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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겨스 - 미국의 우주 경쟁을 승리로 이끈, 천재 흑인 여성 수학자들의 이야기
마고 리 셰털리 지음, 고정아 옮김 / 동아엠앤비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세계 최고의 항공역학자들이 모인 슈퍼 엘리트기관으로 비행기를 설계 단계에서 시험해 보는 곳인 랭글리 항공 연구소.
전쟁으로 일은 산더미인데 인력난에 허덕이던 연구소에서 흑인 여자들을 고용하기 시작하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일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 뭉친 워커홀릭 도로시 본,
타고난 수학천재였지만 사랑을 위해 주부가 되었던 외유내강형 캐릭터 캐서린 고블,
따뜻한 성품에 야무지기까지한 팀 내 마스코트같은 존재 메리 잭슨.
이 곳에서 그녀들의 역할은 컴퓨터입니다. 날개 모양과 항공역학 성능의 관계를 정의하는 긴 방정식을 다른 방정식, 공식, 변수들로 변경하고, 일련의 방정식에 값을 입력해 숫자를 산출해 내고, 그래프를 만들어 내는 등 종일 숫자를 만지고, 숫자 속에서 헤엄치고, 눈이 아프도록 숫자를 들여다 보는게 그녀들의 일입니다.
그녀들은 차차 일에 익숙해지면서 선배 여성수학자들처럼 근호를 겹겹이 두른 방정식을 10쪽에 걸쳐 풀면서도 오류가 거의 없었고 그녀들은 차츰 정확성, 속도, 통찰력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계산하는 어시스트에 불과했던 그녀들이 종래에는 야심찬 엔지니어도 부러워할만한 눈부신 성과를 이뤄내며 항공학계에 크고 또렷한 족적을 남기게 됩니다.

잠깐! 타고난 똑똑한 머리로 시대에 편승해 전쟁 덕을 보았다 생각한다면 오산!
백인이었다면 타고난 천재성과 시대적 분위기로 순풍에 돛 단 삶을 살았겠지만 역사를 안다면 그런 생각이 들 수 없지요.
인종 분리라는 철의 장막이 이 당시에도 얼마나 굳건했는지 말해 입아픈 이야기지만 안 할 수가 없네요. 왜냐구요? 이 소설은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팔할로 2차 세계대전 즈음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모두가 알지만 낯선 시대.
2차 세계대전이라 불리우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외국의 인종주의자와 싸우는 블랙코미디같은 전쟁이 벌어지던 시기.
한편에선 전쟁이, 한편에선 전쟁 뒷바라지 같은 삶이 이어지던 당시의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어디서 들을 수 있을까요. 당시 미국 남자들은 군대로 빨려 들어가고 많은 여자들이 그 일자리를 대체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으로 사람들이 잔인하게 죽어가는 동안 반대편에선 세탁소에서 빨래를 직접하란 안내문구를 내걸 정도로 부흥기를 누리고 있어 인력 빈곤 상태였어요.
"여자들이 구두를 닦고, 조선소에서 일했으며, 군부대의 사무실에서 일했다. 남자들이 전선으로 떠나자 여자들이 그들의 빈자리를 채웠고, 지역 사업체들은 여성 인력을 고용하고 유지하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랭글리 연구소는 흑인과 백인이, 남자와 여자가,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가, 몸을 쓰는 사람들과 숫자를 다루는 사람들이 섞여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차별이 없진 않았습니다. '분리하되 평등하다'주의에 입각해 일을 할 땐 동등하게 대우해 주었으나 구내식당에선 '유색인 컴퓨터'란 표시판으로 위계를 분명하고 단호하게 알려주었어요.
이 일에 반기를 든 미리엄 맨(여자다)은 표시판을 없앴어요. 하지만 며칠이 지나면 어김없이 똑같은 표시판이 제 자릴 찾아왔고 미리엄은 표시판을 계속 없앴죠. 엔딩은 그녀가 승리(?)로 드라마틱하게 마무리 되어 표지판은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답니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편견과 크고 작게 끊임없이 싸워나가는게 흑인들의 삶이었어요. 끝이 보이지 않는 지난한 이 싸움을 포기하면 편하겠지만 그녀들의 목적의식은 아주 또렷하고 분명했습니다. 삶의 중심이 아주 견고하게 뿌리 내려 있어 멋져보였고 부러웠어요.
"평등 지향 세력은 항력을 뚫고 나가는 비행기의 제트 엔진처럼 통합에 대한 저항을 돌파하려고 더욱더 큰 노력을 기울였다."

영화 포스터를 보고 다이나믹하면서도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인 아주 영화적인 스토리를 기대했는데 의외로 이 책은 역동적이지도 스릴있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큐멘터리에 가깝다고 느낄만큼, 이 많은 글을 내가 다 읽은게 뿌듯하단 생각이 들만큼! 글은 건조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팩션인줄 알았는데 실화 에세이였더라구요! (방금 알았어요.) 어쩐지...
이 책을 읽고 덤덤하게 나열된 실화라 지루하고 낯설다 느낀 분도 분명 계실거 같아요.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건조한 글이라 더 리얼하게 와 닿았어요. 무엇보다 모든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할 훌륭한 이야기이기에 그것 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그녀들이 이룬 성취에 걸맞은 웅대한 서사, 라이트 형제나 우주 비행사들, 알렉산터 해밀턴과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누리는 것과 같은 미국 역사의 한 자리를 얻기에도 충분하단 작가의 말에 적극 공감해요.
W.E.B 듀보이스가 『검은 사람들의 영혼』에서 말한 "사회적 멸시의 무게"를 감당하고 끝내 이겨낸 그녀들 을 보니 그동안 잊고 살았던 내 삶의 목적의식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봐야겠다 싶었습니다.
십대 소녀들에게 권하고 싶은데 글이 너무 많아 학생용이 나왔으면 좋겠단 생각이 9페이지부터 368페이지를 읽을 때까지 들었던 책 『히든 피겨스』였습니다.
"메리 잭슨에게 인생이란 기대를 높여 가는 오랜 과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