와이에, 싱가폴에 있으면 나도 싱가폴에, 이집트에 있으면 나도 이집트 땅을 밟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들이 웃고, 울고, 즐기고, 행복해하면 나도 똑같은 감정의 파도에 휩쓸렸다. 처음엔 여객선이라는 한정된 장소 안에서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여객선이 들르는 나라에서 체험하는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걸까. 다시 사랑하지 않겠다던 마리, 버림받은 아픔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하던 안느, 첫사랑에게 받은 상처를 간직하고 있던 카밀이 새로운 사랑을 찾게 된 것도 너무 행복했다. 책 속에서 제일 멋있었던 인물은 이블린과 조르주이다. [277 - “마드무아젤, 그렇지 않아요. 사랑엔 나이가 없어요. 만약 내가 당신과 같은 생각을 했다면, 지금쯤 건조하게 쪼그라든 심장을 갖게 되었을 거예요. 주름살은 감정을 막는 차단막이 아니에요. 내 나이가 벌써 여든인데, 조르주의 품 안에 있을 때는 사랑받는 소녀가 된 기분이에요. 몸이 변하는 것이지 감정이 변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여객선에 탄 등장인물들 중 내가 응원하지 않고, 지지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 같다.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행복과 사랑을 찾아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너무 행복했다. '그녀들의 성장소설'이 아니라 '어른들의 성장소설'이라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나보다. 지금까지도 내 마음 한켠이 따스한 걸 보니 사랑은 언제나 정답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오랜만에 읽는 내내, 읽고 나서도 계속 기분 좋은 책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