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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한국은 - 우리의 절망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박성호 지음 / 로고폴리스 / 2015년 12월
평점 :
어쩌다 한국은(박성호) - 우리의 절망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어쩌다 한국은” 이란 제목 자체의 어투가 참 비관적이며, 부제 “우리의 절망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역시 더 절망적인 현실을 책 전체에서 설파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노동, 역사, 정치, 언론, 종교, 교육, 국방, 미래로 나누어진 8가지의 주제와 그것을 부연 설명하는 절망의 산출물들(우리의 일자리는 어디로 사라지는가, 갈등의 뿌리, 반복되는 역사의 모순들, 권력욕이 망가뜨린 헌정 질서, 조폭 언론의 날개 없는 추락, 양심을 버리고 권력을 택하다, 돈과 권력의 인질이 된 학교, 우리가 자주 국방이 안 되는 이유,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을 보면 처음 이 작가를 접하는 독자는 분명 지독한 좌빨 아니면 이건 뭐지 하는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작가 스스로 제너럴리스트라고 하는 것이 무색하게 어느 누구보다 깊이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 대한 고민과 그 해법을 성찰해 오지 않았나 생각하며, 결국 책속에 녹아 있는 내용은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따뜻한 미래를 꿈꾸며 그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독자들이 품어왔던 여러 사회적 의문들에 대하여 나름 고민스러운 해결책도 제시해준 점에 대해서 높게 생각한다.
1강 노동에서 인류의 역사는 곧 노동환경 변화의 역사이며, 노동환경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기술의 발전이라고 한다. 기술이 발전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기술 발전에서 비롯된 불공평한 분배 구조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러다이트 운동과 차티스트 운동이 일조했다는 측면에서 역사적 의미를 찾고 있다. 또한 기술이 끊임없이 발전하는 이유를 공동체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에 도움이 되고,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善이 되는 인간 본성의 문제로 설명하는 부문은 설득력이 있다고 보여 진다. 또한 IT기술의 발전이 공유경제 등 아주 많은 부분을 변화시킬 것이며, 기술 발전으로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일자리가 줄어들면 사민주의가 붕괴하게 되고, 생산성 효과(잉여이익)를 자본가들이 결코 노동자들에게 나눠주지 않기 때문에 얼마안가 자본주의 붕괴를 초래할 지도 모를만큼 심각하다고 하면서 그 대안으로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있다.
2강 역사에서 사회적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점점 더 누적되면 언젠가는 어떤 형태로든 터져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 결과가 바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극단적인 의견 대립과 도저히 통합될 수 없는 집단 간의 견해차라는 무서운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 사회에서 서로 동의할 수 있는 의사소통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정적으로는 동의되지 않아도 강제적으로라도 서로 양보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시스템 또한 그 시스템은 쉽진 않겠지만,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시스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3강 정치에서 그 모든 엉터리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제대로 된 정치’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고, 정치는 다름 아닌 사회적 의사결정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시스템 자체가 아니라, 지금보다 조금 더 민주주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바로 그 과정이라는 것이다. 위헌으로 판결난 소선거구제에 대한 대안으로 스웨덴의 선거제도에 대한 생각도 해보고, 노무현 전대통령이 대연정을 제안하게 된 숨겨진 이야기를 읽고 또 다른 편파적이고 고루했던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4강 언론에서는 유권자들이 투표소에 들어가기 전 투표를 위해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언론이며, 민주공화국에서 그러니까 사회공동체의 의사결정권이 국민에게 주어졌을 때 그 의사결정권을 정상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주는 것이 언론의 책임이자 역할이라는 것이다. 사회의 개혁이나 진보를 바라는 사람들의 생각보다 사회의 변화 속도가 더 빠르다는 것이며, 하나의 상대를 놓고 막 싸우다 보면, 어느새 상대가 달라져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언론은 권력과 싸울 생각도, 자본과 싸울 생각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신들의 생존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 것이라고 한다. 뉴미디어의 대안으로서 정파성을 떠나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콘텐츠를 알아보고, 그 콘텐츠를 소비하면서 대가를 지불할 만한 소비자를 연결할 수 있는 소규모 집단을 만들자는 것이다.
5강 종교에서 종교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사회, 권력과 타협한 주류 개신교, 반공의 옷을 입은 교회, 돈 모으는 법을 배운 교회, 스스로 권력이 된 교회를 얘기하면서 대안을 제시하기 보다는 스스로 점차 쇠퇴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고 있다.
6강 교육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학부모로써 많이 공감했던 부분이다. 전교조가 왜 몰락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 부분은 설득력이 있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사회를 바꾸기 위한 운동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바뀌기를 바라는 진보 개혁 세력, 사회 변화 운동 세력, 시민운동 단체 사람들이 뭔가 매너리즘에 빠져서 하던 대로만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심지어 어떤 분야에서는 아직도 80년대 운동권 용어를 그대로 쓰고 있고, 운동 방식도 똑 같다는 것이다. 뭔가 젊은 층의 눈으로 볼 필요가 있고, 그 동안 사회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똑바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 변화에 게을렀다는 것이다.
7강 국방에서 나온 북한과 핵무기, 전시작전권 환수, 모병제 등의 문제는 익히 잘 알고 있는 내용의 수준을 벗어나지 않지만 그래도 군대,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얘기하고 있다.
8강 미래에서 작가가 결국 얘기하고자 하는 내용이자 희망의 노래가 있다고 본다. 공유경제, 대가가 지불되지 않는 노동에서는 기술의 발전이 이렇게도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겠구나 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많은 사회에서 민주공화국이라는 시스템이 꽤 넓게 퍼지면서 시스템으로 부가 독점되는 상황을 막을 수 있다는 살아 있는 역사적 증거를 보여주었듯이, 이젠 무력이 아닌 자본이 부를 독점하는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을 품어보며, 플랫폼 서비스를 누가 어떻게 만들고 유통시키느냐에 따라서 공유경제의 낙관적 전망을 품을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기술 발전의 여파로 공유 경제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하는 작가의 예상과 달리 아마 그 길은 아직도 멀고도 먼 길일 것이다. 아직은 자본의 힘이 너무나 강렬한 맹위를 떨치고 있고, 이에 동조하는 인간의 본성이 제어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프랑스 혁명 당시에 파리에서 싸우다가 죽어간 사람의 1만배가 되어도 쉽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