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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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이런 젠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의 시작은 매우 강렬하다. 신경숙이 ’엄마를 잃어버린지 일주일 째다‘ 로 엄마의 이야기를 알렸던 것처럼, 정지아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했다. 아버지는 지리산과 백운산을 누볐던 ‘전직 빨치산’으로 20년 감옥살이 뒤에 고향에 터를 잡은 아버지는 그 뒤로도 자본주의 한국에서 평생을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사회주의자로 살았다. 아버지는 평소처럼 아버지는 민중의 발걸음으로 한걸음 내디뎠지만 다만 거기, 무심하게, 하필이면 거기, 전봇대가 서 있었고 아버지는 그렇게 가족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이 책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의 3일의 시간을 담고 있다. 조문실에서 맞이한 조문객들을 통해 아버지의 인간관계를 말하고 아버지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아버지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해방 이후의 한국의 70년 현대사를 덩달아 훑게 된다. 전라남도 구례의 짙은 사투리로 주고받는 대화들은 정겹지만 서글프고, 웃기지만 안쓰럽다. 선택할 수 없었던 아버지였기에 원치않게 평생을 ‘사회주의자의 딸’로 평행선을 그리며 살아왔다고 생각해오던 딸은 아버지를 어떻게 이해하고 기억해야 할까. 장례식장에서 딸은 아버지의 사람들을 만나며 이를 정리해본다.


영정사진 앞에서 딸은 말한다.

영정 속 아버지를 봤다.

'영정' 속이라는 말이 이제 다시 실물로 볼 수 없다는 실감을 불러 일으켜

나는 잠시 감상에 젖었다.

사회주의자가 아닌 아버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나는 아버지를 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中

장례식의 초반이었다.

그리고 여러사람들을 만나며 사흘의 장례식이 끝나던 날이 온다.

영정 속 아버지가, 이틀 내 봤던, 아까도 봤던 영정 속 아버지가

전과 달리 그립던 어떤 날들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中

영정사진 앞에서 아버지의 죽음과 부재를 실감하지만 결국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은 다시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부활' 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추억으로 회자된 기억속에서는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니까 죽음은, 끝이 아니구나.' 라고 딸은 생각한다.

자신과는 너무 달라 '수평선'을 걷는 아버지라고 생각했는데 '같은 결'을 가진 아버지라고 딸은 생각하게 된다.

그저, '내가 몰랐을 뿐이다.'라며 '사회주의'의 아버지에서 벗어나게 된 딸.

그리고 아버지 역시 마침내, 유물론에서 벗어나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아버지의 '삶'으로부터의 '해방'이었고, 딸이 '이해'하고 있던 아버지에서의 '해방'이었다.


해방은 벗어난다는 것이고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자유 이후의 삶이 더 중요하다.


따라서 『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 소설 제목에서의 '해방'의 의미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빨치산으로 살았던 아버지의 '해방 이후의 이야기'라는 삶의 족적을 쫓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러한 삶에서 이제 해방되었다는 이야기 이기도 하다.

또한 딸이 그간 지니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이미지)로부터의 벗어나(해방) 아버지를 보내드리는(역시 해방) 이야기 일 수도 있다. 즉, 그동안 아버지의 '일부'만 '알고 있던' 자신의 아버지에서 '해방'되어 '모르고 있던' 아버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버지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웃지 못할 사연들을 풀어내며 내가 알던 아버지가 아버지의 ‘일부’였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빨갱이’ 형 때문에 집안이 망했다고 생각하는 작은아버지는 죽은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을까. ‘소학교 동창’이라 둘도 없는 친구로 지냈던 시계방 박선생은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정치적 지향 차이로 계속 투닥일까. ‘담배친구’인 열일곱살의 샛노란 염색머리의 소녀는 죽은 아버지와도 여전히 허물없는 사이로 남게 될 수 있을까. ‘아버지의 아들’을 자처하는 사람들과 끝내 친구가 되지 못한 사람들은 아버지를 어떤 마음으로 보내게 될까.


누구와도 허물없으면서도 사상으로 대립하고 그러면서도 사람들을 감화 시키는 웃긴 아버지. 그리고 나를 믿고 사랑했던 아버지. 아버지의 인연들을 만나고 그 에피소드들 속의 몰랐던 아버지도 함께 만났다.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해서 아버지를 ‘이해’한다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이념과 갈등속에서 많은 오해가 있었고 오해받기도 했다. ‘아버지의 동반자’였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딸’이었던 ‘나’는 아버지의 유골을 손에 쥔 채 한참 울었던 딸은 유물론을 외치던 아버지를, 홍길동 처럼 사방팔방 다니며 사람과 어울리던 아버지를, 가장 아버지 다운 방식으로 보내기로 한다. 바람에, 황톳물인 강물에, 이곳 저곳 좋은 곳에 아버지를 보내어 아버지에게도 내게도 새 길이 열리기를 바라며. 


아버지의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들이 말없이 내 곁을 지켰다.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나를 감쌌다.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도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해방일지』 中


마지막에 이 대목에서 마음이 먹먹해 지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라는 그저 그 말 만으로도. 코끝이 시큰해 진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으나 실수투성이의 삶은 돌이킬수록 잘 산 것 같지 않다. 부끄럽지만 통렬히 반성하면서 살아왔고 행복도 아름다움도 성장도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야만 거기 있는 것도 아니었다는걸 이제 안다.


그건 니 사정이제, 라는 말을 자주 하며 '그놈의 사정'이야기를 자주 내뱉던 아버지.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라며 아버지의 입버릇 같았던 말을 되새겨보면 그 속에는 그놈의 사정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늘 뒷받침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를 받아들이고 보니 기본적으로 이해와 용서, 화해와 화합을 중요시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 단어 속에서 나는 사람 냄새를 이제는 맡을 수 있다. 그러고 나니 좀처럼 아름다워 보이지 않던 세상이 이리 아름답다. 

아버지가 그랬듯, 딸도, 그리고 그 시대의 딸들인 우리도, 계속해서 사람 냄새 넘치는 곳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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