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어린이 2023.가을 - 통권 82호, 창간 20주년 기념호
창비어린이 편집부 지음 / 창비 / 2023년 9월
평점 :
품절


지난 여름에 창비 계간지 200호(50주년)를 맞이했다면, 이번 가을은 창비 어린이 82호(20주년)를 맞이했다.


어쩌다보니 최근 몇년은 창비에서 출판한 어린이 그림책과 청소년 시집, 청소년 소설을 많이 읽게 되었다. 부쩍 청소년 소설이 많아진것도 사실이나, SF 장르나 영어덜트라는 장르 속에 '청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청소년 문학'이라는 장르는 그 경계성이 모호해진 것을 느껴왔다.


그렇게 '요즘 청소년 문학'의 트랜드를 반영하고 이 시기를 대표하고 있는, 백온유, 곽유진, 길상효, 단요, 이희영, 최상희, 현호정의 창작 청소년 소설 특집 단편글을 읽으며 청소년 문학을 이해하고 사유하는 폭이 넓어지게 됨을 느낄 수 있었다.

창작

이번 가을호는, 청소년 소설 특집으로 일곱편의 청소년 소설이 실려있다. 미래 사회를 그린 SF부터 , 판타지, 사소하지만 세밀한 일상의 이야기 까지 다양한 작품으로 일상의 풍경을 다각도로 바라보며 따뜻한 유대관계로 넓혀갈 수 있는 매력을 지닌 작품들이다.

  • 곽유진 - 뇌를 빼고 그림을 그려도 미대에 가고 싶습니다

'왕남뽑을 가리켜 뇌를 빼고 쓴 소설이라는 얘기가 많았죠. 사실 입시보다도 뇌를 많이 쓰면서 쓴 소설인데 말이죠.'라는 작가의 말이 서글프게 다가온건 결론을 못읽어서 인지 그런 날카로운 댓글들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쓰는 내가 재미있어야지 읽어주는 사람들도 재미있어야 한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글쓰기의 원칙도 재능있는 사람들의 거짓말 같았다.

지금 입시미술에 시달려 있는 내 입장과 다를게 없었다. 내가 잘그린 그림이라고 남들도 잘 그렸다고 생각해주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왕남뽑의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쓴 글도 그냥 뇌를 빼고 쓴 것처럼 가벼워 보였지만 인기가 많았던 것 처럼, 숙고하여 그린 그림이나 그냥 뇌를 빼고 그려서라도 입시 미술에서 뽑히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이렇게 암기화된 입시미술로 체득된 테크닉은 신체가 기억하게 놔두고,

그 다음엔 뇌를 뺀 후에 자신만의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려보면 되는거야.

하지만 결국 문학이 아닌것 같은 왕남뽑을 쓰기 위해서 조차도 작가가 중세사와 시나리오 작법을 공부했던건 분명한 사실이다. 미대 입시가 비록 예술 작품이 아닌것 같은 암기 미술을 하고 있지만 그 기초를 닦는 작업이라고 생각하고 미대 진학 후에 (지금까지의 암기 미술의 기억인) 뇌를 빼고 자신만의 작업을 하라는 선생님에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작품은 엉덩이로'라는 고되고 긴 고민의 시간과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노력'이라는 뒷받침과 '일단 내가 마음에 들어야 대중의 마음도 사로잡는다'라는 그럴싸한 그 유혹의 말과, '기본을 갖춰야 재능이 발휘된다'는 고전적인 말들이 모두 들어가 있어 꽤 공감이 되었던 글이다.

  • 길상호 - 다음 문장을 바르게 고치시오

국가 기관인 '내일 재활 센터'는 난치 질환으로 냉동되었다가 해동된 환자들이 시대적 차이를 극복하고 재사회화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곳이다. 이곳에서 재활 도우미로 봉사활동 하고 있던 찰라, 백년 전에 냉동되었던 환자가 깨어났고 그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모국어를 잃고 시간에 떠밀려 온 난민이었다.'

냉동 치료 환자들은 치료를 위해 시간을 늦췄다. 깨어나보면 저마다의 상실을 발견한다. 치료된 자신의 병에 기뻐하기 보다 달라진 미래와 사라진 언어에 당황하며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생각해 보니까, 뭘 그렇게 까지 했나 싶네..'

56세인 그가 16살의 자원봉사자를 만나 반말을 듣고 억척같이 화냈던 것도 잠시, '그 시대엔 이런 말을 썼어' 라며 존댓말을 가르쳐 주다가 결국 '이 시대에 적응' 하는 쪽을 택한다.

"우리의 다정한 언어는 널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어"

언어 파괴, 기후 위기, 난민, 난치 질환 치료 개발을 위한 냉동 문제를 모두 겪어낸 미래의 이야기이가 매우 흥미로웠다. 그리고 주로 사용하던 '모국어' 를 잃는 것 또한 '난민'과 다를바 없다는 표현 또한 와닿는다. 그리고 어떤 변화가 와도 우리는 다정하게 너를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 따뜻했다.

'한국어' 에 세번의 파도가 왔듯, 시대는 계속해서 파도치며 변화한다. 변화하는 방향성에서 옳고 그름, 더 나아지고 있는지 등을 따지는 것은 불분명하지만, 분명한 것이 있다면 우리는 결국 '적응'해 간다는 것이다. 일찍이 다윈도 말하지 않았던가.

"지구상에서 살아남는 종족은 가장 강한 종족도 아니고, 가장 지적인 종족도 아니다.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족이다. "

  • 단요 - 세상의 이름은 기린

기린의 줄잡이였던 '나'는 가족을 모두 잃고 기린의 다리가 무너지면서 땅으로 내려오면서 새로운 가족을 찾아야 했다. 그러면서 지키고 지켜지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유령기린은 우리를 지켜주지만, 우리가 없으면 유령 기린은 기린일 수 없다. 슬퍼도 내일을 위해 걸음을 옮길 수 밖에 없었고, 낯선 기린을 찾아 익숙해 지는 것은 평생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였다. 그래서 다시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때때로 빈자리가 원래의 마음을 대신하곤 한다. 기대가 서서히 무너지다가 모두 사라진 뒤에도 마음이 이었던 자리는 그 모양 그대로 남곤 한다. 버려짐에 대해서 생각했다. 강물이 지나간 후 그 자리에 싹틀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밀려나는 무엇으로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세계가 한껏 역동하며 내달리는 것에 함께 하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기다리든 기다리지 않든, 꿈꾸든 꿈꾸지 않든 '순환'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돌고 돌다 어느 순간 서로 다른 것의 마음이 기적처럼 맞닿아서 각자의 고통을 보게 되기도 한다.

'삶이란 숨결과 시간과 갈증과 열망이다. 삶이란 모든것이다. '

기린에 대한 이야기로 지켜짐과 지킴, 변화에 대한 슬픔과 적응, 만남과 괴로움, 배려와 용서, 다시 지켜짐과 지킴으로 순환되는 삶의 모든 숨결을 이야기 한다. 비유와 이입이 적절해서 눈길이 가는 소설이었다.

  • 백온유 - 냠냠

떡볶이집 딸로 똑부러진 반장이 은근 손을 많이 타는 한 친구를 관찰하고 챙겨주다가 정이 들어 버렸다는 청소년의 귀여운 썸타는 이야기를 부담스럽지 않게 풀어냈다. 자존심을 지키는게 무엇보다 중요하고 자칫 예민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부분들을 어떻게 지켜내면서 또 어떻게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고민하는 지점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결식아동이라는 점을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연민으로 도와줘야 한다는 마음보다, 오히려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로 여긴다. 이미 인기있는 떡볶이 집을 운영하고 있으면서 이제 차릴 생각인데 '시식'해 달라는 핑계로 음식을 권하고, 평가를 받으면서 갖는 둘만의 시간에서 짝남을 관찰하는 재미에 푹빠진다. 이렇게 웃는구나, 이런 말투를 쓰는구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이를 보면서 함께 '식사' 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단순히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사람만의 습관을 눈치채고 대화를 통해 알아가고 같이 보내는 시간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한다.

나는 그애가 먹는 모습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고 소리에 귀 기울였다.

냠냠 소리를 내며 맛있게 떡볶이를 먹는 순간이 참 행복해 보였다.

먹을때 신기하게도 냠냠 하는 소리가 만화캐릭터처럼 났다.

이 예쁜걸 나만 알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떡볶이를 나눠 먹는 것도 좋았지만, 새로운 면을 알아간다는 것이 더 좋앗다.

말이없고, 소심하고, 집중력이 떨어지고, 챙겨줘야 하고, 눈치 없다고 생각했는데 보면 볼수록 말이 많고, 웃기고, 똑부러지고, 신세시는 것을 싫어하고, 눈치도 있었다.

"너 먹을때 냠냠, 하면서 먹잖아. 그거 귀여워서 좀 보려고 했다. 그게 그렇게 불만이야?"

나는 내 마음이 전달되길 바라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마지막에 두 아이는 마주보며 웃음을 터트린다.

함께 웃으면서 식사한다는 것은 한층 더 가까워진다는 말이기도 한것 같다.

  • 이희영 - 꽃의 노래를 함께 부를래?

'너는 기억을 잃은 후에야 비로소 네 가치를 알게 된 것 같아'

기억을 잃은 채로 집으로 돌아가 기억에 없는 가족, 친구들을 만나고 낯선 거울 앞의 자신을 마주한 뉴라. 거추장스러웠던 앞머리를 자르고 초록색의 예쁜 눈동자를 드러내며 '나는 왜 내 눈동자를 가리고 있었던 거지?'라고 말하고, 방에서 발견한 자신이 그린것 같은 그림들을 보며 '나 그림을 잘그리는 것 같아'라고 말하자 그것이 너만의 '가치' 라는 말을 듣는다.

"나랑 꽃의 노래를 부를래?"라고 여자가 파트너를 청해야만 남자는 수확 감사절 춤축제에 참여할 수 있다. 잔뜩 움츠렸던 꽃봉오리가 터지듯, 잃어버린 용기가 발현되듯, 기억 너머의 지워버린 어떤 마음을 전달하듯 비록 기억은 없지만 방에서 발견했던 자신의 그림에 등장했던 남자 '드레'에게 서슴없이 청해본다.

'기억을 잃어버려서 원래 자신이 어떤 성격을 가진 사람인지 알수 없으니까' 작은 장점에도 기뻐하고, 속이거나 억누를 필요 없이 감정에 충실하고, 계산적으로 굴것 없이 과감하게 행동한다. 그것이 때론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동안 스스로는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던 걸까 되묻게 하는 지점이다.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니야. 평소에는 꼭꼭 숨겨 놓거나 억눌렀떤 스스로가 나타난거지.

기억을 잃는다는 건 자신을 가둬 놓은 '방'에서 나오는 일이니까.

주위의 모든 것들이 새롭게 변하면서 익숙했던 관계와 알고 있던 나를 색다르게 볼 수 있다.

별볼일 없던 내가 대단해지고, 새롭게 도전할 용기가 생기고,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해진다.

최근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라는 신간을 낸 이희영 작가의 따끈한 단편이다. 어린 나무가 첫 겨울을 맞이하는것 처럼 이제 성인이 되는 기로에 놓이는 17살이 된 기념으로 '기억의 오두막'에 들어가 '기억을 잃는 차'를 마시고 돌아오는 독특한 문화가 있는 마을에서 이번엔 '뉴라'의 차례였다. 우리가 흔히 '자신만의 방'이라고 부르는 동굴은, 힘들때 숨으러 들어가는 혹은 생각을 정리하게 하는 그런 곳이다. 그런 방의 존재가 우리를 돌아보게 하고 잠시 '숨쉬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방에 자신의 가치를 '숨기게 한다' 는 발상에서 이 소설이 만들어 졌다고 생각한다. 기억을 잃으면 자아를 잃게 된것이라 보통 두려움의 소재로 많이 쓰이는데, 이 소설에서는 두려울 필요가 없으며 차분히그리고 새롭게 자신과 주변을 둘러보며 '가치'와 '관계'를 발견하자는 이야기로 쓰인 점이 좋았다. 일주일 정도 '기억을 잃을 자신'이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 상상해 보시라.

  • 최상희 - 앤

'굿 시스터'는 다른 행성에서 이모님을 채용해 가정에 매치해 주는 정부 지원사업으로 보육과 가사를 담당할 노동력의 원활한 보급으로 가정의 행복도를 높이고 열악한 환경의 행성 사람들을 돕는 취지로 운영되고 있었다.

13세 이하의 아동들을 어른 없이 집에 혼자 두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기에 수요와 공급이 맞았다. 기후 변화로 두꺼운 얼음과 눈으로 덮여 혹독한 추위와 밤이 계속되던 헤카테 행성에서 온 '앤'은 상당히 앳되보였지만 일머리가 있어 노트를 들고 다니며 일을 속도가 빠르게 배웠고 곧잘했다.

이곳에 달리 집도 가족도 없는 앤은 더할나위 없이 완벽한 이모님이었다.

'통역기'를 통해 각기 다른 행성의 말을 교환하면서 앤이 알아야 할 건 우리의 요구사항 뿐이었고, 우리도 언제고 떠날수 있는 시스터 앤에 대해서 알려고 하진 않았다. 때문에 앤에게도 이곳이 아닌 저곳에는 가족이 있었다는 것을 간과했다. 앤의 돌봄을 받는 동생 래미는 23번의 이모들과의 잦은 이별에 익숙한 아이였고 '야생 동물의 눈과 코' 로 자신에게 진심으로 대해주는 지를 쉽게 파악할 줄 알았다. 앤을 잘 따라왔고, 직감적으로 앤의 변화도 누구보다 빨리 파악했다. 래미는 앤이 찾지 못하게 꼭꼭 숨는 숨바꼭질을 시도했다. 한껏 걱정스런 얼굴로 달려와 꼭 안아주길 바라며 멀리멀리 달아났고, 길을 잃었다. 그리고 앤 역시도 대게 이모님들이 작별인사 없이 떠났듯이 조용히 사라진다. 그 언젠가 들려주었던 헤카테 행성의 자장가만을 남겨둔채.

'다른 행성'에 사는 사람들이 '통역기'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요구사항'에 필요 충분하며 지내는 이 설정 속에서도, 가족, 유대, 진심, 사랑 들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내 놓을 수 있는 것을 보며 청소년 소설의 힘을 느낀다.

  • 현호정 - 가렌웰의 주방

전쟁 전에도 이미 삶이 전쟁같았음으로, 진짜 전쟁이 일어난 뒤에도 삶이 크게 변하거나 나빠지지 않으리란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낡아 빠진 여관의 화덕에서 스프를 끓여먹으며 겨우 목숨을 부지해 왔다. 남편도 잃고 딸도 잃은 이후 가렌웰은 쪽잠조차 자지 않았다. 잠을 자지 않으니 하루가 온통 잠이 됐다. 시작도 끝도 없는, 전쟁보다 나쁜 것이 되었다.

남편과 딸의 사라짐이 죽음인지 실종인지 알 수 없다.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다. 슬픈건지 화난건지 감정이 담기지 않는지 오래다.

'희망이란 무엇일까' 가렌웰과 여관 사람들은 앵무새의 외운말 같기도, 잠꼬대 같기도, 그러나 거지말 같지않은 희망을 부여잡고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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