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의 부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7
잭 런던 지음, 임종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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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의 변질

야성의 부름

잭 런던/임종기

문예출판사

 

 



책 처음에 등장하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관습의 사슬에 분노하자,” 어쩐지 굉장히 진취적인 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벅이란 개가 고급스럽고 편안한 삶 속에서 벗어나 죽음과 맞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함으로 진정한 야성에 도달한다는 『야성의 부름』은 단숨에 읽힐 수 있을 정도로 속도감이 있다. 물론 분량이 많은 편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알랭 로그브리예의『질투』같은 소설이 이와 반대되기 때문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절대 분량과 속도는 비례한다고 말할 수 없다.

책 표지에 ‘미국 대학위원회 SAT 추천도서’라는 자랑스러워 보이는 문구는 여전히 젊은이들의 사고를 독려하는 진취적인 소설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책의 분량의 반 이상을 넘기고 나서야 착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흔히들 이야기 하는 ‘짧고 굵게’라는 모토의 인생들을 추구하는 이들을 보면 그것이 변질되어 받아드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시절을 꽃피우고 급속하게 추락하는 인생’보다는 ‘짧은 인생이니 즐기자’라는 뜻으로 많이 받아드려진다. 생의 안주한 삶은 잭 런던에게는 평생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다. 열정에 반비례하는 조건들이 그의 인생을 끊임없이 뒤흔들었던 것이 바로 그럴 것이다. 가난이 가져다주는 절망 속에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뭐든 다 했을 것이다.

멈추지 않는 가난의 추격을 피해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떠났던 알래스카의 금광의 꿈은 병과 상처만 얻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때 경험이 잭 런던의 『야성의 부름』을 쓸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그의 삶은 줄곧 그런 식이었던 것 같다. 멈출 수 없는 노동의 고통이 생으로 전환되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이 바로 그가 가슴 속에 불태운 야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그 야성을 향해 달려가는 ‘벅’이란 개에게 초점이 맞춰 있다. 타고한 혈통과 신체는 흡사 큰 늑대를 닮았지만 그는 평생 경험하기 힘든 환경 속에서 자신의 타고난 재능과 인내, 본능을 극한으로 만들어 낸다. 생과 사의 기로에 놓여 저울질하는 속에 수 없이 많은 주인들 틈에서 많은 것을 깨닫는다. 빨간 스웨터의 사나이가 가르쳐 준 몽둥이의 법칙부터 그의 목숨을 언제나 위협했던 스피츠의 엄니까지 말이다. 그가 자신의 본성을 찾아가는 동안, 완전한 야성으로 빠져드는 모습은 흡사 짐승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주인이 인디언들의 습격으로 무참히 죽었을 때 벅은 한 마리 야수로, 늑대들의 우두머리로 인디언들의 목숨을 앗아간다. 철저한 생과 사의 갈림길은 강자를 통해, 좀 더 강한 인성을 통해서만 살아남는 다는 것을 이 소설은 너무나 많이 강조한다. 자신의 긍지를 위해 썰매를 끌었던 수많은 개들 또한 진취적인 운명으로 타고나지 못했기 때문에 순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장면에서 잭 런던이 추구한 사회주의적인 오류가 눈에 들어왔다. 벅이 꿈을 통해 만나는 유인원의 모습 속에, 오직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원숭이같은 인간의 모습은 작가가 추구하는 다윈의 진화론적인 접근에 의해 이루어진다. 결국 벅만이 강자로 군림하는 모습 또한 이와 같은 것인데 바로 그것은 강하고 환경에 적응하는 최고의 유전자만이 살아남고 그 환경을 통해 그 모양들이 바뀐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사슬 속에 자기 배를 두드리며 거만에 빠진 많은 기득권들에 대한 강한 반발심으로 그들을 꾸짖는 소설을 많이 썼다는 잭 런던이지만 그는 작가의 명성이 가져다 준 물질을 방탕하게 날리고 마약에 취해 살았다. 겨우 40세의 나이에 죽는 운명을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과연 그의 삶이 올바른 것인가? 그가 부르짖던 야성에 다가가는 삶이었는가? 나는 현실적 도피를 꿈꾸다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삶은 자신이 소설 속에서 강조했던 ‘짧고 굵게’ 의 변질적 모습이 아니었는가 한다. 예술가는 흔히들 그 모습의 광기를 품어야 한다는 낡은 생각은 버려야 한다. 올바른 길에서 뻗는 것만이 많은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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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학
아리스토텔레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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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학』

아리스토텔레스/천병희 옮김

문예출판사







  문학 이론에 대해 조금이라도 접근해 본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에서 ‘카타르시스’를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가 종소리를 듣고 침샘에서 침을 가득 분비해낸 것처럼 조건반사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사실 나조차도 그렇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문예출판사에서 출간한 『시학』은 제법 기대가 되었다. 일단 국내에서 그리스, 라틴 문학의 대가이신 천병희님의 이름을 볼 수 있었다는 것과 아리스토텔레스 뿐 아니라, 호라티우스, 플라톤이 지니고 있는 시에 대한 이론과 생각을 같이 볼 수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서 아직 지은이의 이름이 단지 롱기누스라는 사실만 알 수 있는『숭고에 관하여』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법 알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예출판사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책을 하드커버로 선택해 만들었다.

  벌써 3년이라는 시간동안 라틴어를 공부하며(사실 너무 불성실하게 스터디에 참가해 그 수준은 초급자에도 못 미친다) 너무나 친숙한 호라티우스에 대한 일화들과 『일리아드』,『 오딧세우스』 같은 당대의 수준 높은 작품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고 깊게 파고들만한 것도 없지만 뛰어난 운율로 이루어지는 이야기는 시간을 빼앗기에는 충분한 역할을 했다. 그 덕에 천병희님이 번역한 서적을 접할 수 있었고 그 분이 원전에 충실하고 친절한 각주를 다루시는 것에 대해 독자로서 장인에 대한 감명을 받았었다.

  

  책의 처음에 등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서사시와, 비극, 희극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통해 어떻게 좋은 작품으로 치닫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이론서적인 성향을 띄고 있다. 당시의 글들이 운율 형태로 쓰인 이야기임으로 지금 우리가 떠올리는 시 뿐만 아니라 연극으로 발표되는 공연들의 대본 또한 모두 시라고 평가되었다.

  그의 글의 장점이란 당시에 현저히 많이 쓰인 모든 작품들을 충분히 읽고 난 후에 만들어져 이론에 대한 충분한 받침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예로 들은 좋은 작품들, 특히나 비극이 가져야 할 성격에 대해 그는 주인공이 취해야 할 올바른 행위에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글을 쓰는 창작자인 독자들에게 참으로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는데 다만 아쉬운 것은 당시의 모든 이야기꾼들이 참고했던 아리스토텔레스『시학』은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글들과는 사뭇 다른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신화들의 이야기 중 하나를 차용하여 그것을 창작의 입담으로 개작하여 살리되 뿌리를 망치지 않는 작품들이였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의 작품은 연극을 상영으로 목적을 뒀던 것으로 지금의 대본에 가깝기 때문에 운율을 살리지 않고 글을 쓰는 지금의 소설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이야기들에서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던 것들은 플롯에 대한 이야기였다. 단순과 복잡의 구성과 비극적 감정을 증폭시키기 위한 플롯에 대한 이야기 등은 재미 이상의 무엇을 얻을 수 있었다.

  호라티우스의『시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는 어떤 기술적인 부분보다는 창작자들이 취해야 할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기술적인 것을 배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각 장의 내용을 알려주는 목차를 보면 기술적인 이야기들을 제목으로 하고 있다. 드라마에 대한 특징이라던가, 연령별 성격파악, 소재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들, 음악에 대한 주의 사항 등. 그러나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그는 시인이 지녀야 할 여러 덕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부와 명예욕에 예술의 혼을 포기하고 쾌락적인 글쓰기로 상영되는 작품들을 만드는 시인들은 결국 관객을 떠나가게 하고 모독하는 광기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인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호라티우스의 『시학』은 같이 실린 다른 작품들에 비해 그 내용이 짧았지만 개인적으로 잘 읽히고 도움이 되었다.

  그 뒤에 엮인 이야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플라톤의 『국가』의 일부분을 발췌한 것으로 그가 지니고 있는 시인들에 대한 견해와 작품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다. 절대 이성을 중시한 플라톤은 미술가, 시인같은 예술가들을 현실세계에 대한 모방범으로 간주하고 그들이 어떻게 이성을 흔들고 망치는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는 모방이란 진리로부터 3단계나 떨어진 것으로 간주해 물건을 만드는 장인들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혹시키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 호메로스의 주옥같은 작품들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면서도 우리는 시의 주인공들이 가진 격정적인 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아름다고 건실한 마음으로 국가를 이롭게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모방’이란 단어는 앞서 이야기 한바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사용하고 있어 그가 플라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가 인간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나쁜 작품들에 대해 꾸짖는 점에서 예술에 대한 완성도의 평가자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롱기누스의 『숭고에 관하여』는 가장 큰 분량을 차지하는 작품으로 당대의 많은 학자들과 시인들의 작품을 다루면서 그들의 사상과 생각들을 비교한다. 그는 작품을 씀에 있어서 필요한 기술적인 것들을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나는 곧 지루해지는 상황에 빠지고 말았기 때문에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시학』이 가져다주는 기쁨이란 앞 선 시대에 대한 흐름과 교훈을 현대의 것과 비교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귀한 것이다. 역사는 그 틀에서 조금씩 틀어질 뿐 반복된다는 말처럼 지금 우리의 모습도 부와 명예를 위해 행위를 하는 많은 예술가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서 우리 스스로가 반성하는 계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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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르카 시 선집 을유세계문학전집 15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지음, 민용태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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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

로르카 시 선집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민용태 옮김

을유세계문학전집

  

시는 한(恨)이다. 즐거움과 유희 속에서, 산산이 조각나는 이야기 속에서, 시대의 흐름 속에서 마치 붕괴되어지는 문학들 틈에서도 자생력 강한 한 줄기 잡풀처럼 자라난다. 갈라진 돌 틈에 뿌리내려 언제 왔다 사라지는지 모르는 그런 이야기들이 떠돌 듯 훑고 지나간다. 시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나의 호흡에서 자생되는 글자와 글자들이 허공에 맴돌았다. 어둔 새벽 연습장에 쉬 없이 휘갈기던 이야기들이 미명을 깨우는 참새들의 지저귐 소리에 하루살이처럼 호흡을 멈췄다. 내겐 분노는 존재했지만 한은 없었다. 운율보다 이야기가 그리웠다. 여러 권의 시집을 넘기며 보내던 시간들이 너무 아득하게 멀리 있는 것 같다. 파블로 네루다의 유명한 시 몇 개를 읽다가 금세 흥미를 잃어버리고는 백석같은 시인들의 시 전집을 떠들던 하루들.

휴가를 받고 의정부로 나와 인천행 지하철을 타고 가는 두 시간 남짓의 시간동안 서점에서 손에 잡힌 시집을 사들고 읽는다. 인기 많은 중년의 소설가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마치 소설은 쓰는 자신은 순수의 영역인 시를 쓸 수 없다고 이야기꾼이기 때문에 안 될 거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시집 한 권을 출간했다.

술이 위장을 휩쓸고 지났던 밤들, 시에 재능을 보이는 선배들을 따라 술잔을 기울인다. 곧 시간이 지나면 진짜 손에 들던 술잔이 기울어진다. 희미해지는 정신에 울분이 글에 생명을 준다고 했다. “……아마 나는 안 될 거야.” 밤보다 더 밝은 네온사인을 뒤로하며 새벽길을 걷는 나는 나직이 중얼거린다.



시가 오랜만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게 시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문학이 주는, 죽지 않기 위해 쓸 수밖에 없는 뼛속까지 글쟁이들인 사람들의 고백에 아마 나는 글쟁이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글이 더 이상 감성이 주는 유희가 아님을, 분석과 만들어지는, 다듬어지는 허구의 이야기임을 점점 알아가면서 나는 시를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로르카의 시 선집』을 손에 들고 반쯤은 한숨이 나온다. 겉으로는 아니다. 속으로 깊게 내쉰 것이다. 백년이 가까운 시간 전에 스페인출신의 인기 작가의 것이다. 시인이자 연극 연출도 했다. 자유로운 영혼, 아나키스트적인 성향을 가진 작가는 자유와 영혼, 사랑과 죽음을 노래한다. 그 당시의 시인들, 작가들이 그렇듯 대부분 높은 학력을 자랑하는 로르카는 뉴욕을 돈다. 자본주의 속에서 그가 받은 영감들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다. 잡풀이 넓게 펼쳐진 길을 떠도는 집시들, 그들 속에 간직했던 주술적인 힘의 미신들처럼, 안달루시아- 한(恨)의 신이 그의 시들 안에 들어있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에 사람들은 감탄에 빠진다. 소통의 장애. 무엇이든 명확하게 파악해야 하는 것이 나의 임무였던가! 나의 호흡은 가빠졌다. 더 이상 페이지를 넘기는 손은 무의미했다.

누구에겐 너무 아름다운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겐 백 원짜리 동전보다 가치 없을 때가 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의 소중함을 그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던 것일까? 문화의 틀이 압박이 되어 박수를 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을 만들고는 있지 않았던가? 나는 스스로에게 그것들에 저항하면서, 고귀한 척하면서 말이다.

이 글은 <로르카 시 전집>과 전혀 관련이 없는 리뷰다. 시의 대가가 무엇을 노래했던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설에서 이야기해준 로르카의 모습을 볼 때 그는 스스로가 광대의 모습으로 세워지는 것이 너무 싫었던 것 같다. 그것은 일종의 자만일수도 있지만 어느 기준의 잣대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철부지같은, 동심(童心)의 오만함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인의 시조차 이해 못하면서 나는 로르카의 마음을 알 것 같은 착각을 한다. 백여 년 전에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스페인에서 살았던 그 남자를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착각이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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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삶 - 믿음이 이긴다
조엘 오스틴 지음, 정성묵 옮김 / 긍정의힘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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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되새겨야 하는 긍정의 방법

믿음이 이긴다『최고의 삶』

조엘 오스틴/정상목

긍정의 힘

 

 

이제는 너무도 유명해 도서, 티브이, 인터넷 등으로 쉽게 만날 수 있는 조엘 오스틴의 『최고의 삶』은 그의 긍정 시리즈 중에 하나로 볼 수 있다. ‘믿음이 이긴다’는 부제목으로 보면 믿음을 강요한 방법의 서적으로도 보이지만 이 책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다고 약속하는 은혜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셨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말고 주님을 향해 구하면 받는다고 말한다.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음에도 나에게 찾아오는 시련에 쓰러지지 않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곧 주실 은혜 때문이라고 말한다. 강요된 방법이 아니지만 전화위복의 예시를 수 없이 다루며 주장을 뒷받침 시킨다. 이런 비중 높은 긍정적인 요소가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소홀히 한다고 하여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 책을 읽는 우리가 신앙인의 자세로 어떻게 거듭나야 되는 것인가이다.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취함바 되기 원하는 모습, 나의 모습을 반성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가장 나약한 모습, 세상적인 것을 향해 쉽게도 쓰러지는 마음을 하나님의 담대한 믿음으로 이겨나가야 하는 방법이야 말로 책을 읽고 그대로 받는 것이 아닌 스스로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믿고 하나님 원하시는 길대로 사는 방법일 것이다.

한 권의 도서가, 한 사람의 따뜻한 말이, 어떤 극적인 상황이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런 기적에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 도움은 분명 될 수 있을지언정 나를 바꾸는 것은 나 자신 밖에 없기 때문이다. 책에서도 말했듯이 나의 적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 뿐이다.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도 누구나 다 안다. 스스로의 나약함이 모든 기회를 날리고 말아버린다고 한다.

『최고의 삶』이 강조하는 포기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이 주실 은혜를 믿으며 나아가는 방법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지녀야 할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은 쓰실 자를 연단시키시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우시고 복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주실 것을 믿고 구하고 기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할 것은 바로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다. 나의 뜻대로, 내가 바라고 구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지라도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인간의 생각으로 깨닫지 못하는 놀라운 일을 하나님이 예비하실 테고 우리는 세상에서 받을 은사보다 천국에서 받을 큰 복을 믿고 가야하기 때문이다.

힘든 세상 속에 지치고, 악마의 꾀임에 자꾸만 빠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놀라운 은혜, 그럼으로 우리는 매사에 긍정으로 믿고 나아가야 한다, 는『최고의 삶』은 누구에게나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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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 - 플라톤이 본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진수 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6
플라톤 지음, 원창화 옮김 / 홍신문화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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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소크라테스의 변명』

  홍신문화사에서 출간된 『소크라테의 변명』은 플라톤의 저서 「소크라테의 변명」을 비롯해 「향연」, 「파이돈」, 「프로타고라스」등이 실려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저서가 플라톤 자신의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를 등장인물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 면에서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소크라테스를 인격적으로 높이 사고 존경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와 그가 탈출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악법도 법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독배를 마시며 사라졌다는 이야기쯤은 알고 있다. 그리고 플라톤의 유명한 「소크라테의 변명」의 저서를 들어본 적은 있을 것이다. 제목만 보자면 마치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비꼬기라도 하는 듯하다. 어릴 적 윤리시간에 간단하게 배웠던 소크라테스는 머리가 벗겨지고 돈도 벌지 못했으며 평생 부인의 바가지에 시달렸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서양 철학의 역사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임에도 조금은 과장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이 책을 조금만 펼쳐 있는 다면 이 제목이 반어법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무엇인가를 깨닫기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과감히 버리라고 말하고 싶다. 일종의 깨달음과 폭넓은 지식을 위한 선택으로 철학자들의 사상이 담긴 책들을 읽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그런 책들과 확연히 다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무엇은 얻기에 읽는다면 금방 지쳐 방구석에 책을 박아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오히려 고대 연극무대 대본으로 쓰여도 될 것 같은 방식의 이야기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면 쉽게 읽힐 것이다. 과연 소크라테스라는 인간은 뭐하는 사람인가? 이 정도의 생각정도를 가지고 말이다. 결국엔 이 책도 플라톤의 주관적인 성격이 강하게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인물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위대했기 때문에 죽음조차 친구에게 진 빚 따위를 기억해 꼭 갚아달라고 부탁하는 정도의 대범함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오해로 빚어진 죽음이라면 더욱 더 놀라울 수밖에 없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처럼 사형수로 확정된 인물의 무죄를 증언하기 위해 촉박한 시간과 싸우는 일 따위는 없었다는 것이다.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겸손치 못한 태도로 일관하다 재판관들의 미움을 사서 사형판결을 받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가 자신의 죽음을 승복한 이유를 오히려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에 대해 평가하게 만든 플라톤을 통하여 그가 살아생전 고통의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자면 십자가의 죽음을 스스로 받아들인 예수의 희생을 통해 제자들의 영혼에 복음이라는 불을 지펴 개신교의 복음화가 전 세계적으로 퍼졌던 것처럼 그도 자신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더욱 알릴 수 있다는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물론 엄청난 성공이다. 이런 부적절한 여러 가능성까지 생각해보게 만든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실로 오랜만에 재미있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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