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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이여, 오라 - 아룬다티 로이 정치평론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혜영 옮김 / 녹색평론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라면 늘 아픈 눈을 뜬 채로 있어야 한다."
나의 감성은, 세밀하고 내밀한 표현을 선호하도록 나를 이끈다.
아룬다티 로이의 글은, 심지어 정치평론이라 일컬어지는 글에서조차, 치밀한 분석과 더불어 그런 종류의 표현력을 잃지 않는다.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작가다.
"일단 그것을 본 다음에는 안 본 것으로 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일단 그것을 본 뒤에는, 침묵을 지키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기에 대해 발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정치적 행동이 됩니다. 순수라는 것은 없습니다. 어느 쪽으로든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25)
그녀의 성공담은 그녀 표현 그대로, "리더스 다이제스트 류의 낡아빠진 이야기 - 한 무명 작가가 여러해에 걸쳐 은밀히 자신의 첫 소설을 썼고, 그것이 나중에 40개 언어로 번역이 되었고, 수백만부가 팔렸으며, 부커상까지 수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인도 남부 케랄라 주에서 태어난 검고, 마르고, 영리한 이 소녀는, 건축가, 프로덕션 디자이너, 시나리오 작가의 삶을 거치고 지나 30대 중반에 이르러 소설을 쓰고, 그것으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소녀가 정말로 대단한 점은, 그 엄청난 성공을 거둔 이후에 '소설 공장'으로 소진되며 겉보기엔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피폐하게 쓰러져간 것이 아니라, 세상의 무수한 작은 것들이 '세계화'의 광풍 속에 스러져가는 것을 무력하며 슬픈 눈으로 그저 관찰하지 않고,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의 재능을 내어놓고 있다는 것에 있다.
나는 그녀가, 무척이나 친절하고 또 재치있는 말투로, 어려운 문제들을 쉽고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국주의 전쟁의 실체에 대해, '개발'이라는 환상이 실은 밝은 곳만 점점 더 밝게 비추고, 그만큼 어두웠던 곳은 점점 더 어두워지게 만드는 이상한 빛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하는 일이 당신에게 버거운 일이라면, 아룬다티 로이의 책을 선물할 것을 권하고 싶다.
국내에 번역된 책으로는 <작은 것들의 신>, <생존의 비용>, <9월이여, 오라>가 있다.
<작은 것들의 신>은 그녀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첫 소설이며, <생존의 비용>은 <작은 것들의 신>의 성공 이후 전세계를 여행한 후 인도로 다시 돌아온 그녀가 썼던 두 편의 에세이 - '상상력의 종말' : 인도 정부의 핵개발 비판, '더 큰 공공선' : 초대형 댐 건설 프로젝트 비판 - 를 묶은 책이라고 한다. ("핵폭탄과 댐은 결국 인도의 슬럼과 짝을 이루고 있다. 폭탄은 세금을 전용한 결과이고, 댐은 수백만명의 인구에게서 땅과 강을 빼앗아 갔다.")
"더 기막힌 것은, 지난 10년간 내쫓겼던 수천명의 가난한 농부와 어부들이 대부분 아직도 재정착하지 못 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땅이나 생계를 잃어버리는 사람들 대다수는 미미하기 짝이 없는 재정적 보상 이외에 아무 것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결국 싸구려 농업노동자 신세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도시의 판자촌으로 굴러들어가고 만다. 둘 모두 참담한 극빈의 상황에 가깝다."(182)
이런 부분은, 얼마든지 우리 사회의 문제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 당장 미군기지 이전 계획으로 인해 땅을 잃고, 강제이주/강제전업의 위기에 놓인 평택 주민들을 떠올려 보라....
읽다만 <작은 것들의 신>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든다.
p.s 긴 머리가 미덕으로 여겨지는 나라에서 망설임없이 짧은 머리를 선택한 여자,
제대로 반항하고 제대로 저항하는 법을, 나도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