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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발 늦었네 ㅣ 스콜라 창작 그림책 80
신순재 지음, 염혜원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3월
평점 :
한발 늦었더니,
신순재 글 ․ 염혜원 그림, 『한발 늦었네』(위즈덤하우스)
‘속도’라는 단어를 봄으로 표현한 그림책이다. 이 그림책 안에 등장하는 아이와 고양이, 새, 나비 그리고 다양한 색이 각자 속도대로 말하고 걷고 바라보고, 흐르고 있다. 아주 잠깐, 봄이가 되고 싶었다. 풀린 신발 끈을 묶는 동안 먼저 놀러 가버린 친구들을 뒤따라가는 길이 고양이, 새, 나비 덕분에 외롭지 않았으니까. 한발 늦었지만 봄이는 한발 앞서 갈 때 볼 수 없던 것을 보고 듣고, 느꼈을 테니까.
봄이가 되고 싶다고 했지만, 전부터 봄이였던 건지도 모른다. 해맑은 얼굴을 한 봄이가 아닌 신발 끈을 묶고 뒤늦게 뛰다가 넘어진 봄이에서 멈춘 게 ‘나’이다. 봄이는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나 한발 두발 세 발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 봄이는 친구들을 만나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봄을 만난다. 봄이와 달리, 나는 넘어진 그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툭툭, 털고 일어나 앞으로 가야 한다는 건 알지만 몸이, 마음이 따라주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내게 강요한 적 없지만 나는 늘 무언가 쫓기고 있다. 쫓기는 느낌이 들어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결과물이 생긴다면 쫓긴다는 느낌의 순기능을 이용할 테지만 그것도 아니다. 그저 쫓기고만 있을 뿐이다. 나만 제자리걸음이고, 모두 멀리 가서 보이지 않는다.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멀다. 애초에 누군가를 따라잡는다는 게 말이 안 된다. 각자 속도가 다른데, 어떻게 쫓을 것이며 따라잡을 것인가. 어른이 되니 쉽게 휘둘리고 쫓긴다. 점점 시야가 좁아지고, 마음이 모나진다. 꼭 정해진 속도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생각한다. 다들 각자 속도가 있다고 말하지만, 세상은 각자의 속도를 인정할 만큼 여유가 없다(인정은 무슨. 이해도 전혀 하지 않는다). 빠르고 앞지르는 것에 쉽게 노출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 속도 대신 누가 정했다고 정확히 집을 수 없지만 불특정 다수가 따르는 속도를 학습하고, 그것이 제 속도라고 믿는다. 자기 속도를 찾기 전부터 학습된 속도는 수많은 속도 앞에서 까막눈이 되길 강요한 채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가스라이팅 하고 있다. 잃어버린 수많은 속도는 어디로 갔을까? 설령 그 속도를 찾는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각자 몫이겠지만 아무 쉽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에 길들여진다는 건 생각보다 더 무서운 일이다. 20대 중반을 넘어서는 지금도 내 속도를 찾지 못했다. 움직이지 않으니 속도를 알 수 없다. 과거에는 빨랐던 것 같은데, 착각인가.
한발 늦으면 어떤가, 하고 싶지만 스스로 거부한다. 이미 한발만 늦은 게 아닐 텐데, 여전히 늦은 상태일 텐데 뭐가 무서워서 마음에 바람이 통하지 않게 잠궜는지 모르겠다. 속도를 잃어버린 건 분명하고, 한발보다 훨씬 많은 걸음을 늦은 것도 확실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보다 답은 간단하고, 이미 진행 중일지도 모른다. 그걸 뒤늦게 알아차릴 게 뻔하다.
계속 걷는 것. 그것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대신 내 시간을 걸어줄 사람이 없으니. 걷다 보면 내가 어느 정도 걸어야 쉬었다 가야 하는지 알 수 있으니까. 제자리걸음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잃어버린 속도를 찾기 위해서 걸어야 한다. 걷다 보면 내 발꿈치를 시작으로 속도가 따라붙지 않을까. 봄이처럼 친구들을 만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예쁜 봄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한다, 한발 늦은 김에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천천히 감각으로 담고, 그것을 에너지로 만들어 한발 내딛을 때마다 용기를 북돋아줄 수 있도록 ‘한발 늦으면 어때?’ 연습이 필요할 것 같다. 한발 늦으면 어때?, 하고 입으로 소리내는 것부터 시작이다. 말이 주는 힘은 거대하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그럴 듯한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한발 늦으면 어때?, 뒤로 붙을 문장은 이제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문장이 끊기지 않고, 매일 다른 문장이 물음표 뒤를 든든하게 뒷받침해주길.
◎ 이 책은 위즈덤하우스에서 받았습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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