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1972-1990 입장총서 15
질 들뢰즈 지음 / 솔출판사 / 1994년 3월
평점 :
절판


개인적인 관심에 이 책에 추신으로 붙은 '제어사회에 대하여(on control societies)'를 영어번역본과 대조하여 번역을 수정해보았다. 

들뢰즈가 말하는 control power(?)는 기본적으로 communication에 대한 control을 말하는 것인데, control power는 communication을 못하게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즉각적인 communication'을 만들어내는 권력이다. 따라서 'control'에 대한 번역어로 '통제'는 무언가를 못하게 한다는 어감이 강한 것 같아서 '제어'로 번역하였다. 




추신: 제어사회(control societies)에 대하여

 

역사(history)

 

 푸코(Michel Foucault)18세기와 19세기를 규율사회(disciplinary societies)와 연계시켰고, 규율사회는 20세기 초에 정점에 다다른다. 규율사회는 감금의 주요 장소들을 조직함으로써 작동한다. 개인들은 항상 하나의 닫힌 장소에서 다른 닫힌 장소로 이동하며, 각각의 장소는 고유한 규범들을 갖는다. 처음에는 가정, 그 다음에는 학교로(“여긴 집이 아니란다”), 그 다음에는 병영으로(“여긴 학교가 아니란다”), 그 다음에는 공장으로, 때로는 병원으로, 또는 아마도 감금의 모델이 되는 장소인 감옥으로 말이다. 감옥은 다른 장소들에 하나의 모델을 제공한다. 따라서 유로파(Europa 51)[역주네오리얼리즘을 대표했던 이탈리아 감독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의 영화. 1951년작.의 주인공은 노동자들을 보면서 외친 것이다. “난 저 사람들이 죄수인 줄 알았어요...” 푸코는 공장에서 잘 보여지는 그러한 감금의 장소들 이면의 이념형(the ideal)을 철저하게 분석했다. 모든 것을 끌어모으기, 각각의 것들에 각각의 공간을 부여하기, 시간을 조직하기, 요소적 힘들의 합계보다 더 큰 하나의 생산력을 이 시-공간 속에서 조직해내기. 그러나 푸코는 또한 이러한 모델이 얼마나 수명이 짧은지 알고 있었다. 규율사회의 모델은 전혀 다른 목적과 작동(생산을 조직하는 대신 [그 결과물을]뜯어내기, 생명을 질서지우는 대신 죽음을 선고하기)을 가진 주권사회(sovereign societies)의 뒤를 이은 것이었다. 이행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고, 나폴레옹이 한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의 전반적인 변환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새로운 힘들이 천천히 흘러들어와 2차 대전 이후에 급진적인 약진을 이루면서 규율(discipline)은 결국 붕괴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규율사회에 머물지 않고, 규율사회를 벗어나고 있었다.

 우리는 감옥, 병원, 공장, 학교, 가정 등 모든 감금의 장소들의 전반적인 와해현장의 한 가운데 놓여있다. 가정은 다른 모든 (교육적, 직업적 등등의)내부들과 마찬가지로 와해되고 있는 하나의 내부(interior)’이다. 관련 주무부처들(the appropriate ministers)은 끊임없이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개혁안들을 발표해오고 있다. 교육 개혁안들, 산업 개혁안들, 병원, 군대, 감옥의 개혁안들. 하지만 이러한 제도들은 어느 정도 돌이킬 수 없는 쇠퇴의 길로 들어섰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 문을 두드리고 있는 새로운 힘들이 사회를 인계받을 때까지 최후의 발악을 하며 사람들을 바쁘게 돌림으로써 그저 단순히 사회를 돌보는 문제인 것이다. 제어사회(control societies)가 규율사회를 인계받고 있다. ‘제어(control)’는 버로스(William Burroughs)가 이 새로운 괴물을 특징화하기 위해 제안한 명칭이며, 푸코는 그 사회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비릴리오(Paul Virilio) 역시 닫힌 체계의 시간척도 속에서 작동하던 낡은 규율들을 대체해가고 있는 표면상 자유롭게 떠다니는 제어의 초고속 형태들을 끊임없이 분석하고 있다. 놀라울만한 의약의 생산, 핵기술, 유전공학 등등이 문제가 아니다. 설사 이것들이 새로운 과정 속에서 나름의 역할을 할지라도 말이다. 어느 체계가 더 지독한지 혹은 참을만한지가 문제가 아니다. 각 체계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방식과 우리를 노예화하는 방식 사이의 갈등이 있으니까 말이다. 예를 들면, 감금의 장소의 하나인 병원의 와해와 함께 지역사회 정신의학(community psychiatry)이나 주간병원(day hospitals), 자택치료(home care)는 처음에는 새로운 자유들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가장 가혹한 감금만큼이나 엄격한 제어의 메커니즘에 기여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를 우려하거나 최선을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무기를 발견하는 것이다.

 

 

논리(logic)

 

 개인들이 거쳐가는 감금의 다양한 배치 및 장소들은 독립변수들이다. 우리는 매번 모든 걸 다시 시작하기로 되어 있으며, 비록 이 모든 장소들은 하나의 공통된 언어를 가지지만, 유비적(analogical)으로만 그러하다. 반면 다양한 제어의 형식들은 불가분한 변이들로, (반드시 이항적이지는 않지만)디지털 언어로 된 [연속적으로]변화하는 기하학 체계를 형성한다. 감금은 서로 다른 주형물들(moldings), 주형들(molds)이지만, 제어는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하나의 자가-변형적인 주형(a self-transmuting molding), 또는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달라지는 그물코를 가진 체와 같은 변조(modulation)이다. 이는 임금 문제에서 잘 나타난다. 공장은 가능한 최대 생산과 가능한 최저 임금 사이의 균형점에 도달하는 내부적 힘들을 가진 인간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신체였다. 그러나 제어사회에서는 비즈니스가 공장을 대신하며, 하나의 비즈니스는 하나의 영혼(soul)이자, 하나의 기체(gas)이다. 물론 공장에도 보너스 시스템이 있었다. 하지만 비즈니스는 우스꽝스러운 도전들, 경쟁들, 세미나들에 의해 간간이 지속적인 준안정적 상태(metastability)에 접어들도록, 모든 임금들에 보다 깊은 수준의 변조를 도입하려 애쓴다. 가장 바보같은 텔레비전의 오락 쇼들이 그토록 성공을 거두고 있다면 그 이유는 그것들이 비즈니스가 작동하는 방식을 완벽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장은 경영자가 이러한 대중 속의 각각의 요소들을 모니터할 수 있고, 노동조합들이 대중적 저항을 동원할 수 있는 공동의 편리함을 위해 개인들을 하나의 인간체(a body of men; 인간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신체)로 형상화했다. 하지만 비즈니스는 개인들을 서로에 대해 맞세우도록 하고, 각 개인 내면에 다른 이들을 각각 구별지우도록 하는 어떤 놀라운 동기부여(motivation)를 마치 건강한 경쟁처럼 제시하며 거침없는 경쟁의식을 끊임없이 도입하고 있다. 심지어 국가 교육시스템조차 성과에 대한 보상의 원리에 눈독을 들여왔다. 실제로, 비즈니스가 공장을 대신하고 있듯이, 학교평생교육(continuing education)에 의해, 시험은 지속적 평가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이는 교육을 비즈니스로 돌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셈이다.

 규율 사회에서 당신은 항상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학교에서 병영으로 가고, 병영에서 공장으로 갔던 것처럼 말이다). 반면 제어사회에서 당신은 하나의 변조, 일종의 보편적 변형의 공존하는 준안정적 상태들을 이루며, 비즈니스, 훈련, 병역이든 어떤 것도 결코 끝나지 않는다. 이미 두 종류의 사회 간 이행지점에 서 있었던 카프카(Franz Kafka)심판에서 가장 불길한 법률 표현들을 그려냈다. (두 감금 사이에 있는)규율 사회의 분명한 무죄선고(끝없이 변화하는)제어 사회의 끝없는 지연은 무언가를 수행하는 매우 다른 두 가지 방식이며, 만약 우리의 법률 시스템이 진동하고 있고, 스스로 붕괴하고 있다면, 이는 우리가 한 방식에서 다른 방식으로 이행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규율 사회에는 두 극이 있다. 개인들을 상징하는 서명들(signatures), 그리고 대중(mass) 속에서 그들의 위치를 상징하는 기록부 속의 숫자들 혹은 장소들이다. 규율들은 이 두 측면들 사이에서 어떠한 양립불가능성도 보지 못하며, 규율권력은 집단화(amass)하면서 개별화(individuate)한다. , 규율권력은 하나의 인민의 신체에 행사되고 그 신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구성원들의 개별성을 주조하여 이들을 모양짓는다(푸코는 이러한 이중적 관심사의 기원을 사제들의 무리와 개별 동물들에 대한 사목권력[pastoral power]에서 보았으며, 그 후 시민권력이 다른 수단들을 통해 스스로를 세속의 목사[pastor]’로 수립하는 것을 보았다). 반면, 제어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서명이나 숫자가 아니라 코드(code)이다. 코드들은 암호들(password/mots de passe; 통행어)로 통치되는 반면, 규율사회는 (통합이나 저항에 이르렀을 때) 규율들(precepts/mots d'ordre; 명령어)로 통치된다. 제어의 디지털 언어는 어떤 정보에의 접근이 허락되어야 하는지, 거절되어야 하는지를 나타내는 코드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대중과 개인의 이중성을 다루지 않는다. 개인들(individuals; 불가분체, 개체)분인들(dividuals; 가분체)”이 되고, 대중은 표본, 데이터, 시장 혹은 은행(banks)’이 된다. 화폐(money)는 아마도 두 사회의 차이를 가장 잘 표현한다. 규율이 항상 수적 표준으로서 금을 함유하는 주조화폐(molded currency)와 관련되어 있었던 반면, 제어는 여러 통화들에 대한 표본 퍼센티지들을 부여하는 하나의 코드에 의존하는 변조들, 떠다니는 교환율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늙은 돈두더지(money's old moles; 재력가)가 감금의 공간에서 당신이 얻을 수 있는 동물이라면, 제어사회는 자신들만의 [동물인]뱀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살고 있는 시스템 내에서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방식,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 있어서도 하나의 동물에서 다른 동물로, 두더지에서 뱀으로 이행했다. 규율적 인간이 이산적 양(discrete amounts)으로 에너지를 생산했던 반면, 제어적 인간은 연속적인 범위의 서로 다른 궤도들(orbits) 사이에서 움직이면서 파도를 그린다. 파도타기(surfing)가 모든 낡은 스포츠들을 이어 받았다.

 어떤 사회와 어떤 종류의 기계(machine) 사이에 대응관계를 수립하기란 쉬운 일이다. 이는 그 기계들이 사회의 차이들(different kinds of society)을 결정한다(determine)는 말이 아니라 그러한 기계들이 그 기계를 생산하고 활용할 수 있는 사회적 형태들을 표현한다(express)는 말이다. 예전의 주권사회는 지렛대, 도르레, 큰 시계와 같이 단순한 기계들을 사용했지만, 근래의 규율사회는 엔트로피라는 수동적 위험과 사보타주(sabotage)라는 능동적 위험을 보여주는 열역학적 기계들을 갖추었다. 제어사회는 3세대 기계들, 정보기술과 컴퓨터를 갖추고 있으며, 거기서 수동적 위험은 잡음(noise; 정보전달 과정에서 전달되는 정보 이외에 혼입되는 전자신호)이며, 능동적 위험은 해적행위(piracy; 저작권 침해행위)와 바이러스처럼 퍼지는 오염(viral contamination)이다. 이러한 기술적 발전은 자본주의의 변화 속에 보다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 변화는 폭넓게 인지되어왔고,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9세기의 자본주의는 집중적이고, 생산을 향해 있으며, 소유에 의해 작동한다. 따라서 19세기 자본주의는 생산수단들, 그리고 아마도 유사하게 조직된 다른 장소들(노동자의 집, 학교)을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와 함께 공장을 감금의 장소로 만들었다. 시장의 경우, 그것은 전문화를 통해, 식민화를 통해, 혹은 생산비용의 절감을 통해 포섭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자본주의 형태는 더 이상 생산을 향해 있지 않다. 생산은 종종 원거리의 제3세계들로 이전되며, 이는 심지어 섬유공장이나 제련, 정유업같은 복잡한 작업의 사례에서도 나타난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메타생산(metaproduction)을 향해 있다. 더 이상 원자재를 구입하지도, 완제품을 판매하지도 않는다. 3세계들로부터 완제품을 구매하거나 조립해낼 뿐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판매하고자 하는 것은 서비스들이며, 구매하고자 하는 것은 활동들이다. 이제 자본주의는 더 이상 생산(production)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품(products)을 향해 있는, 즉 세일즈 혹은 시장을 향해 있는 자본주의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분산적이다. 공장이 비즈니스에 자리를 넘겨준 채 말이다. 가정·학교·군대·공장은 더 이상 유비적이지 않고, 국가든 어떤 사적 권력이든 하나의 소유주로 수렴되는 서로 다른 장소들이며, 오직 관리자들만 남아있는, [언제든]변화가능(transmutable)하거나 변형가능(transformable)하도록 코드화된 어떤 단일한 비즈니스의 결합태(configurations)이다. 심지어 예술마저도 폐쇄된 공간을 빠져나와 은행의 열린 회로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시장은 규율 수립하기보다는 제어하기를 통해, 비용절감보다는 비율정하기(fixing rates)를 통해, 생산 전문화보다는 상품변형을 통해 포섭된다. 여기서 변질(corruption)은 새로운 권력을 취한다. 세일즈 부서는 비즈니스의 중심 혹은 영혼(soul)”이 된다. 우리는 비즈니스에 영혼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 이는 분명 세상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소식이다. 마케팅은 이제 사회제어의 도구이며, 우리의 주인이 될 거만한 종자를 생산한다. 규율은 장기적이고, 무한하며, 불연속적이었던 반면, 제어는 단기적이고 급격히 교대되지만, 동시에 연속적이고 무한정하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감금된 인간이라 아니라 빚을 진 인간(a man in debt)이다.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자본주의는 여전히 인류의 4분의 3을 극도의 빈곤 속에 유지시키고 있다. 이들은 빚을 지기에는 너무 가난하고 감금되기에는 수가 너무 많다. 제어는 사라지는 개척지들뿐만 아니라 우후죽순 늘어가는 빈민촌과 게토들도 다루어야만 할 것이다.

 

 

프로그램(program)

 

 어떤 주어진 순간에 어떤 요소(사냥금지구역 안의 어떤 동물, 어떤 비즈니스 활동 안의 한 인간)의 위치를 고정시킬 수 있는 제어 메커니즘(전자추적장치)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가 공상과학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을 필요는 없다. 과타리(Felix Guattari)는 하나의 마을을 상상했다. 거기서는 누군가 자신의 아파트나 길거리, 동네를 떠나기 위해서 이런 저런 차단기를 열어주는 자신만의 (가분적인[dividual])전자 카드를 사용한다. 하지만 그 카드는 또한 어느 특정한 날, 혹은 하루 중 특정 시간 사이에는 거부될지도 모른다. 모두가 허용된 장소에 있음을 확실시 하고, 어떤 보편적인 변조를 실행하는 것은 차단기가 아니라 컴퓨터에 달려있는 것이다.

 우리는 제어 메커니즘의 시대가 열림에 따라 기본적인 제어 메커니즘의 사회기술적 원칙들을 수립해야 하고, 모두가 와해되고 있다고 말하는 감금의 규율적 장소들을 이미 대체하고 있는 것을 이러한 용어들로 설명해내야 한다. 어쩌면 오래된 주권사회로부터 빌려 온 더 낡은 제어의 수단들이 필요에 따라 개조되어 다시 작동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언가 새로운 시작지점에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감옥시스템: 적어도 경범죄의 경우 구금에 대한 대안을 찾으려는 시도, 범죄자들을 일정 시간동안 집에 머물도록 강제하는 전자추적장치의 사용.


학교시스템: 끊임없는 평가의 형식들, 학교에 대한 평생 교육의 영향, 그와 관련하여 학교의 모든 연구로부터의 탈피, 교육의 모든 수준에 도입되는 비즈니스 활동’.


병원시스템: 위험에 처한 잠재적 사례들 및 환자들을 식별해주는 의사나 환자 없는새로운 의학. 이는 그것이 보여지는 것과 같이 개별화된 치료(individualizing treatment)로의 어떤 진보와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개별화된 혹은 숫자화된 신체들에 대한 대체물인 코드화된 가분적인(dividual)’ 물질을 제어하기 위함이다.


비즈니스 시스템: 더 이상 구식의 공장 시스템을 통하지 않고, 화폐, 상품, 인간을 조작하는 새로운 방법들.


 이는 상당히 제한된 범위의 사례들이지만 제도들이 와해되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달하기에는 충분하다. 어떤 새로운 지배 시스템의 광범위하고도 점진적인 도입 말이다. 가장 중요한 물음들 중 하나는 노동조합(trade unions)이 여전히 어떤 역할을 가질 것인지 여부이다. 그들은 그들의 역사를 통해 감금의 장소들에서 규율들에 대항해 수행했던 투쟁에 연계해서 제어사회에 대한 저항의 새로운 형식에 적응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들은 자리를 내어줄 것인가? 우리는 마케팅의 감언이설에 맞설 수 있는 저항의 이러한 미래적인 형태들의 윤곽을 벌써부터 희미하게 감지할 수 있을까? 많은 젊은이들이 동기부여 되고자하는(be motivated)’ 이상한 갈망을 가지고 있으며, 항상 특수과정들과 평생교육을 요구하고 있다. 바로 그 선배들이 상당한 어려움을 겪으며 누가 규율로부터 이득을 얻고 있었는지 밝혀내었던 것처럼, 이러한 것들이 봉사하는 그 목표를 밝혀내는 것은 그들의 몫이다. 뱀의 똬리는 두더지의 굴보다 더욱 더 뒤얽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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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21-08-03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시광선님, 안녕하세요? dividual을 분인으로 번역하신 게 눈에 띕니다. 저도 전에 라자라토의 <부채인간>을 보다 이 부분을 찾아본 적이 있었습니다. 영문판이랑 같이 보면서 오역들 때문에 짜증 났었는데, 그 때 가시광선님의 이 번역본을 보았더라면 참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잘 읽었습니다.

가시광선 2021-08-03 14:51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분인(dividual)‘은 제가 만든 번역어가 아니라 ‘히라노 게이치로‘라는 분이 만든 말(책 <나란 무엇인가>에서)인데, 번역어로 사용해도 괜찮을 거 같아 빌려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