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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 이소선, 여든의 기억
오도엽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밤은 스스로의 내면으로 숨어드는 고요의 시간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소선의 밤은 그리운 사람, 가슴 아픈 사람들을 불러내 말 거는 시간이었다. 어찌 지내는지 묻기도 하고, 보고 싶다고 말하기도 하고, 미안하다 말하기도 했다. 그 밤에 그렇게 위안받아야 할 그 누군가에게 혼잣말처럼 되뇌인 이소선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면서, 내가 전령의 역할에 얼마나 충실했는가 되돌아본다 (13)
이소선 여든의 기억을 오도엽이 2년 동안 듣고 정리해서 풀어냈다.
대개 이런 책을 뭐라고 하나? 전기? 평전?
뭔가 어색하다. 그런 단어들로 규정짓기엔.
이 책은, 이소선의 오랜 기억과 작업 과정에 대한 오도엽의 기억이 서로 정겹게 오간다.
이제는 이소선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낼 수도 있을 오도엽이 마치 이소선이 말한 것처럼 이소선의 속내를 드러내보이기도 하고,
이소선의 목소리가 날 것으로 전달되기도 하며, 오도엽의 투덜거림이 함께 섞여 있기도 하다.
그래서 재미난 소설처럼 한 자리에서 죽 읽힌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기억-이야기에 오도엽의 기억-사랑방 야담이 적절히 안배된 책의 구성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회상 사이사이에 기존의 책들, <전태일 평전>이라거나 <청계, 내 청춘>의 일부가 인용되어 있는데 이런 방식도 좋았다. 하나의 목소리에 여러 가지 시선이 끼어들면서 개인사이자 모두의 역사인 이소선의 기억을 풍부하게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태일이가 눈을 뜨며 마지막으로 뭐라 한지 아냐?
"엄마, 배가 고프다....." (85)
전태일, 하면 떠오르는 건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였다.
죽기 전에 어머니 이소선에게 근로기준법을 가르치고,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빈 자리를 단단히 채워달라고 당부했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하지만 이제야 알았다. 그의 마지막 말이, '배가 고프다'였다는 걸.
"어머니 지팡이 사드릴까? 지팡이 짚고 다니면 영 수월해."
"썩을 놈, 니가 날 놀리냐. 내가 지팡이 짚고 다니려면 아예 밖에 나가지를 않는다."
이소선은 아직도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은 거다. '노동자의 어머니'라는 이름이 여든이 되어도 지팡이를 짚지 못하게 한다. (128)
"나야 태일이 죽은 뒤에 미쳐서 지금까지 이러고 살지만 남들이 어떻게 나처럼 평생 미쳐서 살겠냐. 하루든 몇 달이든 열심히 싸우고 살아온 게 어디냐. 내겐 정말 고맙고 고마운 사람이지. 난 누구도 원망하고 살지 않아야." (179)
원천 봉쇄한다 그라면 그냥 공장에 가지 않고 사흘만 한꺼번에 마음 합쳐 집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으면 돼. 그러면 잡아가지도 못하잖아. 노동자가 무냐.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들고 움직이는 게 노동자가 아니냐. 사흘만 멈춰 봐라. 다 이루어지지. (280)
그래서 태일이를 열사니 투사니 하지 말고 그냥 동지라고 불러 줬으면 해. 전태일 동지. 그게 맞지 않냐. 태일이는 지금도 노동자 여러분들과 함께 있는 동지라고, 제발 그렇게 불러 달라고 좀 써라. (287)
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야. 그냥 남들한테 물어보고 살았어. 물어보고 남들한테 배우고 살았어. 나는 참 잘 물어보는 사람이야. (288)
아무튼 모든 사람들 고맙습니다. 내 말은 이것뿐입니다. (10)
이소선의 기억은 한국근현대사에서 민중운동, 노동운동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역사 속에서 한 번도 게을렀던 적 없는 이 어르신이 가장 많이 꺼낸 말,
그래서 이 책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고맙다'는 말이다.
평생 가장 낮은 곳이 익숙하여 스스로 존엄해지는 분이 이소선 어머니라는 생각, 책을 읽다 보니 절로 든다.
엊그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팔순 잔치가 가장 큰 호사 아니었을까.
아직도 전태일이 만들어 준 앞뒷판 색깔 다른 내복을 입고 겨울을 나신다 하니...
정말이지 세상은 나 잘났다 하며 살면 안 된다.
거기서 차별이 시작된다.
차별이 죽기보다 싫어 차별 없는 세상 만들기에 평생을 바친 이소선 어머니처럼..
세상 모든 이들에게 고마워하며 살아야 한다.
읽다 보면 무슨 스파이 영화라도 보는 듯한 구절구절이 나온다.
그런 장면에서 이소선 어머니는 위트와 재치로 무장해 위기를 극복하는 멋진 주인공이 된다.
그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고, 오랜 세월에 조금씩 변형된 기억일 것이며, 여전히 사실일 것이다.
나는 웃으면서 울면서 믿는다. 기억과 사실의 상관관계가 진정성을 해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도,
모든 사람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