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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1 ㅣ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E L 제임스 지음, 황소연 옮김 / 시공사 / 2022년 1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나눈 후 찾아오는 희열에 취해 누워 있다. 우리 위로 분홍빛 종이 전등불, 초원의 꽃, 뗏목들 사이로 반짝이는 요정의 불빛들이 보였다. 호흡이 점차 느려졌다. 나는 아나스타샤 꼭 끌어안았다. 그녀가 내 위에서 축 늘어졌다. 뺨을 내 가슴에 대고, 손은 쿵쿵 뛰는 내 심장 위에 얹고서. 어둠은 내 드림 캐처, 반려자에 의해 쫓겨나고 없다.....내 사랑. 내 빛.
지금처럼 행복한 적이 있었나?
소설의 첫 문단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롤리타>만큼 충격적이다. 이야기의 큰 줄기는 ‘무일푼에서 아니 (학자금 대출이 있으니) 마이너스 인생에서 남자를 잘 만나 갑부가 된 신데렐라’ 아나스타샤와 그녀를 만나 쾌락을 즐기던 그레이가 사랑에 눈을 떠 가는 과정으로 아주 아름답고 신성(?)할 수 있었다. 한 100m 떨어져서 보면 그래 보였을텐데 소설은 내밀한 곳까지 비춘다.
<롤리타> 얘기가 나와서 덧붙이자면, <롤리타>는 가해자(?)의 시선이라면 (그래서 읽는게 더 고통스러운지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소년에서 남자로 주체적인 삶을 사는 사람으로, 진짜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으로의 성장을 그리고 있단 점에서 엄청난 차이를 갖고 있다. 그래서 주인공의 매력에 끌리나보다. 주체적이면서 성적인 매력을 가졌고 사회적으로도 엄청나게 성공한 다시 말해 젊고 건강한 남성이다.
아나스타샤와 그레이의 갑작스런 결혼을 두고 어른들은 축하하는 듯 하지만 우려를 감추지 못한다. 반면 그레이는 어른들이 자신을 애 취급한다 생각해 오히려 더 결혼을 다짐한다. 그는 오늘의 사랑, 이 쾌락이 결혼으로 영원히 지속될거라 믿는다. 사랑하는 여자를 차지함으로 이 쾌락을 영원히 맛볼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총각파티(?)로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중에도 결혼생활이 이렇게 짜릿하고 수월하길 바라길 꿈꾼다. 긴 말이 필요없다. 철없다.
그레이는 결혼 후에도 변함없이 아나스타샤를 사랑할까?
“당신이 평생 날 거기 두겠다고 언약한다니 기뻐요." 우와. 나는 침을 삼겼다.
이건 엄청난 일이다.
평생을 아나스타샤와 함께 한다.... 그것으로 충분할까?
”명중이야, 스틸 양."
너무나 익숙한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다. 익숙하면서도 새롭고 반짝반짝하고 두려운 감정. 태어나 지금처럼 행복한 적이 없었지만 동시에 두렵기도 했다.
이러다 모든 게 끝나버린다면.
모든 것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인생은 덧없다.
그건 내가 안다. 내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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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남자의 사랑을 품는 창녀였던 엄마에게 사랑 받지 못한 유일한 남자 그레이. 그레이에게 엄마는 (모든 별의 기준이 되어주는) 북극성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가 이전에 만났던 그러니까 열다섯에 만난 첫사랑 엘레나도, 레일라도 유부녀였다. (다른 작품들에선 이들의 이야기와 검은 속내가 더 드러난다는데 <해방 1>에선 그저 돈받고 떨어져 나가는, 스쳐가는 옛 연인일 뿐이다.)
그녀들과의 관계를 결혼 직전까지도 끊지 못한걸 보면 그 둘이 그에게 준 영향은 애인, 파트너를 너머 뮤즈이자 어려서 공급받지 못한 모성애를 채워주는 젖줄기같은 존재였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마치 큰 돈을 안겨주는게 키워주셔서(=성에 눈뜨게 해주셔서?) 감사하단 뜻으로 결혼 전 부모에게 선물을 하는 것과 같은 느낌.) 신체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기질의 소년이 품은 여인이었으니 그 애정이 오죽했을까..
아나스타샤와 결혼으로 그레이는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 오롯이 성인이 될 수 있을까. 그의 북극성이 아나스타샤로 대체될 수 있을까. 그의 결혼을 축하하긴 1권으론 너무 이른 듯하다. (3권까지 있다 그랬나.)
결혼은 족쇄, 무덤에 곧잘 비유되지만 나의 경우는 반대였다. 늘 부모 그늘(=통제) 아래에서 벗어나고 싶어했고 결혼이 그 탈출구가 되어 주었다. 밤 늦게 돌아다녀도 혼나지 않는 생활, 무얼 먹고 마시든, 방 청소를 언제 했든 잔소리를 듣지 않고, 모든 일을 나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삶. 나에게 결혼생활은 자유 그 자체였다. (배우자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처럼 반전있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으니, 그레이같은 사랑 혹은 영원한 쾌락도 가능하지 않을까. 소설을 읽을수록 설득당하고 빠져들게 된다. 이 소설에 주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