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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의한 V양 사건 ㅣ 초단편 그림소설 1
버지니아 울프 지음, 고정순 그림, 홍한별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24년 8월
평점 :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없습니다.
버지니아 울프 글 ․ 고정순 일러스트, 『불가사의한 V양 사건』(길벗어린이)
세상에는 수많은 ‘V양’이 존재한다. 나도 V양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세상 곳곳에서 끝도 없이 쓰이는 V양의 이야기는 하나 같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흐릿하다. 흐릿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 존재하는데 말이다. 존재가 이렇게 쉽게 지워질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면서도 너무 쉬워서 헛웃음이 났다. 뭐가 이리 쉬워.
‘존재감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책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존재’를 앞에 두고 다양한 정의를 펼치고 나를 발견할 수 있다. 검색창에 ‘존재’를 넣으니 ‘현실에 실제로 있음. 또는 그런 대상’이라고 나온다. 현실에 실제로 있다는 문장이 왜 낯설게 느껴지는지 알 수 없다. 현실에 내가 실제로 있다는 사실 마저 낯설게 느껴졌다. 거창할 것 같던 존재의 정의가 생각보다 간단하고, 그 간단한 정의인데도 그 정의에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아주 잠깐 숨을 참았다. 어쩌면 존재에 속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 문장 자체가 ‘존재’를 보여준다.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지만 그런. 버지니아 울프 문장과 조화를 이루는 고정순의 그림은 존재를 표현하기 위한 세심한 터치가 느껴진달까. “지금 의자를 쳐서 바닥에 쓰러뜨려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러면 적어도 아래층 사람은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알겠지.”라고 말하는 수많은 V양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그들의 간절함이. 너무 간절해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존재감을 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이 존재한다고 ‘의자를 쳐서 바닥에 쓰러뜨리는 것’말고는 할 수 없으니까. 자신의 존재를 사물을 부수는 행위로밖에 드러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고 아프다. 그들의 표정, 손짓, 몸짓, 목소리가 아니라는 게 잔인했다. 어쩌다 잃어버린 존재감을, 아니 존재감을 잃기를 원한 적 없던 그들이 존재감을 잃고 견뎠어야 할 삶의 무게와 존재감을 다시 찾기 위해 이 악물고 뛰어다녔어야 할 시간을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들이 간절히 원했던 존재감을 나는 잃길 바라는데, 그런 나는 어떻게 보일까? 존재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 나를 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누군가는 존재하기를 원하고 다른 누군가는 존재하기를 원하지 않는 모순적인 상황에 놓인 이 기분, 정말 이상하다.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망설임 없이 말하기가 두려워졌다. 내가 ‘나’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불리고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불리지 않는다면, 내가 존재했던 순간들이 우주를 떠도는 먼지보다 더 못한 불쌍한 무언가로밖에 되지 않을까봐 두렵다. 존재하길 원했던 적은 없지만, 존재하지 않길 바랐던 적은 있다. 존재감을 잃게 되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상상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손을 뻗어 앞에 무엇이 있는지, 옆에 무엇이 있는지 느껴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송두리째 날아간 것이다. 헛웃음이 겁에 질린 울음으로 바뀌었다. 존재감을 잃는다는 건 정말 무섭고 잔인한 일이다. 그동안 ‘존재’에 대해 가볍고, 쉽게 생각했다. 존재는 이분법적으로 간단하고 나누는 것이 아니다. 존재가 없는 순간, 나도 사라지는 것이다. 존재하기 위해 우리는 뭐든 해야 한다. 우리가 바쁘게 하루를 보내는 것도 존재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며, 존재하기 위한 발버둥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존재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뭐든 할 것이며, 우리의 모든 행동에 대한 이유는 존재가 빠지지 않을 것이다.
어제 오늘 우리는 한순간도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없다.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인가.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없는 우리는 각자 시공간을 걷고 달리고, 만지는 중이다. 스치듯 느껴지는 존재의 촉감이 이제는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 이 책은 서평단 활동을 위해 ‘길벗어린이’에서 받았습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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