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애인을 다시 만나서는 그녀가 그토록 예뻤을 줄이야 미처 몰랐다며 속으로 후회를 삼키는 일은 영화에나 나오는 판타지일 뿐이라는 게 평소 성진의 지론이었다. 그간 사랑했던 여자들을 그는 여전히 사랑하고, 또 그런 식으로 영원히 사랑할 테지만 그건 '다시' 사랑하는 일은 없으리라는 뜻이었다. 그거너 한번 우려낸 국화차에 다시 뜨거운 물을 붓는 짓이나 마찬가지니까. 아무리 기다려봐야 처음의 차맛은 우러나지 않는다. 뜨거운 물은 새로 꺼낸 차에다만. 그게 인생의 모든 차를 맛있게 음미하는 방법이다. 마찬가지였다. 봄날의 거리에서 재회하니 그런 식으로 정연은 예뻤다. 그에게 예뻤던 여자들은 여전히 예쁘고, 또 그런 식으로 영원히 예쁘겠지만 '다시' 예쁠 수는 없었다. -18~19쪽
"도통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집에 있던 니체며 지드며 다 찢고 불태우고 했던 사람이. 책은 내가 잘 모르겠고, 암튼 그 사람, 매사에 그런 식이었지. 집에 전화하니 너를 데리고 내려왔다기에 허겁지겁 경주에서 돌아오니까 이미 떠나고 없었다고. 그걸로 끝이었어. 하지만 그 사람이라고 있었던 일을 너한테 죄다 말했을 리는 없을 테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뭐 그런 거야. 할말은 많지만, 그냥 그걸로 끝이었어, 라고 말할 수밖ㅇ 없어. 이제 아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지"
윤경이 단호하게 말했다.
할말은 많지만, 그냥 그걸로 끝이었어, 라고 말할 뿐인 일은 영범에게도 있었다. -223쪽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뿐이리라. 한 번뿐인 인생 앞에서 도덕은 무엇이며, 또 윤리란 무엇일까? 영범에게는 늘 그런 의문이 있었다. 열네 살 때부터 그는 자신의 친모란 자기 하고 싶은 걸 하느라 남편은 물론이거니와 아들까지 저버린 낯두꺼운 여자라는 말을 줄기차게 들으면서 자랐다.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영범은 오물을 뒤집어쓴 듯한 불쾌감을 느꼈으나, 그걸 알아차리는 친가의 어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타인에 대한 배려에 관한 한, 그들은 그들이 욕하던 윤경만큼이나 무책임했다. 그러니 그런 의문이란 그 무책임한, 마치 검은 폐수와도 같은 말들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한 것일지도 몰랐다. 이게 하나뿐인 인생이라면 한 사람의 선택보다 더 무거운 도덕이나 윤리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영범은 생각했다. 어처구니없는 선택으로 원치도 않았던 삶을 살았다면, 그것으로 그는 이미 자기 인생 앞에서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것인데, 거기다 대고 다시 뭐라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주석에 주석을 다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224~225쪽
어쩌다 이런 구석까지 찾아왔대도 그게 둘이서 걸어온 길이라면 절대로 헛된 시간일 수 없는 것이라오. -28쪽
행복은 자주 우리 바깥에 존재한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고통은 우리 안에만 존재한다. 우리가 그걸 공처럼 가지고 노는 일은, 그러므로 절대로 불가능하다.-302쪽
이야기는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함께 경험한다는 뜻이다.-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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