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하지 못해 미안해

워싱턴 스퀘어

헨리 제임스/ 유명숙 옮김

을유세계문학전집

 

 

 

유세윤이 소속된 프로젝트 그룹 UV의 ‘쿨하지 못해 미안해’는 너무나 슬픈 노래다. UV가 뮤직비디오에서 보여준 과장된 안무와 표정은 많은 웃음을 줬지만 가사만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요즘은 뭐든 쿨해야 된다. 그게 진짜 멋있는 사람이다. 이별 앞에선 깔끔하게 마음을 정리하고 돌아설 줄 알아야 된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들이 마치 블로그에 자신의 감정을 한줄 적어내듯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사랑뿐 아니라 인간관계조차도.

내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쿨하지 못하다. 사랑은 무섭다.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별에 대처하는 방법이 무섭다. 그 전의 어떤 연인에게 상처를 받았음이 뇌리에서 쉽게 사라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누구한테 그런 상처를 줬음이 분명하다. 그게 사랑이다. 양념 반 프라이드 반처럼 정확하게 나눠진 감정의 양이 아니다. 한쪽이 더 많이 사랑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티브이 속에서 그놈의 말도 안 되는 사랑이야기에 욕을 하면서도 넋을 잃고 보는 것이다.



1880년에 발표된 헨리 제임스의 소설 『워싱턴 스퀘어』는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부유했던 집안에서 태어난 작가는 어린 시절 많은 여행을 통해 영국인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제법 썼다. 헨리 제임스라는 이름이 많은 이들에게 국내 독자들에게 낯설게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을 접한 사람이라면 그의 수준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글의 속도감이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까지 일정하게 흘러가고 있고 묘사나 설명의 방법에 있어서도 더하거나 덜 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런 성과는 쉼 없이 지속된 오랜 글쓰기와 글에 대한 연구 그리고 훈련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는 스물한 살에 작가의 길로 들어서 약 오십 년이라는 세월동안 20편의 장편소설과 130편 가량의 중단편, 12편의 연극, 여러 권의 여행기, 250여 편의 서평과 수십여 편에 달하는 비평문, 만 편이상의 편지를 썼다고 한다. 결혼도 하지 않고 오직 글에 매진한 성과라고 하기에도 정말 대단한 양이 아닐 수 없다. 발자크가 소설에 매진하기 위해서 하루에 80잔의 커피를 마셨다는데 아마 그도 이와 다르지 않은 시간을 글쓰기로 보냈음이 분명하다.

『워싱턴 스퀘어』는 을유문화사의 선택에 의해 국내에 소개되는 작품이 되었지만 정작 본인은 이 작품을 수준 낮은 것으로 분류해 자신의 전집에서도 제외했을 정도였다. 그의 작품은 살아생전 빛을 보지 못했고 후반으로 갈수록 실험적 성격이 강한 난해한 소설들을 발표해 독자들로 하여금 멀어지는 요인이 된다.

제인오스틴과 발자크, 호손의 영향을 받은 것이 보이는 위 작품은 비록 그의 손에서는 저평가를 받았지만 그의 작품이 알려지며 정점의 반열에 오른 195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이 되었다.



잘나가는 의사의 딸로 많은 유산상속이 분명한 무남독녀의 캐서린은 당시 귀족 아가씨들이 지녀야할 예쁘고 앙증맞은 얼굴을 지니지 못했다.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딱히 인정받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유약해 보이는 다른 처녀들과 달리 건강미를 지닌 캐서린은 모든 것에 그리 뛰어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눈에는 사랑하는 딸인 동시에 못마땅한 존재였고 그를 사랑한다고 접근한 눈이 부시게 잘생기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모리스가 재산을 노린다는 생각으로 그들의 사랑을 막는다. 아버지와 모리스의 사이에 고모까지 개입하게 되면서 캐서린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는 동안 캐서린은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그녀는 사랑 그대로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길고 긴 줄다리기의 시간을 통해 결국 의사 아버지의 유산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 모리스는 매정하게 발뺌을 해버리고 그녀는 결국 마음의 상처를 입어 결혼을 하지 않는다.

그녀의 사랑에 무엇이 있었던가? 생각을 해보자면 그 순수함의 반함뿐이었다. 첫눈에 홀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달콤한 것들이 다 진심인 냥 받아드렸다. 그러나 세상을 몰랐다. 그의 아버지가 결혼을 막고 그의 고모와 모리스가 힘을 합쳐 어떻게든 결혼을 승낙받기 위해 안 보이는 곳에서 계략을 짜는 동안 그녀는 그저 사랑에 대한 열망과 아버지를 향한 순종과 사랑으로 기다리는 시간을 보냈다. 이렇다 할 변명조차 하지 못하고 모리스가 떠나는 순간까지 캐서린은 그 사랑을 믿었던 것이다. 정말 요즘 같은 말로 쿨하지 못한 모습이다. 순수하게 사랑하면 쿨하지 못한 세상. 상처가 오랜 앙금으로 남아 다시는 어떤 이에게 눈조차 돌리는 일이 없어진 캐서린의 모습은 정말 가련하다. 그녀는 너무나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습에 자족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더욱 많은 것을 움켜지려하는 마음이 없었기에 오히려 모든 것을 잃는 순간 다른 이에 대한 사랑의 신뢰가 굳게 닫혔다. 시간이 흐른 후 늙기는 했지만 여전히 멋진 모습의 모리스가 불쑥 캐서린을 찾아왔을 때 그를 쉽게 거부해버리는 그녀의 모습 속에 쿨하지 못한 자의 쓴 맛이 있다. 더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더 많이 믿었던 모습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남아버린 것이다.

사랑은 정말 무섭다. 일 년에도 수십 건씩 발생하는 탈영의 문제는 대부분 사랑하는 이의 변심에 대한 통보로 이루어진다는 것만 생각해봐도 그렇다. 그렇다고 우리는 사랑을 그만둘 순 없다.

결혼과 유산 상속으로 놓고 펼쳐지는 가족드라마라는 소재가 식상할 수 있지만 대가의 손에서 잘 만들어진 글이란 언제나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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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외로워
직업으로서의 학문
막스 베버/이상률 옮김
문예출판사

막스 베버의『직업으로서의 학문』은 1918년에 강의가 되었고 1919년에 출간되었다. 이 책에는 그가 당시에 강의 했던 ‘직업으로서의 학문’과 ‘정치로서의 학문’이 실려 있다. 인문학에도 충분히 젬병인 나로서는 그의 사상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무리였다. 물론 그런 걱정을 하며 책을 읽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사유적이거나 많은 인문·철학적 기본지식을 요구하는 서적들이 있었다. 그러나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보다 쉽고 재미있었다.

당시 독일사회에 기준으로 미국과 유럽에 퍼진 자본주의와 비교하는 막스 베버의 사상들은 결국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직업인으로서의 가져야할 의식이다. 얼마전 티브이에서 방영했던 <열혈장사꾼>처럼 장사를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자기발전을 위해 발휘해야할 창의적인 영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대를 거듭할수록 나이든 사람의 눈에는 젊은 것들이 버릇없는 것처럼 변하듯이 당시 젊은이들은 영감을 위한 노력을 하기보다는 과학에 근거한 분석과 연구, 이해력에 힘을 쓴다는 것이다. 그의 ‘혼’이라고 말한 정열의 결과물은 착상에 단계에 이르기까지 쉽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르게 보자면 과학적 방법에 의해 인문학적 사유의 접근을 더 이상 찾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원할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작업과 정열이 합쳐지게 되는 어느 시점, 특히 소파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완만한 비탈길을 산책하고 있을 때 갑자기 떠오른 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한번쯤은 일반적으로 경험해 봤던 것이므로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흔히들 창작자의 입장에선 ‘영감’ 혹은 다른 이들에겐 ‘아이디어’로 불리는 것들이다. 이것은 무엇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몫이 아니라는 점이 막스 베버의 이야기다. 그는 상인은 상인적인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발전을 위해서 꾀해야 할 것은 이해력과 실험으로 점철되는 과학적인 것뿐 아니라 스스로의 창조적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 두 가지는 앞으로의 세대에서 상호보완적인 이해관계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가의 상상력과 수학적 상상력은 전혀 다른 방향임에도 그 심리적 과정은 다르지 않다고 말을 하고 있다. 막스 베버는 그것을 통해 일에 완전히 헌신하는 사람만이 ‘인격’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하고 있다.

 

정치로서의 학문은 위의 것과 다르지 않다. 다만 6월 2일 지방선거를 코앞에 두고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다는 기분이 새로웠다. 막스 베버는 정치를 직업으로 삼는데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말을 하고 있다. 정치를 ‘위해’ 살거나, 정치에 ‘의해’서다. 이 대립은 결코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말이다. 보통의 정치가는 이 두 가지를 선택해서 하는 것인데 현재의 우리나라 정치구도를 놓고 보자면 막스 베버의 말이 이해가 됐다. 돈이 넘쳐서 뜬금없이 출마하는 지역유지들, 뻔질나게 사회 운동하다가 달게된 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목숨걸고 나라를 위해 싸운다는 후보들, 사회에서 물질과 명예를 얻고 정치판의 맛을 보고 싶어 넘어오는 경제인들, 도저히 위에 놈들이 해먹는 꼴을 볼 수 없어 홧김에 나온 열혈시민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마구 스쳐간다.

그는 ‘직업정치가’의 발전과정을 과거에 군주와 신분집단 간의 싸움에서 군주를 위해 봉사를 하면서 발전했다는 사실을 설명하며 성직자와 문학자들, 궁정귀족과 도시귀족, 법률가들이 어떻게 해서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는가를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 그 이후에 칼럼리스트들의 엄청난 영향력과 그들의 선택해야만 하는 물질과 명예의 기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모든 기본적인 정치의 이해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나면 막스 베버는 정치와 윤리의 관계에 말한다. 이것은 막스 베버가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것인데 여기서 그는 신학적인 윤리의식과 세계의 많은 나라들과 그 나라의 종교적인 의식을 예로 들면서 수단이 될 수밖에 없었던 폭력에 관한이야기를 다룬다. 그것은 책임윤리와 신념윤리의 기준으로 나뉘게 되는 정치적 선택으로 이어지게 된다.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정치가가 취해야 할 신념의 가치관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충분히 감당할 책임의 가치관을 통해 막스 베버는 역시나 그 두가지 모두를 따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지녀야 할 가치관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삶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통찰력의 단련된 냉철함과 현실을 참아내면서 내적으로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강조한다. 그것은 바로 수많은 신념윤리를 지닌 사람들에게 묻는 질문이다. 스스로가 부담하고 있는 내적인 무게는 결국 확고함 속에서 나오는 자신의 희생을 의미한다. 어중이떠중이로 비판의식으로만 일관하는 생각 없는 무개념의 행위들이 결국 그 일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는 회피하고는 일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는 그 무게에 대해 나이에 관계 없이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두 신념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며 상호보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막스 베버의 마지막 말은 가장 중요하다. 정치적인 신념은 지도자도 영웅도 아닌 우리 자신들의 모습 속에서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확고한 용기로 자신을 무장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회의 변화를, 좀 더 나은 길로서의 정치를 원한다면 비판과 회피와 무관심으로 일삼거나 자신의 눈으로 보이는 정치적인 일들이 너무 어리석거나 너무 야비하더라도 이에 좌절하지 말고 그 ‘소명’을 갖고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 시대의 기본적 원칙은 내가 스스로 이 나라를 위해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은 기브앤 테이크이다. 내가 선택한 세상은 아닐지라도 발전을 위해서 나가야 하는 것이며 그것의 책임은 스스로가 최선을 다할 때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선거 참여율이 현저하게 낮은 한국의 시대에, 점점 갈수록 신임을 잃어가는 정부와 정치바닥에 대해 손가락질 보다 우리의 확고한 신념과 소명이 필요할 것이다. 인문적 영감과 과학적 이해력, 신념과 책임의 윤리, 나와 세상, 이 모든 것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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