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학
아리스토텔레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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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학』

아리스토텔레스/천병희 옮김

문예출판사







  문학 이론에 대해 조금이라도 접근해 본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에서 ‘카타르시스’를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가 종소리를 듣고 침샘에서 침을 가득 분비해낸 것처럼 조건반사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사실 나조차도 그렇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문예출판사에서 출간한 『시학』은 제법 기대가 되었다. 일단 국내에서 그리스, 라틴 문학의 대가이신 천병희님의 이름을 볼 수 있었다는 것과 아리스토텔레스 뿐 아니라, 호라티우스, 플라톤이 지니고 있는 시에 대한 이론과 생각을 같이 볼 수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서 아직 지은이의 이름이 단지 롱기누스라는 사실만 알 수 있는『숭고에 관하여』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법 알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예출판사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책을 하드커버로 선택해 만들었다.

  벌써 3년이라는 시간동안 라틴어를 공부하며(사실 너무 불성실하게 스터디에 참가해 그 수준은 초급자에도 못 미친다) 너무나 친숙한 호라티우스에 대한 일화들과 『일리아드』,『 오딧세우스』 같은 당대의 수준 높은 작품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고 깊게 파고들만한 것도 없지만 뛰어난 운율로 이루어지는 이야기는 시간을 빼앗기에는 충분한 역할을 했다. 그 덕에 천병희님이 번역한 서적을 접할 수 있었고 그 분이 원전에 충실하고 친절한 각주를 다루시는 것에 대해 독자로서 장인에 대한 감명을 받았었다.

  

  책의 처음에 등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서사시와, 비극, 희극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통해 어떻게 좋은 작품으로 치닫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이론서적인 성향을 띄고 있다. 당시의 글들이 운율 형태로 쓰인 이야기임으로 지금 우리가 떠올리는 시 뿐만 아니라 연극으로 발표되는 공연들의 대본 또한 모두 시라고 평가되었다.

  그의 글의 장점이란 당시에 현저히 많이 쓰인 모든 작품들을 충분히 읽고 난 후에 만들어져 이론에 대한 충분한 받침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예로 들은 좋은 작품들, 특히나 비극이 가져야 할 성격에 대해 그는 주인공이 취해야 할 올바른 행위에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글을 쓰는 창작자인 독자들에게 참으로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는데 다만 아쉬운 것은 당시의 모든 이야기꾼들이 참고했던 아리스토텔레스『시학』은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글들과는 사뭇 다른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신화들의 이야기 중 하나를 차용하여 그것을 창작의 입담으로 개작하여 살리되 뿌리를 망치지 않는 작품들이였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의 작품은 연극을 상영으로 목적을 뒀던 것으로 지금의 대본에 가깝기 때문에 운율을 살리지 않고 글을 쓰는 지금의 소설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이야기들에서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던 것들은 플롯에 대한 이야기였다. 단순과 복잡의 구성과 비극적 감정을 증폭시키기 위한 플롯에 대한 이야기 등은 재미 이상의 무엇을 얻을 수 있었다.

  호라티우스의『시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는 어떤 기술적인 부분보다는 창작자들이 취해야 할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기술적인 것을 배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각 장의 내용을 알려주는 목차를 보면 기술적인 이야기들을 제목으로 하고 있다. 드라마에 대한 특징이라던가, 연령별 성격파악, 소재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들, 음악에 대한 주의 사항 등. 그러나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그는 시인이 지녀야 할 여러 덕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부와 명예욕에 예술의 혼을 포기하고 쾌락적인 글쓰기로 상영되는 작품들을 만드는 시인들은 결국 관객을 떠나가게 하고 모독하는 광기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인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호라티우스의 『시학』은 같이 실린 다른 작품들에 비해 그 내용이 짧았지만 개인적으로 잘 읽히고 도움이 되었다.

  그 뒤에 엮인 이야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플라톤의 『국가』의 일부분을 발췌한 것으로 그가 지니고 있는 시인들에 대한 견해와 작품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다. 절대 이성을 중시한 플라톤은 미술가, 시인같은 예술가들을 현실세계에 대한 모방범으로 간주하고 그들이 어떻게 이성을 흔들고 망치는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는 모방이란 진리로부터 3단계나 떨어진 것으로 간주해 물건을 만드는 장인들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혹시키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 호메로스의 주옥같은 작품들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면서도 우리는 시의 주인공들이 가진 격정적인 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아름다고 건실한 마음으로 국가를 이롭게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모방’이란 단어는 앞서 이야기 한바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사용하고 있어 그가 플라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가 인간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나쁜 작품들에 대해 꾸짖는 점에서 예술에 대한 완성도의 평가자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롱기누스의 『숭고에 관하여』는 가장 큰 분량을 차지하는 작품으로 당대의 많은 학자들과 시인들의 작품을 다루면서 그들의 사상과 생각들을 비교한다. 그는 작품을 씀에 있어서 필요한 기술적인 것들을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나는 곧 지루해지는 상황에 빠지고 말았기 때문에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시학』이 가져다주는 기쁨이란 앞 선 시대에 대한 흐름과 교훈을 현대의 것과 비교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귀한 것이다. 역사는 그 틀에서 조금씩 틀어질 뿐 반복된다는 말처럼 지금 우리의 모습도 부와 명예를 위해 행위를 하는 많은 예술가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서 우리 스스로가 반성하는 계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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