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문명인들은 박애정신이 투철하다. 이 모두는 항상 법을 준수하고 범죄나 부정을 증오하며, 특히 정의를 관철하여야 한다는 최선의 목표를 이상향으로 미래를 꾸려 나아가는 (광범위한) 공동체라 할 수도 있다. 때문에 이들의 일원인 '나' 역시도 선과 정의에 대한 나름의 명확한 인식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때때로 그 정의는 현실 속 이모저모의 과정 속에서, 잠시나마 뒷전으로 밀려나는 일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책 역시 '야만'에 대한 그 나름의 과정과 형성 그리고 설득을 품는 내용을 지니고 있다. 비록 한낮 짐승들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인 '나'의 입장에서는 그 주인공 뿐만이 아닌 인간 본연의 모습 또한 "혹시 이 이야기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일종의 위기 의식의 메시지가 깊이 받아들여진다.
각설하고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개 '벅'은 남쪽지방 판사의 애완견으로서, 그야말로 문명 속에서 길들여졌다. 그러나 결국 무뢰한들에게 납치되고, 팔려가고, 혹독한 환경 속에서의 썰매견으로서 노동을 강요당해가는 과정 속에서, 벅은 예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야생동물로서의 '본능'을 되찾고 또 그것을 발판삼아 어느 무리를 이끄는 리더로서 우뚝서게 된다.
이처럼 벅이 살아가는 과정은 어쩌면 '적응'으로 이해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것이 분명하다. 애초에 (주인)판사의 손에서 귀여움과 온갖편의를 제공받는 입장에 있어서, 벅은 그저 체격과 풍체가 남다른 대형견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후 그가 마주한 환경과 '의무'를 겪으면서 그는 타고난 투견이자, 눈여겨볼 썰매견들의 리더, 그리고 사납고 영리하며 위협적인 짐승으로서 떠올려지는 존재가 되어간다. 이에 결국 그가 야성에 눈을 뜨게 된 원인을 찾아보자면 그 무엇이 있을까? 이에 안타깝게도 책 속에서 주인공 스스로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사연과 과정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아니! 혹여 벅이 겪었던 모든 과정이 '어느 인간'이 겪은 과정이라면? 반대로 그 사연과 과정이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이 분명하지만, 저자는 모든이는 환경에 순응하고, 복종하며, 그에 걸맞는 조건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나름의 주장을 담담히 드러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