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자는 변소 뒤에 쭈그려 앉아 날마다 질질 울었따. 시어머니의 심보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두릉골에서 그랬듯 일만 열심히 했다. 시어머니는 두릉골의 엄마들처럼 제 아들과 남편만 떠받들고 며느리는 도둑놈 취급이다. 시집오는 날, 엄마는 나더러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새 인생을 살라고 했다. 좋아진 세상도 없고 새 인생 따위도 없다. 좀 덜 힘든 날과 좀 더 힘든 날이 있을 뿐이다. 딸도, 며느리도, 엄마도 되어본 엄마가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왜 내게 그런 말을 했을까. 괜히 더 서럽게, 정말 그런 게 있을 지도 모른다고 헛된 기대만 잔뜩 하게.-60쪽
해방이 되어 일본군이 떠났다고 해서 사는 게 좋아진 건 아니었다. 그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많은 젊은이가 타지에서 죽었다. 해방 후엔 물건 값만 비싸지고 돈은 마르고 요령 좋은 모리배나 배를 불리고, 무슨 주의자들끼리 편을 갈라서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고 헐뜯기 바빴다. 밭 잘 일구고 곡식 잘 거두고, 그것들 제값에 팔고 가진 것 뺏기지 않고, 내 자식 내 부모 챙기듯 남의 자식 남의 부모 챙기면서 욕심 안 부리고 살면 남 미워할 일 뭐 있으며 편가를 일 어디 있나. 무슨 주의든 사람 무시하지 말고 때리지 말고, 빼앗지 말고 죽이지만 말았으면 좋겠다. 두자는 소문을 들을 때마다 생각했다. -72~3쪽
하지만 또 자기 시부모나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면 그게 뜻대로 안 되기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은 제 자식이 너무 아깝고 소중해서, 제 자식 아닌 것들은 모두 도둑놈에 잡것에 막 대해도 되는 물건 취급했으니까. 무언가가 너무 소중하고 대단해 보이면 그 외 다른 것은 모두 하찮게 보이나 보다. 나도 아이가 생기면 그리 될까. 장마로 불어난 개울을 보며 두자는 생각했다. 내 자식이 태어나면 오직 그놈만을 위해 내 평생을 몽땅 바치고, 누군가에겐 무뢰한에 마귀가 되어버릴까. -72~3쪽
국가나 이념 따위,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었다. 실체 없는 계절이라도 보이고 느껴지고 냄새가 다른데, 국가와 이념은 귀신과 똑같았다. 욕심 많고 원한 많고 부수기 좋아하는, 심보 고약한 애였다. 듣지도 보지도 못하면서 소리만 꽥꽥 질러대는 병신 도깨비 같은 거였다. -74쪽
세상이 바뀌어 이제 왕도 양반도 상놈도 없고 모두가 공평하다고들 말하지만 두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돈이 많으면 양반이고 없으면 상놈이었다. 윗사람들은 조금만 불리하다 싶으면 북한이 쳐들어 온다고 겁이나 주는데, 두자는 북한이 쳐들어오는 것보다 물건 값이 턱없이 비싸지고 흉년이 들고 썩은 감자가 튀어나오고 쌀보리가 동나는 게 더 무서웠다. 전쟁 때도, 총에 맞아 죽는 것보다 길바닥에서 굶어 죽을까 봐 더 무서웠다. 가난은 전쟁 전에도, 중에도, 후에도 언제나 본격적이었다. 살아 있는 게 반갑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죽고 싶지도 않았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원치 않는 상태. 오늘도 살았으니 내일도 살겠지. 눈뜨면 일할 것이고 배고프면 먹겠지.-117쪽
자들, 누구 씨여? 아무 뜻 없이, 두자를 비난할 어떤 의도도 없이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 같았다. 혹은, 밥은 먹었나?라는 말처럼, 그저 할 말이 없어서, 하지만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서, 별 의미 없고 아무 색깔 없지만 가장 진한 농도를 갖는 평범한 물음들처럼. 꽃씨요. 두자가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내며 대꾸했다. 들에서 젤로 예쁜 꽃만 따다가 씨 털어 먹고 맹근 애들이요. 두자의 말엔 웃음도 농담도 묻어 있지 않았다.-124~5쪽
태철과 결혼하고 쫓겨나고 공장 일을 하고, 쌍둥이를 낳고 후처로 들어가는 모든 과정이 그랬다. 길이 나는 대로 걸었다. 걷지 않고 머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랬다간 굶어 죽을 게 뻔하니까. 가난을 피해 달리고 달렸지만, 결국엔 가난이 만든 길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150~1쪽
같이 밥만 먹었을 뿐인데, 만나서 해야 할 일을 다한 느낌이었다. -158쪽
좋은 사람 되는 것보다 나쁜 사람 되는 데 더 많은 용기와 외로움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지. 내가 나쁜 년 해보니까 그거 하난 알겠더라. 안 그래? 다들 착한 척만 하면 나쁜 말은 누가 해? 누가 화내고 누가 야단치고 누가 관계를 끝장내지? 엄마는 늘 나빴어. 난 엄마 이해 안 해. 그래 난 썩을 년에 미친년이야. 나쁜 년. 헤픈 년이야. 나는 엄마 따위 절대 안 해. 자식새끼 있어 뭐해. 그딴 거 있어봤자 고생밖에 더 해? 이러나저러나 듣는 건 원망뿐이지...... 에이씨. 지랄맞게 보고 싶네. 엄마, 수선이, 우리 엄마.-237쪽
절대 좋아지는 법 없이 어제보다 오늘 더 어렵고, 오르고, 좁아지는 것. 그게 세상이었다. -279쪽
선생님한테 맞는 건 누구한테나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또래에게 맞는 건,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거니까. 아는 척하는 순간 책임감과 죄책감을 동시에 가져야 하니까. -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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