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서랍 안에 반듯하게 개켜 돌돌 만 깨끗한 팬츠가 잔뜩 쌓여 있다는 것은 인생에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하나(줄여서 소확행)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이건 어쩌면 나만의 특이한 사고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혼자 사는 독신자를 제외하고 자기 팬츠를 제 손으로 직접 사는 남자는, 적어도 내 주변에는 그리 흔치 않기 때문이다.
- 본문 P243 중 -

2018년을 관통한 핵심 키워드인 소확행이 탄생한 순간의 글이다. 20년이 훌쩍 지난 아주 옛날 에세이에 들어있는 키워드인데 이제야 그 빛을 발하니 저 책을 쓴 하루키도 어리둥절할 일이다. 이제 70이 넘은 하루키는 우리나라에서 그의 책의 한 구절이 이렇게 큰 파장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까? 아니 저런 글을 썼다는 걸 기억이나 할까? 궁금할 따름이다. 살짝 뒤져보니 20년이 아니라 30년 전의 글이다. 86년에 발표한 책에 실려있던 글이니 30년도 훌쩍 지났다.

책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 같다. 30년 전의 글이 이제 파급을 줄 수 있다. 물론, 30년 전의 음악이 인기를 끌 수 있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역주행을 하는 경우가 몇 번 있었다. 몇 년 전 영화인 [맘마미아]나 18년도 최고의 영화로 꼽혔던 [보헤미안 랩소디] 등 영화로 인하여 음악이 다시 조명받는 경우다. 하지만 이건 영화라는 매체 덕분에 조명을 받은 거지 순수하게 음악으로만 인기가 되살아난 경우가 아니다.

[랑겔한스섬의 오후]는 몰라도 소확행은 모두들 안다. 지금의 현상을 생각해서 쓴 글은 아니고 순수하게 자신의 취향을 밝힌 글이긴 했지만, 모두의 뇌리에 깊게 박히는 글을 만들어 냈다. 재미있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70대의 하루키는 40대의 하루키가 쓴 글을 어떻게 생각할까? 저런 게 행복이라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나의 행복은 이런 거지 하고 생각하고 있을까?

이 책을 접했던 것은 소확행이 트렌드가 되고 난 후 궁금해서 검색한 후 독특한 에세이의 이름을 접하고 찾아서 읽어 보았다. 그땐 소확행이 뭔지 궁금했기 때문에 그 구절만 인상에 남고 나머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루키란 사람이 독특하니, 이 사람이 쓴 다른 책을 읽어 봐야겠다 하고 한동안 뇌리에서 없어져 있었는데 어느 날 눈에 들어오는 다른 책이 있어 무심코 집어 들고 읽게 되었다.

사람이란 재미있는 게 읽으면서 그 당시에는 무심코 읽었던 내용이 새롭게 느껴지고 있었다. 처음 읽을 때 알던 지식과 지금의 지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독서와 독서 사이 다른 책을 통해 접한 지식이 제법 있었던 모양이다. 하루키가 한참 설명하는 데 그냥 흘려 보았던 내용이 다르게 보였던 것이다. 다시금 책의 대단함을 느끼게 되었다고 할까?

책의 두께도 얇은데, 절반 정도가 삽화로 이루어져 있어 정말 순식간에 독서가 끝났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책 읽기가 끝났는지 깜짝 놀랐을 정도다. 물론 책을 재미있게 쓰는 하루키의 독특한 글쓰기도 한몫을 했다.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유명한 소설가의 책을 소설 외 에세이로만 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2권을 읽었는데 동일 내용의 책을 읽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코끼리 공장의 해피앤드], [랑겔한스섬의 오후] 2권을 합본해서 하나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예전엔 [해뜨는 나라의 공장]과 [랑겔한스섬의 오후]를 합본에서 발행했는데 재출간 하면서 엮는 책을 바꿔버렸다. 그래서 [랑겔한스섬의 오후]를 두번 보게 되었다. 책을 재독 하는 경우는 적지 않은데 알지도 못하는 사이 재독 하게 된 경우는 상당히 드문 경험이었다. 재출간을 이렇게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게 읽은 책을 또 읽게 되었는데 역시 앎의 무게가 달라짐에 따라 느끼는 감정도 달라짐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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