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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고 싶지 않은 새
김강산 지음 / dodo / 2025년 10월
평점 :
문장, 그림, 작가의 말까지 완벽한 그림책이었다.
: 김강산 글/그림, 『날고 싶지 않은 새』 (도도그림책)
파랑새와 플라밍고의 사랑 이야기라, 낭만적이고 따뜻하다. 고정순 작가님의 <추천의 말>을 보고 나서 이 그림책을 읽기도 전에 빠졌다. 읽을 만하면 뭐 만족스러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정순 작가님의 추천이 아니라도 <날고 싶지 않은 새>가 내 마음에 깊게 자리 잡을 거라는 걸 파랑새가 뱉는 첫 문장에서 깨달았다. “날고 싶지 않아.”.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채워진 세상을 파랑새가 왜 날고 싶지 않은 것인지 궁금했다. 새라고 하면 날아야 하는데, 어째서 날고 싶지 않은 것인지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짧은 글을 꼼꼼히 읽었다. 하지만 파랑새가 날고 싶지 않은 이유는 책은 다 읽고도 알 수 없었다. <작가의 말>을 읽고 파랑새가 날고 싶지 않아 하는 이유를 찾으려고 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작가님이 그랬다, 날고 싶지 않아 하는 파랑새에게 서사를 만들어주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의미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작가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파랑새에게 슬픔을 위한 서사는 필요 없었다. 다시 말해, 파랑새가 날고 싶지 않은 이유를 파랑새 본인만 알겠지만, 굳이 서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파랑새가 날고 싶지 않음을 느끼는 시기일 뿐이다. 파랑새가 날고 싶지 않다고 할 때,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요즘 모든 게 귀찮고 무기력한데 일은 해야 하니 기본적인 것만 하면서 겨우 일상을 끌고 가는 중이다. 내가 왜 그러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 내가 조용하고 연락이 뜸하면 엄마는 무서울 정도로 곧바로 알아차리고, 연락한다. 그리고 답해줄 수 없는, 어쩌면 답이 없는 똑같은 질문을 계속 반복한다. “왜 그러냐, 무슨 일 있냐.”. 그냥 이런 시기구나, 라고 받아주지 않는다. 왜 그러는지 모르고, 무슨 일 없다는 답변은 오래전부터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엄마 연락을 피하거나 괜찮은 척 목소리 톤을 올려 잘 지내는 것처럼 연기를 하지만 의미 없다. 엄마는 완벽한 해결이 불가능한 내가 겪는 시기에 해결을 바라고, 계속 나를 들들 볶는다. 엄마가 그럴수록 나는 점점 ’문제‘가 되고, 수많은 서사를 가진 비극적인 인물이 된다. 엄마가 왜 그러는지는 알지만 엄마의 과한 관심과 내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나를 문제로 바라볼 뿐,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매번 이런 식이라서 상처를 받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익숙함으로 상처를 받지 않는 건 아니다. 엄마는 여전히 나를 위한다는 피만큼 진한 이유로 나에게 더 상처를 주고 있다. 엄마를 닮았다며, 당신은 내가 왜 힘들어하는지 안다고 이해한다지만 나는 엄마의 말을 오래전부터 믿지 않았다. 10개월을 품어 나를 낳고 키웠지만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나다. 나를 다 안다고 말하는 엄마는 나를 제일 모른다. 엄마한테 ‘어른스러워보이지만 사실은 나와 별반 다르지 않는 인간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말들‘을 들을 때마다 웃음이 나온다. 어른이 되고 나니 엄마가 어른인 척하느라 고생하고 있다는 생각도 자주 한다.
플라밍고를 구원자의 의미로 두려고 하지 않았다는 작가님 말과 달리, 개인적으로 플라밍고를 구원자로 느꼈다. 플라밍고의 사랑이 파랑새를 날도록 했으니 구원자가 아닌가. 날고 싶지 않은 파랑새가 날개를 활짝 펴고 날 수 있도록 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이 구원이고, 구원이 사랑이다. 사랑을 말하는 표현은 많은데, 그중 ’구원’이 가장 사랑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구원은 뭔가 거창해보이니 사랑을 자주 쓰는 것이다. 플라밍고는 파랑새의 날개짓에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받은 사랑은 반드시 또다른 사랑으로 세상 곳곳에 닿기 마련이니까.
플라밍고의 발에 묶인 쇠사슬이 목에 생선 가시가 걸린 것처럼 자꾸 아프다. 파랑새를 처음 만났을 때 플라밍고의 슬픈 눈도. 플라밍고는 파랑새보다 먼저 세상을 경험했기에 파랑새는 자신이 겪은 일들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파랑새를 돌봤을 것이다. 변하는 계절을 함께 느끼며, 파랑새가 자신을 괴롭히는 무언가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도록 곁에서 기다렸다. 왜 날고 싶지 않냐고 묻지 않고, 함께 있어주기만 했다. 내가 힘들 때, 엄마가 나한테 해줬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엄마의 방식도 분명 사랑인데, 플라밍고의 방식이 내겐 더 사랑처럼 다가왔다. 플라밍고도 누군가에게 자신이 파랑새에게 주는 사랑을 받은 것일까? 아니면 자신은 받지 못했지만 받고 싶은 사랑을 파랑새에게 준 것일까? 전자든 후자든 상관없다. 플라밍고는 사랑을 알고, 자신이 아는 사랑을 아낌 없이 파랑새에게 줬으니까. 힘차게 날아간 파랑새는 분명 플라밍고에게 받은 사랑을 사랑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플라밍고가 그랬던 것처럼 아낌 없이 줄 것이다. 사랑은 기억되고 전해지는 거니까. 그리고, 또다시 날고 싶지 않은 때가 와도 플라밍고의 사랑으로 다시 날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사랑은 이렇게 누군가를 살게 하고 돌보는 힘이 된다. 사랑을 나누려는 존재로 만든다. 사랑을 계속 키운다.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플라밍고와 파랑새의 사랑 이야기는 두고두고 세상 곳곳에 전해지고,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생각지 못한 만남에서 주고받는 사랑 이야기라니, 낭만적이다. 생각지 못한 만남이라고 했지만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작가의 말>을 계속 곱씹는다. 그렇다. 우리는 개개인의 짊어진 슬픔에 놀라곤 한다. 더 놀라운 것은 그곳에서 사랑을 나누려는 존재를 만난다는 것이고. 플라밍고의 사랑만큼 <작가의 말> 또한 위로가 된다. 슬픔 자체만으로도 이해받을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왜 슬픈지 묻지 말고 그냥 곁에 있어주는 존재를 만난다면 슬픔에 잠식 당하지 않을 것이다. 서로를 미워하고 공격하는 세상이지만 그런 세상이 여전히 살만 곳이라는 말이 들릴 때면 비웃었다. “세상은 여전히 살만 한 곳이야.”라고 말하는 사람과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속내를 숨기고 연기하며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도 세상 곳곳에서 상처를 입히고 입는 소리가 들리는 데 말이다.
그런데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상처가 시선을 끌기에 자극적이어서 그렇지, 곳곳에 사랑의 소리가 들린다. 상처와 사랑은 양극에 둘 필요도 없다. 사랑 안에서 상처가, 상처 안에서 사랑이 피어나는 것이니까. 사랑과 상처는 애초에 같은 단어인지도 모른다. 사랑이 상처로 읽히고, 상처가 사랑으로 불리는 곳이 세상이니까. 확실한 건 세상에는 사랑을 나누려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인가. 사랑을 아는 이들, 사랑을 나누려는 이들이 있는 한 세상은 여전히 살만 곳이며, 세상 곳곳에 숨어 들어 어지럽히는 어둠을 말끔히 몰아낼 것이다.
사랑을 알려준 플라밍고에게 고맙다. 그 사랑으로 저멀리 날아간 파랑새에게도 고맙다. 파랑새가 날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 아닌 사랑으로 알려준 플라밍고는 ‘진정한 사랑’을, ‘자신만의 사랑’을 갖고 있는 것이다. 세상 곳곳에 있는 수많은 사랑이 온전히 사랑이 필요한 곳에 닿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수많은 플라밍고와 파랑새가 <날고 싶지 않은 새>를 만나서 ‘사랑’을 품기를 또한 바란다.
*이 책은 서평단 활동을 위해 ‘도도그림책‘ 출판사에서 받았습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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