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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의 눈 - 제6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10월
평점 :
고요한 밤의 눈 (박주영, 다산책방, 20161102)
힘든 노동과 갖가지 정신적 스트레스로 잠시나마 탈출구로 삼아보고자 하여 스파이 소설을 선택했는데 그것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007스파이 소설이 아니라서 기대를 배신당하게 하는 소설이다. 또한 소설을 읽어나가기가 다소 무겁고 어려워 책갈피가 쉬이 넘어가는 법이 없다. 어려운 용어나 철학적이라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너무나 사변적이고 고뇌에 차게 만드는 문장으로 인하여 생각을 곱씹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현 체제의 모순이나 부조리에 너무 쉽게 눈감고, 갈수록 수탈구조가 치열해지고 교묘해지는 구조적 모순 덩어리인 이 사회에서 양식도 양심도 점차 잃어가는 현대인들에 대하여 경고하는 것으로 이 소설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 같다. 『가장 덜 양심적이고 덜 진지한 사람들이 성공하는 사회는 잘못되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리가 속한 세상이 틀렸다고 느끼면서도 더 이상 싸우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누군가는 먹고 살기 바빠서, 누군가는 더 잘 먹고 더 잘살기 위해서. 다만 지켜보고 기다리다가 결국에는 사회뿐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도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고 그냥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기를 바라게 되고 만다. 그녀는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겠지만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그래서 가끔은 바꿀 수 있다고 희망했다가 또 좌절하고 마는, 더 양심적이고 더 진지한 사람들. (46p)』
이런 소설을 모자이크 소설이라고 분류하는 것 같은데 엄밀한 의미에서 맞는지 애매하고 요즘 신진 작가들이 틀을 깨는 시도가 너무 좋고, 신선하고, 고뇌하게 만든다. 다양한 스파이가 등장하여 각자 1인칭 작가 시점으로 사건을 전개하는 것이 특이하다. 작가는 조지 오웰의 “1984”를 뛰어 넘는 감시 사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현대 사회의 절망과 고독을 이 소설의 근저에 깔고 있다고 보인다.
『언니는 사람들의 기억이 사라지고 양심이 사라지고 그러다가 사람들이 사라지기도 한다고 했다.(66p) 언니와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불신을 물려받았다. 우리 부모님과 그 친구들은 이 사회의 지도층을 믿지 않았고 전게계적 상품을 신뢰하지 않았고 전자본주의적 가치를 증오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우리가 또 물려받은 것이 있다. 소수의 가치, 취향, 신념 같은 것들 -- 그리고 그것들을 위해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도. 부모님과 우리가 다른 것은 우리에게는 그런 신념, 가치, 취향을 나누고 함께 싸울 공동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67p)
이제 그는 자신이 스파이였다고 믿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그런 삶을 살아왔고 그 삶이 자신에게 주어진 전부라는 것을 믿으면 이 삶은 아무런 문제도 없어진다. 누군가 시키는 대로 왜라는 질문 없이도 살아가게 된다. 원래부터 사람은, 혹은 세상은 그렇다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이 그렇게 믿는 한 그것만이 진실이다. 예외는 존재하지 않고 변화는 있을 수 없고, 세상은 늘 그렇다. 강자는 강자로 태어나고, 약자는 약자로 살아갈 뿐이다. 이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믿게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현실은 주관적이다. 더 좋은 세상을 꿈꾸면 만들 수도 있다. 우리의 목표는 그들이 그들의 세상을 꿈꾸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임무수행이다. (126p)
변호사, 회계사, 법학자, 경제학자 -- 그들의 작업은 너무나 전문적이어서 일반인은 이해하기도 어렵다. 교묘하게 법망을 이용한 합법이지만 불법보다 더 나쁜 일, 공적 자금으로 자신들이 관여한 사업에 투자하고 대규모 국가사업을 획책하고 그 사업의 부정적인 면을 긍정적인 면으로 포장하기에 우라는 그들을 마법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X는 그런 마법사, 날렵한 킬러가 될 것이다. 그는 경제 킬러다. 회사를 현대화하고, 기록적인 시간에 수익을 내고, 종업원의 절반을 내쫓는 차가운 심장을 가진 구조조정 전문가. 그들은 말한다. 혁명적일 정도로 경쟁이 치열한 오늘날 세상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이윤 추구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고, 회사가 필요로 하는 목표를 달성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고용이 결정되는 것이라고. 구조조정을 하고 이윤을 창출하면서 당신들의 일부에게라도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이 기업 자체가 사라져서 아무도 더는 일할 수 없는 것이 나은지를 선택하라고 한다. 일부라도 살아남아 다시 전체를 살리느냐, 아니면 지금 전부 모두 죽느냐의 선택은 이미 선택이 아니다. 비인간적인 기술과 무자비한 시장이 결정하고 인간들은 어쩔 수 없이 따를 뿐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 일부의 생존마저 위태로워지고, 극소수가 전체의 이익을 독점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다. 그들이 킬러인 이유는 의뢰인의 이익만 보호하고 그 명령만 지키기 때문이다. 비록 전체, 혹은 미래를 볼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특정 순간에 진실을 위장하는 것, 그것이 스파이의 기본이다.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가 지나간 자리에 더 많은 죽음이 존재한다.(128p)
고용불안과 승자독식의 세계 주위에서 사회의 맨 밑바닥을 지탱하고 있는 이십대 젊은지들의 사회적 연령이 낮아지고 있고 민주주의에 대한 감수성도 떨어진다는 보고서가 계속 있었다.(164p)
이 세상을 믿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아무 준비도 없이 버튼 하나로 죽을 수도 있다. 프랜차이즈 매장이 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없는 곳이 없는 줄 아나? 그곳에는 음성탐지기, CCTV가 있으며 얼굴 인식과 단어 감식을 한다. 불평분자로 찍히면 언제든 죽을 수 있다. 아무도 그 죽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매일매일 사람들이 그렇게 죽으니까.(184p)
기억을 잃은 건 당신뿐만이 아니에요. 우리는 사는데 필요하지 않은 기억들을 지우면서 삽니다. 어쩌면 당신의 기억상실은 우리들의 집단 기억상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릅니다. 아주 많은 것들을 잊어버립니다. 문제는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서 지워지는 기억들입니다. 우리가 잊어버리면 잊어버릴수록 유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못하면 어떻게든 잊게 만들려고 하겠죠.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것 신경 쓸 때냐, 네 할 일이나 똑바로 해라. 어차피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기 위해 일생을 분투한답니다.(186p) 』
고독하고 절망하는 소설 속 주인공들은 그러면서도 희망과 믿음 그리고 혁명을 꿈꾸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젊었을 때 세상은 믿음으로 가득하다고 생각했지. 프롤레타리아가 결국에는 승리하리라는 믿음, 기계문명이 인간을 편안하게 살게 하리라는 믿음,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구원하리라는 인간주의에 대한 믿음 -- 우리는 모두 믿음과 신념의 인간이었지. 한 인간을 지탱하는 것은 때로 지극히 단순한 믿음이다.(251p)
역사가 승자들에 의해 쓰여 지는 건 상식입니다. 승자는 누구입니까? 야만적인 살인자들, 미친 왕들, 탐욕스러운 반역자들, 폭력적인 전쟁광들, 아마도 우리 역사의 대부분은 그 승자들이 조작하고 편집하고 날조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패자는 무엇을 쓸까요? 패자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남길까요? 승자들이 인멸한 증거를 상상력으로 극복하고, 이야기를 전달하고 유포시키겠죠. 최고의 이야기에는 진실이 담겨 있는 법입니다. 멈추지 마십시오.(282p)
소설가의 컴퓨터를 실시간 감시하고 있다. 위험 단어가 등장했다.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에게서 사용되지 않았던 단어. 역사책에나 등장해서 읽히는 단어. 아주 멀고 불가능한 단어. 누군가는 희망을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위험을 감지하는 단어. 혁명 - - . 그들에게 책을 읽을 여유조차 없는 삶, 시간에 쫓기고 돈 앞에 망설이는 삶을 살게 하는 이유는 상상을 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눈앞만 바라보고, 내일만 생각하고 심지어 오늘이 가장 걱정인 삶. 그래야 생각을 할 시간이 없다. 그들의 가장 큰 무기는 사색이다. 사색은 시간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모여서 내면에 관한 대화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고작 나눌 수 있는 대화는 매달의 카드대급과 아파트 대출금, 미래에 대한 건 돈 걱정뿐이어야 한다. 더 깊이 고민하는 건 절대 불가능해야 한다. 이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밖에 살 수 없나. 생각하고 생각하면 위험해진다. 그래서 시위는 1인까지이다. 인간이란 두 사람이 모이면 대화를 하고 세 사람이 모이면 논쟁을 하고 네 사람이 모이면 토론을 하는 존재들이다. 그렇게 해서 다섯 사람이 모이고 여섯 사람이 모이고, 모이고, 모이면 결국에는 해결책이 나온다”(145p)
고요한 밤의 눈처럼 아침이 오면 알게 되는 달라진 세상이 있다고. 기꺼이 패자가 되어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 --- 패자의 서는 정해져 있는 책이 아니다. 이미 쓰여져 있는 책이 아니다. 어떤 책이 패자의 서가 될지 모른다. 패자의 서는 앞으로 쓰여질 책, 우리 모두가 쓰게 될 책이다.(310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