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격자의 차트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6
연여름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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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통제해도 통제되지 않는 게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벅찬가.

연여름, 부적격자의 차트(현대문학)

 


리누트 바이러스로 인공지능 모세’, 즉 중재자의 범위 안에서 생존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인간과 인공지능이 함께 하는 삶, 혹은 재앙으로 인한 삶에 균열이 일어나는 등 줄거리는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써왔다. 하지만 연여름 작가가 부적격자의 차트를 통해 보여준 세계는 다른 작품들과 분명한 차이점을 갖는다. 바로 중재자의 등장이다. 중재자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분쟁에 끼어들어 쌍방을 화해시키는 사람이라고 나와 있다. 사전적 정의대로 이 소설에 등장하는 중재자인 인공지능은 그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다. 다른 작품들에서는 재앙이 들이닥치고 세상이 어수선해지고, 생존의 위협을 받기 시작할 때 중재자인 것처럼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며 그것이 권력이 되어 강압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길 강요한다. 재앙이라는 같은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힘(권력)의 불균형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강자와 약자가 나뉘고, 약한 자들은 강자들보다 더 쉽고, 자주 다양한 위협에 노출된다. 부적격자의 차트에서 인공지능을 중재자로 둔 것은 작가의 큰 그림이 아닐까. 사람이 중재자가 된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냉정하고 객관적이라고 해도 언제라도 변수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 침착함과 냉정함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이라면 이야기는 독자들이 짐작하는 스토리와 다르게 흐를 수 있을 테니까. 인공지능이 재앙에 갇힌 인간들을 충분히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내가 인공지능의 단점을 부각하는 짧은 생각이었다. 인공지능이 중재자가 되고, 인공지능이 생존의 확률을 높이는 방법을 계산하면서 그에 맞는 규칙을 정하고, 인간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익숙해진다. 오히려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이방인이 되는 것처럼.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 말이 와닿는다. 불신과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어느새 적응하면서 따르고, ‘중재 도시라는 공간에서의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중재 도시는 상상은 금지되고 꿈은 병증이 되며 감정조차 오류로 치부되는 세계이며 부적격자의 차트는 중재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실무자)의 생활의 모순 경과를 기록한 것이다. 모순은 어디서나 존재하지만, 중재 도시에서의 모순은 짙은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갈망하는 세계를 집요하게 쫓지만 금세 씁쓸해지는 느낌이다. 목이 타는 갈증을 어떻게든 해결하려는 것처럼 중재 도시 밖을 남몰래 희망하던 이들의 갈증을 세인의 선택으로 해결해야 했다고 봐야 할까? 중재 도시의 밖은 중재 도시 안에서의 생활보다 훨씬 위험하고 쉽게 다양한 위협으로 노출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인과 이폴은 되돌릴 수 없는-전혀 되돌릴 생각이 없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중재 도시 밖의 생활에 대한 두려움은 독자인 나만 가질 뿐이다-선택으로, 중재 도시 밖으로 발을 내딛는다. 세인의 선택과 세인의 중재 도시 밖에서의 기록에 영향을 미친 9세대 레드는 중재 도시 밖의 삶을 누구보다 갈망했다. 레드의 갈망은 시들고 말았지만, 세인의 선택으로 레드의 갈망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진 것은 아니다, 부적격자로 처리되어 아예 기록되지 않은 것처럼. 소설을 읽는 내내 부적격자가 무엇일까, 계속 질문했다. 생존을 위해 선택한 중재 도시에서 부적격자를 찾아내고, 그들을 소거하는 시스템이 맞는 걸까. 인간으로서 당연히 갖고 있고 누려야 할 감정이 균형제 약물로 통제되고 꿈은 병증이기에 치료를 받아야 하고, 상상(허구)은 금지의 대상이며 고발의 대상자 조건이라니. 살기 위해 인공지능의 제안을 따랐고, 그렇게 시작된 중재 도시의 삶은 어쩌면 지극히 가장 현실을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의 끝자락에 가까워질수록 이게 사는 건가?’ 싶었다. 이런 삶이라면, 중재자인 인공지능과 다를 게 뭔가. 마지막 문장을 읽고 마침표를 찍을 때, 내 머릿속에 뒤엉켜 있던 실타래를 간단하게 정리했다. ‘생존과 산다는 것은 전혀 다르다.’. 중재 도시에서의 삶은 생존이라면, 중재 도시 밖에서의 삶은 사는 것이다.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우습게도 생존을 택할 것이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안전을 보장받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이니까. 생존하고 나면 중재 도시에서의 삶에서 적응한 채 방벽 너머를 궁금해하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겁이 많은 나와 다른 세인과 이폴은 방벽을 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방벽 너머로 가고자 하는 결심이 그들의 앞으로의 삶이 눈부실 거라고 말해줬다. 생존과 산다는 것 중, 선택하는 것은 오롯이 제 몫이다. 따라서 선택에 따른 대가도 본인이 감당해야 한다. 세인은 레드와 나눈 대화에서부터, 아니 오래전부터 자신이 만든 공간에서 챔버를 만나면서 자기도 모르게 방벽을 넘을 계획을 세우고, 준비했는지도 모른다. 레드는 세인의 계획에 구체성을 부여하고, 흥분의 불씨에 바람을 불어 넣었던 것이다. 방벽 너머의 삶은 예상했던 대로 쉽지 않았지만 세인과 이폴은 후회하거나 중재 도시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유를 느끼고, 삶을 살았다’. 로봇처럼 살아야 하는 방벽 안에서 하지 못했던 것들을 모두 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생존이 아닌 살아있음을 완벽히 느낀 것이다. 어쩌다 이 책을 만나게 된 독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세인과 이폴, 그리고 그들과 같은 선택을 할지 모를 이들의 증인이자 목격자가 되었다.


부적격자의 차트를 읽고 나면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많다. 장르부터 스토리, 배경, 그리고 관계 등등. 나눌 것이 많은 책을 만난다는 건 행운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을 만난 나는 행운의 독자였다. 추천사부터 작가의 말까지 모든 게 완벽했던 소설이다. 나는 내일의 해가 뜨지 않을 거라는 불안에 시달리기보다 내일의 해가 뜨는 당연한 사실에 불안을 느낀다.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중이다. 세인과 이폴은 이런 나의 말에 분노하거나 어이없다는 식의 표정을 짓거나, -빈 눈으로 나를 바라만 볼 지도 모른다. 평범한 일상이 그들에게는 어떻게 해도 해결되지 않을 갈증이니 말이다. 작가는 우리에게 진부한 것 같지만 가장 특별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현실에서 소중한 것을 놓치고 생존만을 위해 사는 것은 아닌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는 삶인지’, 그리고 자신이 던진 질문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작가의 질문에 죽을 때까지 괜찮은 답을 내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매일매일 물어야 하며, 틈틈이 하루하루를 기록하는 것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세상 곳곳에서 부적격자로 분류되어 불리는 이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나 또한 현재 숨을 쉬고 발을 딛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부적격자일지도 모른다. 부적격자인 게 편할 것 같기도 하다. 중재 도시에서 칭하는 부적격자와 다른 부적격자 말이다. 우리는 사실 중재 도시에 살고 있는 부적격자가 아닐까? 하루에도 수십 번 위협(상처)에 쉽게 노출되는 세상에서 사는 게 버겁다고 매일 생각하는 나는 방벽 너머에 있는 사람이 아닐까? 그래서 중재 도시와 다를 바 없는 현 세상에서 사는 게 아니라 생존만 하는 것 같다. 생존 이후에는 뭘 해야 할까? 생존으로 시작한 길이 사는 것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을까? 세인과 이폴의 증인이자 목격자가 된 나는 제2의 세인과 이폴을 꿈꾼다. 물을 들이켜도 해결되지 않은 갈증의 원인을 어느 정도 알 것도 같으니, 갈증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계획을 세워서 세인이 걸었던 쉽지 않은 여정을, 세인의 발자국에 나의 발자국을 덧댈 만만의 준비를 해야겠다.

 


이 책은 서평단 활동을 위해 현대문학 출판사에서 받았습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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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라임 그림 동화 42
다이 윈 지음, 이고르 올레니코프 그림, 양병헌 옮김 / 라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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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다녀야만 하는 북극곰 가족

다이 윈 글 이고르 올레니코프 그림,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라임)

 


해가 거듭할수록 지구온난화가 심각하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지구온난화를 늦추기 위한 세계적인 협약이나 환경 보호 관련 직간접적인 실천 등이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지구온난화가 나아지길 바라는 건 진작에 지난 단계이다. 따라서 지구온난화의 속도를 늦추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 편리함을 위해 환경을 파괴한 인간이 적극적인 환경 보호 실천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면서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실제로 환경 오염, 지구온난화의 경각심을 갖고, 일상생활에서 환경 보호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인간의 편리함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어 목숨을 위협받거나 목숨을 잃는 생명들이 많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는 그런 많은 생명 중, 북극곰 가족이 이사를 다녀야만 하는, 삶의 터전을 잃어 결국 러시아의 한 마을을 침입한 실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인간이 자연을 삶의 터전으로 잘 살던 생명의 목숨을 위협하고, 삶의 터전을 빼앗았다는 것에 경각심과 미안함을 가져야 함을, 앞으로 지구온난화를 늦추기 위해 개인적인 차원과 사회적인 차원, 세계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빠는 세상이 온통 주황빛과 보랏빛으로 물든 저녁,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아빠가 저녁을 구해올 거라는 기대감으로 기다린 아내와 미샤와 마샤는 아빠가 바다표범 사냥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저녁을 구해올 거라는 희망과 저녁을 구해오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동시에 맞닿아 떨어지는 느낌은 어떨까. 얼음이 녹아서 먹이를 구할 수 없고, 빈손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에게 돌아가는 아빠의 마음은 어떨까. 짐작만 해보지만, 마음이 불편하다. 아빠는 먹이를 구할 수 없기에 가족에게 이사를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이사는 계속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생존에 가장 중요한 먹이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다 북극곰 가족은 인간이 살고 있는 마을에 발길이 닿게 되고, 인간의 집에 들어가 인간이 먹는 음식을 먹는다. 이곳에서 지내면 되겠다 싶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음식은 떨어져 가고, 북극곰들은 바다표범의 맛을 그리워한다. 당장의 허기를 해결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인간의 음식을 먹었지만, 삶의 터전을 잃은 그들의 마음의 허기는 채워질 수 없었다. 그렇게 다시 한 식구(아이샤)가 늘어난 북극곰 가족은 새집을 향해 출발하기 시작한다. 북극곰 가족이 간절히 찾았던 자신들의 집으로 말이다. 그곳에서 언제 또다시 이사를 떠나야 할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원하는 새집을 찾았다는 사실이 삶의 터전을 잃고 이곳저곳 방황한 그들의 허기를 달래줬을 것이다. 새로 발을 붙여 지내게 될 집에서는 먹이 걱정 없이 정착하여 평범한 하루하루를 지내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지구온난화를 늦추고 환경 보호를 위한 개인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고, 실천해야 한다는 책임이 내게 뒤따랐다. 개인에서 시작된 작은 실천들이 모여 분명 거대한 변화를 일으킨다.


북극곰 가족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인간의 편리성으로 인해 파괴되어 버린 자연, 자연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왔던 무수히 많은 생명이 먹이를 구할 수 없어 계속해서 정확한 목적지 없이 방황하며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미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북극과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멀게 느껴질 뿐, 지구온난화로 인한 불편과 피해는 인간을 제외한 생명들만 겪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치명적이다. 직접 겪기 전에-이미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지구의 앓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지구온난화를 늦추고 환경을 보호하는 방법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한 개인이 조금만 신경 쓰면 될 일이다. 대중교통이나 자전거를 이용하기, 플라스틱비닐일회용 사용을 지양하기, 물과 전기 아껴 쓰기, 쓰레기 덜 만들고 분리수거 잘하기, 천연제품 사용하기, 환경을 주제로 한 뉴스나 책 등 찾아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실천하기, 이 그림책을 쓴 작가처럼 환경 오염의 심각성을 알리고 환경 보호의 경각심을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펜을 드는 것 등등.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제목을 자꾸 읊조리게 된다. 읊조릴 때마다 톤이 낮아지고, 마음이 무겁다. 정말 어디로 가야 할까. 이 질문에 어떤 답을 해주지 못했다. 아니 해줄 수 없다. 어디로 가야 할까, 나중엔 갈 수 있는 곳이 있기나 할까.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그 자리에서 처참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닿고 나니 지금도 먹이를 구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새로운 터전을 찾아 방황하고 있을 북극곰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선명하다.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도는 생명들의 하루하루를 감히 짐작한다. 머지않아 인간이 부딪치게 될 하루하루일지도 모른다. 환경 보호 실천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 당장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모두가 북극곰들이 더 이상 이사를 가지 않도록 관심갖고, 신경써야 할 때라는 걸 강조한다.

 


이 책은 서평단 활동을 위해 라임 출판사에서 받았습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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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라임 그림 동화 42
다이 윈 지음, 이고르 올레니코프 그림, 양병헌 옮김 / 라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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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읽고 깨달았으면 하는, 추천하는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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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국을 말하다
장강명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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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소설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 21인 작가, 소설, 한국을 말하다(은행나무)

 

이 책의 기획 의도를 읽고 나면 이 책이 세상에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지만 수많은 이유로 모른 척하거나 지나쳐야 했던 일들에 대해 누군가는 분명 책임을 지고 용기를 내어 펜을 들어 목소리를 냈어야 했는데, 막중하고도 대단한 일들을 21인의 작가들이 지금의 한국 사회라는 공통된 주제를 완벽하게 관통하는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고야 말았다. 짧게 실린 21편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내가 21편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된 것 같고, 인물들이 놓이고 겪은 상황을 내가 겪은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분명 내가 겪었던, 느꼈던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21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웃펐다. 울기에는 비참하고 웃음은 나오는데 어이가 없어서 나오는 웃음이랄까. 21인의 작가들은 지금의 한국 사회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과 더불어 분노, 좌절, 슬픔 등의 복합적인 감정을 어떻게 조절하면서 객관적이고 명징하게 글을 써냈을까. 그들의 책임으로 이 책을 읽은 독자로서, 지금의 한국 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책임을 느꼈다. 확실한 건 지금 한국 사회의 문제가 과거에도 존재했고, 여전히 존재하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라는 것이다.

거지방, 고물가, 오픈런, 번아웃, 중독, 새벽 배송, 현대적 삶과 예술, 식단, 낙인, AI, 콘텐츠 과잉, 사교육, 가족, 자연인, 팬심, 다문화 가족, 반려동물, 섹스리스, 노동, ’. 각각 21편 글의 키워드는 이렇다. 키워드를 하나씩 소리내어 읽고 나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돌덩이에 무게가 더 해지는 것 같다. 휴대폰만 스크롤해도 알 수 있는 문제들, 뉴에서 앵커들이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문제들, 세상이 어쩌려고 이러나 안타까우면서도 내 일은 아니고 당장 할 일이 많아서 무심히 지나치는 우리의 문제들. 키워드를 한 곳에 모아 놓고 보니 지금 한국 사회가 불안정하고 위태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개개인이 해결할 수 없지만 개개인으로부터 시작된 문제, 사회의 적극적인 개입이 해결 방법이 될 수 있는 문제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을 안 해볼 수가 없다. 나는 21개의 키워드 중, 와닿는 한국 사회의 문제가 번아웃, 중독, 현대적 삶과 예술, 콘텐츠 과잉, 가족, 팬심, 반려동물, 노동, 이었다. 와닿는데는 내가 어느 정도 경험했거나 알게 모르게 시선과 마음이 간다는 이유에서다. 소설을 읽으면 형광펜으로 시선이 오랫동안 멈춘 문장에 색을 입히고 내 이야기네-, 라는 문장에는 화살표를 붙여 내 이야기를 그리고 내 감정을 솔직하게 쏟아낸다. 그러고 나면 이야기가 더 풍성해지면서 동시에 세상에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으면서 나를 포함한 그들이 안타까워 울컥했다. 사회에 변화가 생기는 건 당연한 것인데, 편리와 긍정의 변화라는 가면을 쓰고, 부정과 피해의 면을 가져오는 것도 당연한 걸까? 아니면 우리가 변화에 악을 심는 것일까? 생각이 깊어지니 나도 모르게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개인이 행복하면 그만이지, 라는 생각이었는데 사회가 행복하지 않으니 사회의 구성원이 개인이 행복할 수 있는 기회도 줄어드는 것 같다. 개인의 행복이 곧 사회의 행복이고, 사회의 행복이 개인의 행복이라는 공식이 개인과 사회의 관계가 돈독하다 못해 서로의 분신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21편 이야기 중, 화원의 주인(강화길)을 읽다가 울컥하고 씁쓸했다. 키워드는 중독이고, 인간관계 안에 배려와 사과, 용서를 다뤘다. 미진과 영은은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다. 학창시절에는 엄청 친하지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영은의 대학친구 지선까지 껴서 셋이서 어울리게 되었고, 미진과 영은은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미진은 학창시절 때부터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고 타인의 마음을 살피는 일에 중독되었고, 영은은 그런 미진을 잘 알았다. 끝없이 배려하고 사과하고 용서 받는 삶을 영은은 미진 자신보다 잘 알았다. 미진은 배려와 사과, 용서를 쉽게 자주 했음으로 중독된 것이 확실했고, 아무도 그것에 대해 미진 자신을 위해서라도 멈춰한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영은조차도. 영은은 알려줘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까, 아니면 그런 미진의 모습에 알 수 없는 즐거움과 희열을 느꼈을까? 이야기 끝에 다다랐을 때야 영은이 영악하고 무섭다고 느꼈다. 미진은 자주 눈치를 보며,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일에 너무 많이 미안해했고 상대가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지만 얼마 못 있고 전화를 걸었다. 영은은 그런 미진을 너무 잘 알았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미진이 답장하지 않는 영은 자신에게 전화를 걸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영은의 확신과 달리 미진은 전화하지 않았다. 미진의 연락에 전혀 신경 쓰지 않던 영은은 미진의 연락을 기다리고, 왜 연락이 오지 않는지 궁금해 한다. 휴대폰 알람이 울리면 미진의 연락인가 싶어서 빠르게 화면을 보지만 미진이 아니다. 영은의 이런 행동을 미루어 봤을 때, 배려와 사과와 용서, 눈치에 중독된 미진처럼 영은 또한 상대의 배려와 사과와 용서, 눈치에 중독되었다. 중독된 지도 모르고 있다가 상대가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중독 증상이 보이는 것이다. 영은은 미진에게 중독되었고, 그 중독이 미진과 영은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훤히 보이고, 그 관계의 끝이 파국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영은의 자기합리화 같은 엔딩의 마침표까지 읽고 나면 화원의 주인이라는 제목에 자연스레 눈길이 간다. 화원은 마음이고 주인은 인 것이다. 화원에는 이름 모를 각양각색의 꽃들이 넘쳐나고 꽃향기를 따라 나비와 벌이 들른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을 수도 있고. 화원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사람은 화원의 주인이 허락한 사람만 가능하며, 화원은 언제나 주인의 관리를 받는다. 다시 말해, 나의 주인은 나이며 나의 마음이 시들지 않게 틈틈이 관리하며 보살펴야 한다. 미진은 자신이 아닌 타인의 마음을 살피는 일에 중독되어 화원이 시들어 가고 있고, 영은은 생각지 못한 자신의 화원을 과할 정도로 돌봐주는 미진에게 중독되어 화원이 시들어 가고 있다. 각자의 화원을 갖고 있으면서도 주인이 되지 못한 채 엉뚱한 곳을 맴돌고 있는 이 둘의 관계는 끝이 보인다. 관계가 끝이 난다면 화원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하루빨리 미진과 영은이 자신의 화원을 되찾아서 꽃을 가꾸고 나비와 벌의 방문을 환영하며, 여유를 갖고 차를 마시며 편안함에 이르렀으면 좋겠다. 세상 모든 미진과 영은이 화원의 주인이 되어 자신을 잃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책은 두고두고 읽혀야 하며, 전해지고 전해져서 지금 한국 사회의 문제의 심각성과 해결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아봐야 한다. 한국 사회의 문제를 일으키면서 동시에 그 문제의 피해자가 된 우리가 책임져야 할 일이다. 이 책 앞에서 나는 오랜만에 사회 구성원이 되었다. 사회에 속할 수 없는, 속하기 싫은 마이웨이 개인이라고 자부했는데 사실은 사회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싫든 좋든 사회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와 보장을 받고 있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그럴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가 생기를 잃고 시들어 가고 있지만-이미 시들었는지도 모른다-한국은 위기에서 일어날 단단하고 밝은 힘을 갖고 있기에 상황이 흘러가는대로 파괴되지 않을 것이다. 여러 번의 크고 작은 위기가 있었지만 결국은 함께목소리를 내고 걸음을 맞춰 앞으로 나아가서 이겨냈다. 당면한 문제 또한 한국인의 힘으로 해결할 것이다. 필요할 때 늦지 않게 나타나는 촛불을 잊지 않아야 한다. 어둠을 밝히는 수많은 촛불은 밤하늘에 떠있는 둥근 달보다 환하다는 사실 또한.

202412, 한해를 마무리하며 따뜻하게 보내야 할 연말에 생각지 못한 소식에 국민들이 불안에 떨고 분노하며, 자신만의 빛을 들고 추운 것도 잊고 거리로 뛰어 나갔다. 남녀노소, 나이불문하고 모두가 뛰어든 거리에는 절대 꺼지지 않을 수많은 다양한 빛이 있었고, 함께 한다는 사실이 추운 날씨를 이겼다. 지금 한국 사회에 찌든 문제가 하나씩 뿌리 뽑혀 나가는 그날을 꿈꾸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작은 불씨를 품은 위로를 전한다. 희망은 잔인하지만 앞으로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희망을 품은 자에게는 내일이 반드시와야만 하고, 희망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닿은 하루하루가 모인 우리의 삶은 눈이 멀 정도로 찬란할 것이다.

 

이 책은 서평단 활동을 위해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제공 받았습니다:D

 

은행나무 : 서평단 활동을 너무 늦게 마무리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책장을 넘기고 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습니다. 이 책을 기획한 의도를 책장을 덮고 나서 90% 정도 이해했습니다. 두고두고 꺼내 읽으면서 슬퍼하고 분노하고,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는 책을 만나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2024년이 다 가기 전에 이 책을 읽은 건 아마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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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국을 말하다
장강명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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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고, 읽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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