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타르드 컴북스 이론총서
유진현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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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학계는 물론이고 사교계 인사들도 빠짐없이 탐독했다고 하는 타르드의 저서들은 반세기 이상 사람들에게 잊혀졌다가 들뢰즈에 의해 재발견된 후 최근 본격적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한다.

하지만 들뢰즈가 타르드를 재조명하는 맥락은 이 책이 주목하고 있는 것과 같은 심리사회학자로서의 타르드가 아니라 자연철학자로서의 타르드임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들뢰즈에 따르면 (정신들 간의 직간접적 작용인)모방에 주목한 심리사회학자라는 건 어디까지나 타르드의 표면적인 모습일 뿐이고 그의 진짜 모습은 바로 차이와 반복의 새로운 변증법을 발견한 자연철학자이다.


질 들뢰즈, 2004,『차이와 반복』, 김상환 역, 민음사, p.183.


타르드의 사회학을 심리학이나 심지어 내성심리학으로까지 환원하는 것은 전적으로 오류이다. 타르드가 뒤르켐을 비난한 것은 그가 설명해야만 하는 것, 즉 "수백만 사람들의 유사성"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기 때문이다. "비인격적 소여들 아니면 위대한 인간들의 이념들"이라는 양자택일의 자리에, 그는 자잘한 사람들의 변변찮은 관념들, 변변찮은 발명들, 그리고 모방적 흐름들 사이의 상호간섭을 놓는다. 타르드가 창시한 것, 그것은 미시사회학이다. 이 미시사회학은 반드시 두 개인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단일하고 똑같은 개인 안에 토대를 두고 있다(예를 들면 주저한다는 것은 "극소화된 사회적 대립"이다. 또는 발명은 "극소화된 사회적 적응"이다. <사회법칙> 참조). 개인 연구물들에서 출발하는 이런 방법을 통해서 반복이 어떻게 작은 변이들을 모으고 통합하는지, 그리고 그 결과 언제나 "차이짓는 차이소"를 이끌어내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사회법칙>). 타르드의 철학 전체는 그래서 차이와 반복의 변증법으로 요약된다. 그것은 어떤 우주론 전체 위에 미시사회학의 가능성을 근거짓는 변증법이다.



따라서 타르드의 사회학을 (개인과 심리적 요인을 사회현상의 근본요소로 간주하는)심리사회학에 한정했을 때 타르드에 대한 뒤르켐의 비판은 여전히 타당해보인다. 타르드의 모방 정의("한 정신이 원거리에서 다른 정신에 미치는 작용")는 사회현상을 어디까지나 신체나 물질과는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정신적 현상처럼 논하는 듯 보인다. 이 책의 저자 역시 타르드의 모방 이론은 '믿음'과 '욕망'이라는 주관적, 내면적 요인을 동인으로 한다는 점에서 심리적 특성을 띤다고 말한다(p.55). 

그러나 들뢰즈는 타르드의 '욕망'과 '믿음'을 심리적이기보다는 존재론적으로 보며, 이는 거시적인 '감각'과 '표상'을 만들어내는 미시적인 양자적 흐름에 해당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타르드는 뒤르켐의 사회체와 집합적 표상에 대항해 개인과 주관적 표상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사회/개인 또는 표상이라는 그램분자적인 영역 아래에서 작동하는 분자적인 흐름들에 주목하는 것이다.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2001,『천개의 고원』, 김재인 역, 새물결, p.416


가브리엘 타르드에게 경의를. 오랜 동안 잊혀졌던 그의 작업은 미국 사회학, 특히 미시-사회학의 영향을 받아 현재적 현실성을 획득했다. 타르드는 (퀴비에와 조프루아 생-틸레르의 논쟁과 동일한 성격을 갖는 격렬한 논쟁에서)뒤르켐과 뒤르켐 학파에 의해 짓밟혔었다. 뒤르켐은 통상 이항적이고 공명하고 덧코드화된 거대한 집단적 표상들 속에서 특권화된 대상을 찾았기 때문이다....[이에 대해] 타르드는 집단적 표상들은 아직 설명을 요하는 것, 즉 "수백만명의 인간들의 유사성"을 전제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 때문에 그는 오히려 세부적인 세계 또는 무한소의 세계, 즉 표상 아래 단계의 질료를 이루는 작은 모방들, 대립들, 발명들...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타르드의 책에서 가장 뛰어난 곳은 관료제나 언어학 등에서 이루어진 미세한 혁신을 분석한 부분이다. 뒤르켐주의자들은, 그것은 심리학이나 관계-심리학이 될 수는 있어도 사회학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표면적으로만, 첫번째 근사치로 볼 때만 올바르다. 미시-모방은 한 개인에서 다른 개인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더 심층적으로 볼 때 이러한 미시-모방은 개인이 아니라 흐름이나 파동과 관련되어 있다. 모방이란 흐름의 파급이다. 대립이란 흐름의 이항화, 이항 구조화이다. 발명이란 다양한 흐름의 결합 또는 연결접속이다. 그러면 타르드에게 흐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이나 욕망(모든 배치물의 두 양상)이다. 흐름이라는 것은 항상 믿음과 욕망의 흐름이다. 믿음과 욕망은 모든 사회의 토대이다. 믿음들과 욕망들은 흐름이며, 그래서 "양화 가능"하며, 진정한 사회적인 <양>인데 반해, 감각은 질적인 것이고, 표상은 단순한 결과물이다. 따라서 무한소의 모방, 대립, 발명은 흐름의 양자(量子)들이며, 흐름의 양자들이 믿음들과 욕망들의 파급, 이항화 또는 결합을 표시해준다. 따라서 표상들의 "정지"지대뿐만 아니라 첨점들에도 몰두한다는 조건에서 통계학이 중요해진다. 왜냐하면 결국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또는 상호-개인적인 것)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표상이건 개인적 표상이건 표상과 관련된 그램분자적인 영역과 사회와 개인의 구별이 모든 의미를 상실하는(왜냐하면 흐름들은 개인들에게 귀속될 수도 없고 집단적 기표들에 의해 덧코드화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믿음들과 욕망들의 분자적 영역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표상들은 이미 거대 집합이나 하나의 선 위에 한정된 절편들을 규정하는데 반해, 믿음들과 욕망들은 양자에 의해 표시된 흐름들이며, 이 흐름들은 창조되거나 고갈되거나 탈피하며, 또 첨가되거나 감해지거나 조합된다. 타르드는 미시-사회학의 발명자로서, 이 사회학에 그 외연과 의미를 부여하면서 후일 이 사회학이 떠안게 된 오해를 미리 고발한 것이다.


* 들뢰즈가 타르드를 어떻게 재조명하는지는 아쉬운대로 이토 마모루(2016)의『정동의 힘: 미디어와 공진하는 신체』(김미정 역, 갈무리), "2장 타르드의 커뮤니케이션론 재고"를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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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볼 깊이 읽기
미사키 테츠 지음, 주재명 외 옮김 / 워크라이프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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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드래곤볼》을 볼 때는 주목하지 못했던 디테일들을 확인하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물론 저자가 이를 '니체의 힘에의 의지'나 '명전자성의 논리', '자본의 확대재생산 운동' 등을 통해 썰을 풀어가는 부분들은 마치 저자 스스로가 <에바>에서 느끼는 것 그대로 어처구니 없게 느껴졌지만 말이다.

 

실존적인 고뇌나 매혹적인 캐릭터 디자인이 없어도, 《드래곤볼》의 구조에 주목하며 읽으면 <건담>이나 <에바>에 뒤지지 않는 재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의 경우 <에바>는 의미심장하다는 듯이 보여주는 요소가 너무 많고, 그야말로 수수께끼 풀이를 유발하는 식이라 거기에 놀아나는 게 어처구니 없게 느껴졌지만, 《드래곤볼》은 시원스럽고 평면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좋았습니다. <에바>의 복잡함은 작품 자체의 복잡함이라기보다 롱기누스의 창이나 세피로스의 나무 등 외부로부터의 인용이 실제 이상으로 작품을 복잡하게 보이도록 만듭니다. <에바>에서 종교적으로 거드름 피우며 말하는 부분을 《드래곤볼》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신'이라고 말해버립니다. 만약 이 신에게 구체적으로 인용된 이름이 붙어 있거나, 피콜로 대마왕 역시 그렇게 장난친 이름이 아니라 의미심장한 이름이 붙어 있었다면, 독자는 그 지점에서 작품 외부의 세계를 읽어 들이며 좀 더 신비한 눈으로 《드래곤볼》을 대했겠지요. - p.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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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괴물의 사유
이찬웅 지음 / 이학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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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읽어 본 들뢰즈 연구서 중 나에게 최고의 만족감을 주었다. 들뢰즈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충격과 기쁜 정동이 되살아난 듯 했다. 저자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오탈자 교정
p.71 ˝해부적학˝->˝해부학적˝
p.217 ˝정동가˝->˝정동이˝
p.238각주 ˝영항을˝->˝영향을˝
p.351 ˝Madiney˝->˝Maldi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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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이디푸스』 읽기 리좀 총서 9
이언 뷰캐넌 지음, 이규원.최승현 옮김 / 그린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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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 좋은 편은 아님...


번역이 잘못된 부분들을 따로 정리해둔건 아니라 지금 바로 펼친 장에서 예를 들어 보자면, p.94에서 

"그때 수동적 종합은 감각작용을 받아들일 능력일 뿐만 아니라, 칸트가 생각했던 것처럼 감각을 가진 유기체를 구성하는 종합적 능력까지도 나타내는 것이다."

라고 번역된 부분은 

"그때 수동적 종합은 칸트가 생각했던 것처럼 단지 감각작용을 받아들일 능력일 뿐만 아니라 감각을 가진 유기체를 구성하는 종합적 능력까지도 나타내는 것이다."

(Passive synthesis, then, is not just a capacity to receive sensation, as Kant might have it, but implies a synthetic ability to constitute the sensate organism as well)

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외에도 이처럼 맥락만 잘 알고 따라가면 수식하는 부분이 어디에 붙어야 할지 뻔히 보이는 부분들에서 엉뚱한 곳에 가 붙는 경우가 많았다. 원서를 옆에 두고 읽다가 내용이 이상하다 싶으면 확인할 필요가 있음.


책 뒤쪽에 "더 읽어보기" 중에서 p.235에,

"터너Victor Turner: 들뢰즈와 가타리는 빅토르 터너의 유명한 『은뎀부 의사』Ndembu Doctor 중 10장 「상징의 숲」The Forest of Symbols이 정신분석의 가장 완벽한 사례라고 말한다. 이 덕분에 꼭 읽어야 할 책으로 간주된다."

여기선 "『상징의 숲』 중 10장 「은뎀부 의사」"가 되어야 맞다. 원문은

"Deleuze and Guattari suggest that Victor Turner's famous essay on the practice of a Ndembu Doctor (chapter 10 of The Forest of Symbols) is a perfect example of schizoanalysis." 

덕분에 터너의 저서 중 은뎀부 의사란 저서가 있는지 한참을 찾아보는 뻘짓을 했다. 책 제목인지 장 제목인지 헷갈렸다면 요즘엔 구글에 검색만 해봐도 알 수 있었을 텐데..


번역자가 2명이라서 그런지 "body without organs"는 때로는 '탈기관체', 때로는 '기관없는 신체"로 일관성없이 번역되어 있음.


결론적으로 번역자가 번역을 하고 전체적으로 한두번만 제대로 검토를 했어도 이런 문제들은 상당수 줄일 수 있었을 것으로 보여 별점을 박하게 주었다. 


하지만 국내 출판시장 규모나 번역자에 대한 대우 등등을 생각하면 이런 책을 번역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하는 걸지도...



* 해당 책에 대해 『안티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국역자가 부분부분 간단히 평한게 있어 참고할 만 하다.

http://armdown.net/index.php?mid=schizo&page=3&document_srl=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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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ky1105 2020-12-07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뢰즈와 언어(그린비)처럼 심각하게 번역이 안좋은 가요.

가시광선 2020-12-08 00:34   좋아요 0 | URL
들뢰즈와 언어보다는 훨 나은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원서대조는 필요할 듯 하네요.
 
탐구 2
가라타니 고진 지음, 권기돈 옮김 / 새물결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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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진, 고진 하는지 알겠다. 개인적으로 2권의 ˝2부 초월론적 동기에 대하여˝가 압권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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