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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트 (반양장) - 제12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ㅣ 창비청소년문학 89
이희영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평점 :
생각할 거리가 많은 『페인트』를 5년이 지난 2024년에 만나다,
이희영 장편소설, 『페인트』(제12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로 『페인트』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출간되자마자 많은 독자에게 읽히거나 꾸준히 사랑받는 책들을 제목과 작가만 알아두고, 안 읽는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그냥 그러고 싶다.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는 이유를 어느 정도 알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오랫동안 이야기 안에 머물 것 같기 때문이다. 『페인트』도 그런 이유에서 읽기를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뤘다. 5년이 지난 2024년 10월에서야 어쩌다 책장을 넘겼고, 제누와 아키, 노아와 박 그리고 최를 만났다. 정말 생각지 못한 만남이었고, 이 만남을 어쩌다 내게 선물해준 남동생에게 고맙다.
『페인트』는 국가에서 돌보는 아이들(NC)이 부모를 선택하는 설정으로 묘한 쾌감과 더불어 기시감(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분명 머지않은 미래에 기시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을 선사한다. 부모를 선택하는 걸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던 나에게는 이 설정이 신선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을 느끼게 했다. 한 번도 꺼낸 적 없고 꺼낼 일이 없었던 질문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려 일을 크게 벌리는 기분이랄까. 나쁘지는 않았다. 답을 찾는 게 두려워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는데, 이제는 꺼낼 때라고 용기와 더불어 방향을 잡아주는 느낌이라서 따라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발을 들이게 된 NC센터는 수많은 아이가 있었고, 아이들이 좋은 부모를 만나서 행복한 미래를 보낼 수 있도록 바쁘게 일하고 진심을 다하는 가디들이 있었다. NC가 되었다는 건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가디들의 보호를 받으며, 부모를 선택하는 과정을 거치는 아이들은 저마다 다르게 생각한다. 그중 제누 301은 아이라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른스럽다. 어른스럽고 성숙하다는 말이 참 잔인하게 느껴졌다. 가장 아이다워야 할 때 어른스럽다는 건 성숙해져야만 하는 이유가 반드시 존재하고, 그 이유는 아이들과 전혀 상관없기 때문이다. 제누는 어른스럽고 동시에 아주 늦게 알아버렸으면 하는 어른의 세계를 꿰뚫고 있다. 그런 제누를 바라보는 박과 최는 제누에게 좋은 부모를 찾아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박은 제누가 어떤 선택을 할지 이미 예견하고 있었고, 그의 선택을 존중한다. 박이 제누를 바라볼 때 대견함을 품은 안타까움이 존재한다. 어른들은 착각하거나 연기한다. 아이들이 속았을 거라고 모를 거라고 넘기지만, 아이들은 다 알고 있다. 알지만 어른들이 그렇게까지 해서 감추고 싶어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일부러 못 본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할 때가 많다. 어쩌면 아이가 어른이고, 어른이 아이일 지도 모른다.
모두 축복받으며 태어나서 사랑받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산다면 좋겠지만 제누의 말을 빌리자면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언제든지 다칠 수 있는 세상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라지 못한 아이’가 마음에 자리를 잡고, 그 아이를 못 보거나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 탓에 상처를 주고받는다. 술만 먹으면 괴물이 되는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받았던 박을 보면, 자라지 못한 아이가 박의 마음에 자리 잡은 채 박을 괴롭힌다. 그 아이를 토닥여주는 건 박의 몫이다. 박이 이겨내야 할 무게가 상당하다. 죽음을 목전에 둔 아버지를 두고 괴로워하는 박은 아이들이 좋은 부모를 골라 행복한 가족을 만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을 통해 마음속에 자라지 못한 아이를 충분히 잘 달래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용서는 박의 선택이며, 박은 아이들을 위해 쉼 없이 일하는 것으로 자신을 학대한 아버지한테 당신과는 다르다고,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서 말하고 있다. 박은 아버지와 다른 선택을 했고, 스스로 미래를 바꿨다. 자신의 몫이라는 걸 알았고, 몫을 처리하고 난 미래가 자신의 것이 되길 간절히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런 거라면 박은 앞으로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제누의 부모가 되기 위해 NC센터를 방문한 ‘하나’가 기억에 남는다. 특히, 3차 페인트를 하면서 하나가 제누에게 엄마 이야기를 하는 장면. 하나의 엄마는 하나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방식이 조금 달랐다(틀렸다고 하고 싶지만, 그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일 테니까. 누군가는 그런 사랑마저 간절할 테니까). 마냥 사랑으로만 볼 수 없던 순간들이 많았다. 사랑하는 딸이었지만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들을 대신 이뤄줄 존재로 하나를 여겼고, 하나는 엄마의 엇나간 사랑에 수긍하지 않았다. 엄마는 그런 딸에게 배신감을 느꼈겠지만 하나는 전혀 미안해하거나, 후회하지 않았다. 그저 엄마의 삶을 아파했다(딸이 해줄 수 있는, 딸이라서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하나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부모로부터 독립해야 할 자연스러운 변화에서 부모 또한 자녀로부터 독립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녀가 오롯이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걸 부모에 대한 배신이 아닌 기쁨으로 여기는 것, 자녀로부터의 진정한 부모 독립 말이다.’(160쪽) 하나의 깨달음에 물컹한 것이 목구멍을 채웠다. 책장을 덮고 나서 하나가 덤덤하게 꺼낸 엄마 이야기가 계속 떠올랐다. 하나가 자꾸 내 마음을 헤집어 놓은 이유를 알았다. 하나와 상황은 다르지만, 자꾸 나와 겹쳐 보였다. 하나가 마음 가장 아래 가라앉아 있던 수많은 질문 중 몇 개의 답을 찾아준 것 같다.
『페인트』는 생각할 거리가 많은 소설이다. 독자들이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을 만나 수많은 생각을 하고,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는 건 특별하고 소중한 일이다. 부모를 선택하는 시대, 아이에게 선택받고 싶어 하는 어른들의 진짜 속내, 어린 날 아버지의 학대를 받은 자신과 닮은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 꼼꼼히 따져가며 일하는-아이들에게 진심인-어른, 마음속에 ‘자라지 못한 아이’를 마주해야 하는 순간, 알 수 없어서 다행인 미래를 위해 직접 색을 고르고 붓을 든 아이 등 『페인트』는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미세하게 다른 색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머지않아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서 마냥 가정만 할 수 없었다. 일어날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안 일어날 거라는 보장 또한 없기에, 제누와 아키 그리고 노아와 같은 아이들이 생길까 봐 두려웠다. 아이들에게 부모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건 신선하면서도 괜찮은 것 같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아이들에게 쉽지 않은 선택을 하도록 만든 어른들에게 원망의 화살을 안 보낼 수가 없다. 축복과 사랑, 보호를 받으며 자라야 할 아이가 버려진 것도 잔인한데, 부모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조차 잔인함의 연장선으로 보인다. 부모가 자식을 선택할 수 없듯이 자식도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부모와 자녀는 서로에게 부모와 자녀라는 이유로 당연하게 요구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반복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가깝지만 가장 멀고, 풀기 어려운 매듭으로 지어진 걸지도 모른다.
NC센터를 떠나 자신이 선택한 부모와 새로운 삶을 살게 될 아이들이 부디 NC센터로 돌아오는 일이 없기를, 서로 좋은 면을 보고, 보여주기 위해 애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며 천천히, 서로에게 진짜 가족이 되어주길 바란다. 마음속에 자라지 못한 아이를 품은 우리들이 더 이상 아프지 않길, 아이를 혼자 두지 않길, 다 보이는 검은 속내보다 솔직하게 진심을 털어놓고 그 진심이 온기를 품은 채 가닿길 간절히 바란다.
■ 『페인트』가 이희영 작가님과 첫 만남이다. 출간되고 5년 후인 2024년에 만난 『페인트』를 만난 건 특별하다. 아픈 시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 나의 마음속에 자라지 못한 아이가 있다고, 알려줬으니까. 그 아이와의 대화는 당장 어려울 것 같지만 언젠가는 오랫동안 대화를 나눌 거라는 걸 안다. 작가님 말을 빌리자면, 유년 시절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니까(듣고 싶은 말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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