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루키의 소설들은 이제까지 봤을 때 몽환적인 느낌을 많이 준다. 환상과 사실이 적절하게 섞여 있어 실제를 말하는 건지 공상을 말하는 것인지 헷갈린다. 하루키의 소설들은 이런 특성 때문에 섬뜩한 감각이나 날카로움은 찾기 어렵다. 저런 감각은 보통 논리적인 정연함에서 발생하는 것일 텐데 논리가 맞지 않는 부분은 고민해서 맞추지 않고 휙 하고 넘겨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번 소설집에서 모처럼 예리한 소설을 한 편 봤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모든 책을 봤다 생각했는데 장편은 모두 봤을지 몰라도 단편은 아직 다 본 게 아닌가 보다. 이 책을 보면서 느꼈다. 아직 못 읽은 그의 책이 있을 수 있겠다고 말이다. 이제까지 내가 본 그의 소설과 다르게 몽환적인 느낌은 살짝 있으면서 섬뜩함을 주는 단편을 지었다.

물론 논리적이거나 냉정함에서 오는 그런 섬뜩함은 아니었다. 그저 분위기를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다. 분위기도 잘 못 만드는 양반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고 유지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오호라 이런 글을 써도 잘 쓰겠는데? 그런 생각을 했는데 글쎄다. 이 글 말고 다른 글에서 이런 분위기를 본 기억이 없어서 딱 이거 하나만 그럴 수도 있겠다.

이제까지 그의 글 중 가장 재미있던 건 에세이집. 소설들은 딱히 재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그나마 이 소설집에서 헛간을 태우다는 나름 좋았다. 그 외 다른 소설들은 딱 그의 소설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에세이 작가로 에세이만 많이 써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아직도 매일 아침 다섯 개의 헛간 앞을 달린다. 우리집근처의 헛간은 여전히 한 곳도 불타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헛간이 탔다는 얘기도 들리지 않는다. 또 12월이 오고, 겨울새가 머리 위를 지나간다. 그리고 나는 나이를 먹어간다.
밤의 어둠 속에서, 이따금 나는 불에 타 허물어지는 헛간을 생각한다. - P8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