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뿌리
조세희 지음 / 열화당 / 1985년 9월
품절


첫번째 해에 내가 알아낸 것은, 지구라는 우리 별 사십억 인구 가운데서 일억의 어린이들이 밤마다 배고파 칭얼대다가 잠이 든다는 것이었다. 두번째 해에 깨달은 것은 일억의 두 배가 되는 이억의 어른들이 밤마다 배고파 뒤척이며 잠을 청한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날, 전우주에 알려진 지구라는 인류의 고향 별 어느 곳에서는 그 수가 밝혀지지 않은 어린이와 어른들이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었다.
세번째 해에 나는 사십억 가운데서 일억의 어린이와 이억의 어른들이 날마다 과식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
지구에서는 못 일어날 일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22-23쪽

정부와 기업은 국민에게 무거운 짐을 떠맡겼던 일, 국민에게 신세진 이야기는 결코 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것이 버릇이 되었다.-57쪽

우리는 눈물 맛을 잘 아는 민족이다. 이 세계에 눈물 맛을 우리 이상 잘 아는 민족은 또 없을 것이라는 생각, 다시 말해 한편의 작품에다 눈물이라는 말을 2백 번이나 집중해 쓰며 나는 다른 역사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었다. 어떤 어른들이 이 말을 들으면 펄쩍 뛸 지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우리에게 운다는 것처럼 쉽고 자연스러운 일은 또 없었다. 우리는 언제나 제일 쉬운 방법으로 비극에 대처했던 셈이다. ... 이 땅에서 살다 돌아간 어른들은 눈물로 자신을 표현해 왔다. 그러면서 왜 눈물로 '각성'할 수는 없었을까? ... 무엇이 우리의 각성을 방해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 무엇은, 앞으로도 우리의 각성을 방해할 것인가?-123-124쪽

낙원으로 80년대를 약속했던 사람들은 부자가 되어 어디로 숨었나. 그들이 아니었더라도 우리는 가난한 동포에게 매달 쌀 한 말과 보리쌀 반의 반 말이라는 구호양곡, 연탄값 4천언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잘 사는 나라처럼 빈민에게 매달 40여만원을 생활보조비로 지급해 줄 능력은 없어도 한 말의 쌀, 두 되 반의 보리쌀 그리고 연료대 4천원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줄 능력은 우리 민족도 갖고 있다. 전체의 생산이 설혹 낮았다고 하더라도 그 동안 물불 안 가리고 파괴한 가치가 그대로 있어 부족분은 그것이 메워 주었을 것이다.-134쪽

누구나 달라진 환경에서 살 수 있어야 한다. 저녁놀을 받고 있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기품있는 생활을 할 수 있게는 못 하더라도 양곡과 연탄의 지급량을 올리고 어느 정도의 영양가를 지닌 부식이 이따금이라도 좋으니 그 어른의 식탁에 올라가게는 해야 한다. ... 우리 시대의 희망이 한 쪽으로 몹시 기울어져 있는 일을 나는 슬퍼한다. 능력있는 사람, 많이 배운 사람, 독똑한 사람, 힘 센 사람, 많이 가진 사람, 적당하게 가진 사람들이 협력해 우리시대의 문제를 바로 짚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좋은 희망이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지금 당장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국민학교에 갓 입학한 어린이까지 아는 민주주의를 더이상 파괴하지 않으면서 고통받는 다수를 소수 쪽으로 옮겨놓는 일이다. 어려운 사람들의 생명이 지친 몸에 깃들어 있지 않게 하고도 다른 환경에 닿을 방법이 우리에게는 있을 것이다.-134쪽

야스퍼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다운 인간들 사이에는 연대감이 존재하기 때문에 개개인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된 일과 불의, 특히 그 앞에서 또는 그가 알고 있는 가운데 저질러지는 범죄 행위들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들을 저지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그 때 나는 그것들에 대한 책임을 같이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남의 말이다.
우리는 80년대에 또 어떤 진행을 맞게 될까? 당신은 아는가?-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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