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크 라이프
요시다 슈이치 지음, 오유리 옮김 / 열림원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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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히비야 교차로 땅 밑으로는 세 개의 도로가 달리고 있다.' 

첫문장은 첫인상을 결정짓는다. 이 문장은, 히비야에 대한 반가움과(작년 가을 동경에 민주노총 원정투쟁단을 따라갔을 때, 매일 아침 지나간 곳이 히비야 역이며 공원이었다.) 고풍스런 움직임이 우아해 보이던 까페 뤼미에르의 전철을 상기시켰고, 결국 내내 '까페 뤼미에르'를 읽는 듯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예를 들어서 말이야, 미즈호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잖아, 그러면 뭐랄까, 내가 신경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 늘상 서로 붙어 있으면 집사람이 숨 막혀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난 침실로 들어와서 책을 읽는다고. 그러다 미즈호가 침실로 들어오면 너무 밝아 잠을 못 잘 거 같아서 다시 거실로 나가고.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게 아니야. 함께 있고 싶으니까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다니고 있는 거지. p.41 

전화를 걸 때 20:34였던 비디오의 시계는 수화기를 내려놓을 땐 20:43이었다. 1분만 더하면 딱 10분이 됐겠지만, 그 1분 안에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리도 없는데 그 1분으로 뭔가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p.77

공원에서 보내는 시간에는 관찰과 전시가 공존한다. 빈틈으로 가득한 삶이 또 그러하여 공원은 세계로 확장되고, 나는 너를 얘기하지만 너는 나를 얘기하지 않고 그를 얘기하거나... 그렇게 만났다가도 비껴가고 돌아와 찾기도 하고 문득 떠난 길위에서 마주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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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
정문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10월
구판절판


나는 전선에서 사라져가는 그 숱한 죽음들을 바라보면서 비로소 '평화'라든지 '비폭력'이라는 말들이 지닌 속뜻을 깨달았다. 평화는 힘센 놈들이 만들어 낸 거짓말이었다. 비폭력은 그놈들이 뱉어낸 거짓말에 쳐준 맞장구였다. 그 둘이 함께 먹고사는 공생관계 속에서 세상은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져 왔다. -83쪽

기자가 중립을 지켜야 한다' 나는 그런 식의 말들을 믿지도 않을 뿐더러 관심도 없다. 그 '중립'이란 말은 백인, 기독교, 자본주의, 서양중심주의로 무장한 국제 주류언론들이 떠받드는 신줏단지였다. 그이들은 그 단지 밑에 숨어 자본을 증식해 왔을 뿐이다. 그런 국제 주류언론들 입장에서 벗어나면 지금까지 어김없이 '중립성' 논란이 일었고 그 당사자는 몰매를 맞았다.

내가 죽기 살기로 남예멘에 기어들어갔던 건 그런 식의 '중립' 따위나 지키겠다는 의지가 아니었다. 이미 북예멘에는 기자 수백 명이 진쳤고, 그이들 손발로 북예멘 쪽 기사는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따라서 독자들이 객관적으로 사실을 이해하려면 '남예멘발' 기사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시점이다. 그래서 나는 남예멘을 택했다. -172-173쪽

전선과 뉴스 사이에서 선택의 문제였다. 그런 뉴스거리는 외신들이 달려들 만큼 묵직한 주제였지만, 동시에 정부군이 동맹군 내분으로 선전해댈 기막힌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이중성' 때문에 나는 한동안 크게 망설였다.

혁명이 '이미지'로 먹고 산다는 현실을 놓고 볼 때, 카렌민족해방군에게는 치명적인 뉴스였고 그 결과 동맹군이 겪게 될 또다른 어려움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던 탓이다.

'서푼짜리 직업을 따를 것인가, 혁명사를 따를 것인가?'

결국, 나는 그 혁명 속의 '불신감'도 또 동맹군 속의 '희생'도 모두 자가 검열로 묻어버렸다.

고백하건대, 내가 지난 15년 동안 버마전선을 취재해 왔던 건 내 정치적 의지를 따른 행위였고, 나는 처음부터 '적'과 '동지'를 구분한 채 버마전선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시민을 대량 학살하고 정치를 탈취한 군사독재는 그게 한국에서든 버마에서든 내게 적이었다. 나는 그 적을 무너뜨리는 시민으로서 소임이 전선기자라는 내 직업과 무관하다고 여겨본 적이 없다. 해서, 내 기사가 군인독재자들을 이롭게 한다는 건 버마 시민들에 대한 배반이라 믿었다. 따라서 나는 자가검열을 했다. -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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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의 밤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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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폴 오스터는 시드니 오어의 이야기를,
시드니 오어는 닉 보언의 이야기를,
닉 보언은 실비아 맥스웰의 <신탁의 밤>을 이야기 하고,
<신탁의 밤>에는 르뮈엘 플래그의 이야기가 있다.

시드니 오어에게는 존 트로즈라는 친구가 있고,
존 트로즈는 플리트크래프트 일화를 얘기해 준다.
시드니 오어는 돈벌이를 위해 보비 헌터가 영화화하고자 하는
타임머신 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시드니 오어가 파란 공책에 써내려가는
존 트로즈와 그레이스, 자신과의 삼각관계에 대한,
실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이야기.

수많은 이야기들이 제멋대로 살아났다 사라지는 통에 정신이 없다. 이 소설은.

내가 궁금했던 건, 바르샤바의 전화번호부를 보면서 독방에 갇혀 버린 닉 보언이 어떻게 되는가, 였는데..
어느 순간 오스터는 시드로 하여금 닉에 대한 얘기는 더이상 하지 않게 만들더니,
생각지도 않았던 제이콥의 이야기로 성급하게 끝을 냈다.

그래, 나는 성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곰곰, 시드와 존이 나눈 대화를 떠올려 보니..

결국 폴 오스터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언제나처럼 우연과 글쓰기에 관한 것이었고,

글쓰기가 현실을 만드는지도 모른다는 파란 공책의 망령이
정말 '정말'일 거라고 믿어버리게 하는 게,
이 소설의 맡은 바 임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말이다.  

말을 해 놓고 믿어버리고,
글을 써 놓고 믿어버리는 거.

사실 오스터가 이렇게 정신사나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역설하지 않았어도,
늘 하는 일이었다.

적어도 난 말이지.  

p.s. <달의 궁전> 이후 한 5, 6년 만에 다시 집어든 폴 오스터다.
한 때 오스터가 유행일 때 그의 모든 소설을 섭렵한 선배들은,
이제 더이상 오스터를 거들떠 보지 않는 듯한데 - 비슷해서 지루하다 -
그런 중간 과정 없이 오랜만에 그의 소설을 읽은 난,
그저 신나기만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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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이여, 오라 - 아룬다티 로이 정치평론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혜영 옮김 / 녹색평론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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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라면 늘 아픈 눈을 뜬 채로 있어야 한다."

나의 감성은, 세밀하고 내밀한 표현을 선호하도록 나를 이끈다.

아룬다티 로이의 글은, 심지어 정치평론이라 일컬어지는 글에서조차, 치밀한 분석과 더불어 그런 종류의 표현력을 잃지 않는다.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작가다.  

"일단 그것을 본 다음에는 안 본 것으로 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일단 그것을 본 뒤에는, 침묵을 지키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기에 대해 발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정치적 행동이 됩니다. 순수라는 것은 없습니다. 어느 쪽으로든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25)  

그녀의 성공담은 그녀 표현 그대로, "리더스 다이제스트 류의 낡아빠진 이야기 - 한 무명 작가가 여러해에 걸쳐 은밀히 자신의 첫 소설을 썼고, 그것이 나중에 40개 언어로 번역이 되었고, 수백만부가 팔렸으며, 부커상까지 수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인도 남부 케랄라 주에서 태어난 검고, 마르고, 영리한 이 소녀는, 건축가, 프로덕션 디자이너, 시나리오 작가의 삶을 거치고 지나 30대 중반에 이르러 소설을 쓰고, 그것으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소녀가 정말로 대단한 점은, 그 엄청난 성공을 거둔 이후에 '소설 공장'으로 소진되며 겉보기엔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피폐하게 쓰러져간 것이 아니라, 세상의 무수한 작은 것들이 '세계화'의 광풍 속에 스러져가는 것을 무력하며 슬픈 눈으로 그저 관찰하지 않고,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의 재능을 내어놓고 있다는 것에 있다.  

나는 그녀가, 무척이나 친절하고 또 재치있는 말투로, 어려운 문제들을 쉽고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국주의 전쟁의 실체에 대해, '개발'이라는 환상이 실은 밝은 곳만 점점 더 밝게 비추고, 그만큼 어두웠던 곳은 점점 더 어두워지게 만드는 이상한 빛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하는 일이 당신에게 버거운 일이라면, 아룬다티 로이의 책을 선물할 것을 권하고 싶다.  

국내에 번역된 책으로는 <작은 것들의 신>, <생존의 비용>, <9월이여, 오라>가 있다.  

<작은 것들의 신>은 그녀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첫 소설이며, <생존의 비용>은 <작은 것들의 신>의 성공 이후 전세계를 여행한 후 인도로 다시 돌아온 그녀가 썼던 두 편의 에세이 - '상상력의 종말' : 인도 정부의 핵개발 비판, '더 큰 공공선' : 초대형 댐 건설 프로젝트 비판 - 를 묶은 책이라고 한다. ("핵폭탄과 댐은 결국 인도의 슬럼과 짝을 이루고 있다. 폭탄은 세금을 전용한 결과이고, 댐은 수백만명의 인구에게서 땅과 강을 빼앗아 갔다.") 

"더 기막힌 것은, 지난 10년간 내쫓겼던 수천명의 가난한 농부와 어부들이 대부분 아직도 재정착하지 못 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땅이나 생계를 잃어버리는 사람들 대다수는 미미하기 짝이 없는 재정적 보상 이외에 아무 것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결국 싸구려 농업노동자 신세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도시의 판자촌으로 굴러들어가고 만다. 둘 모두 참담한 극빈의 상황에 가깝다."(182) 

이런 부분은, 얼마든지 우리 사회의 문제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 당장 미군기지 이전 계획으로 인해 땅을 잃고, 강제이주/강제전업의 위기에 놓인 평택 주민들을 떠올려 보라.... 

읽다만 <작은 것들의 신>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든다.  

p.s 긴 머리가 미덕으로 여겨지는 나라에서 망설임없이 짧은 머리를 선택한 여자, 
      제대로 반항하고 제대로 저항하는 법을, 나도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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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천운영 지음 / 창비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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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운영은, 내게는 낯선 작가다.
그녀가 등장한 새천년 즈음부터 소설 읽기에 게을러진 탓이려니 한다.
어디선가 스치듯 들은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고, 밤샘 끝의 고단함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갈을 견디지 못해 서점에 갔을 때, 도둑질 하듯 그녀의 첫 단편집을 집어들었다. 

천운영의 소설이 새로운 것은, 두 가지 지점에서였다. 

2.
하나는, 육식성과 폭력성을 갖춘 '추한' 여자들에 대한 세밀한 묘사였다.
그러나 육식성도 추함도 '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야생성.. 여자들은 야생의 초원이거나 동물, 그 양자다.
월경 越境..하는 여자들.. 

3.
다른 하나는, 누군가에게는 일상이건만 잘 드러나지 않으므로 좀체 일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일상에 대한, 역시, 세밀한 묘사.
문신은 어떻게 하는지, 소 머리는 어떻게 가르는지, 곰장어 껍질은 어떻게 벗겨내는지, 박제는 어떻게 하는지...
그 어떤 것도 일반적인 아름다움과 거리가 있는 일이건만, 치밀한 묘사 자체가 아름다움이 되어버린다.

4.
여기에 덧대어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사랑, 성애, 가족의 이야기는 잔혹하고 처연하다.
어느 하나 자극적이지 않은 단편이 없다.
동물적인 자극이나 피비린내 나는 충격 따위 좋아하지 않는 나인데,
그런데 어쩐지 천운영의 소설들이 마음에 들어버렸다. 

<월경>, <등뼈>는 베스트, <포옹>은 시점을 바꿔가며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이야기의 종횡무진이 마음에 드는 작품.  

그러나 명확한 것은, 소설이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거다.
영화라면, 몸서리치게 싫어했을 것 같다. 

5.
소재에 강하게 기대는 그녀의 작품들이 과연 어디까지 변주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물론, 소설이고 영화고 간에 동어반복이라고 생각한다.
주제에 있어서건 형식에 있어서건 반복할 수 있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졌다면, 그를 작가라 칭할 수 있을 거다. 천운영이 독특하고 강한 소재에 천착한다 해도, 세상으로부터 그 소재를 선택하고 이끌어낼 줄 아는 시각은 이미 그녀만의 스타일이다.  

조만간 두 번째 소설집인 <명랑>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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