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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복과 나비
장 도미니크 보비, 양영란 / 동문선 / 199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의식은 말짱한데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장 도미니크 보비는 이것을 잠수복을 입은 나비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는 뇌일혈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비되었지만 의식은 멀쩡한 '로크드 인 신드롬'에 걸린 남자이다.
몸을 마음대로 제어하지 못해 항상 그 자리에 있지만 너무나도 멀쩡한 의식은 나비처럼 추억 속을 살풋살풋 날아다닌다. 그는
나비가 되어 어디든 간다. 엘르지의 국제판 담당자들이 모임을 갖고 있는 홍콩으로도 가고,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어린 아이가 되어
외할아버지를 찾아가기도 한다. 추억과 상상에 의식을 내어주고 있다가 진열장 유리에 비친 입은 비뚤어지고, 코는 울퉁불퉁하고,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곤두섰고, 한쪽 눈은 꿰매져 있고, 나머지 눈은 카인의 눈처럼 커다랗게 열려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정도이다.
그를 보며 소통의 중요함을 느꼈다.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과 서로의 생각을 교환할 수 없자 소통의 단절에서 오는 답답함,
외로움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안타까웠다. 그는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나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희망고문 따위는 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아주 나쁜 번호를 뽑았을 뿐이라며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장장 15개월간 20만 번 이상 눈꺼풀을 깜빡거려 이
책을 쓴다.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그리움, 좌절감, 외로움, 고독함을 눈 깜빡임으로 풀어낸 것이다. 그는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나는 그의
행위에서 희망을 느꼈다. 책을 읽고 나서 ‘로크드인신드롬’이라는 병이 궁금해서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았으나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같은 병명의 환자가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기억이야말로 감각의 무궁무진한 보고이다. 먹고 남은 음식만을 가지고도 새롭게 먹을 수 있도록 조리하는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나에게는 기억을 더듬어 오래오래 음미하는 기술이 있다.
-나는 점점 멀어진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멀어지고 있다. 항해중인 선원이 자신이 방금 떠나 온 해안선이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광경을 바라보듯이, 나는 나의 과거가 점점 희미해져 감을 느낀다. 예전의 삶은 아직도 나의 내부에서 불타오르고 있지만 점차 추억의 재가 되어 버린다.
-모자라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나만 제외하고. 나는 거기에 없고 다른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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