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 - 이토록 곡해된 사상가가 일찍이 있었던가?
테리 이글턴 지음, 황정아 옮김 / 길(도서출판)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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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후쿠야마의『역사의 종언은 끝났다』

 

-테리 이글턴,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를 읽고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제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공산당 선언』, 유강은 역, 그린비, 2005).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등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서로 끊임없이 대립해왔다. 그 과정에서 부르주아는 봉건 사회를 종식시키고 시민 사회를 열었지만 여전히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계급 대립은 폐지하지 않았다.

 

끊임없는 개발과 발전으로 우리는 어쩌면 절대 빈곤에서는 벗어났는지도 모른다. 생산력도 많이 발달했고 스마트 폰 안 가진 사람이 없다. 스타벅스 커피를 테이크 아웃하면서 우쭐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공허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우리는 정말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정신적으로도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일까. 주택 보급률은 120%라고 한다. 그런데 아직 자기 집을 못 가진 사람이 많고 젊은이들은 스마트 폰이라는 100자 안팎의 소통 시스템 안에서 사유하기를 차단당한 채 텅빈 말들만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공산주의에는 자유가 없다느니 개성이 없다느니 떠들었지만 자본주의가 만개한 서울에서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웃음도 안 나온다. 모든 여자는 김태희처럼 예뻐야 한다는 동일성의 명령에 복종하고 티비 광고에 나오는 아파트와 자동차는 행복까지 챙겨준다니 일제히 욕망할 수 밖에 없다. 이게 전체주의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마르크스주의가 죽었다고, 끝났다고 쾌재를 부른 사람들에게 테리 이글턴은 한마디 한다. 마르크스주의야말로 가장 현재적이라고. 그는 오히려 죽어가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 아닌가 하고 되묻는다. 이글턴은 ‘세계 금융 시스템을 초토화 직전으로 이끈 은행업자와 금융업자들은 시민들에게 적발되어 능지처참 당하지 않으려고 줄을 서서 성형 수술을 받으려 할 것’이라고 위트를 던지기도 한다.

 

자본주의는 자신이 스스로 우월하고 합리적이며 과학적이라고 잘난 척 하고 있지만 그러한 믿음 자체가 이미 일종의 미신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궁극적 한계가 ‘자본 그 자체’라고 말한 적 있다. 자본주의는 주기적인 전쟁이나 공황을 야기하고 순간순간 그 위기를 모면해 가지만 결국 그 자체의 기본 모순 즉 ‘생산의 사회화와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로 인해 체제의 변혁이 불가피하다.

 

이글턴은 자본주의에서 노동 계급은 ‘배제되면서 포함되는’ 기괴한 계급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꼭 필요하면서도 ‘아무것도 아닌’ 집단이다. 이렇게 자본주의는 사회의 토대 자체가 자기 모순적이다. 그는 ‘자본주의가 노동 계급 없이 생존할 수 없는 반면에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없이 훨씬 더 자유롭게 번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임노동이 인간을 소외시키고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일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기본 소득 운동은 노동과 소득 간의 연결 고리를 아예 끊자고 주장한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 교수 퀴퍼는 ‘임금 노동의 비인간적 본성에 대처하는 방법의 하나로 노동과 소득의 고리를 끊기 위해 모두에게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주자’(『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최광은, 박종철출판사, 2011)고 제안하고 있다.

 

마르크스에게 노동은 임금과 무관하다. 노동이란 ‘현실을 바꾸는 행위를 통해 인간의 물질적인 힘을 실현’하는 것이다. 인간의 노동은 미리 정해진 잣대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인간 능력 일체의 발전’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생산이란 ‘플루트를 불거나 복숭아를 맛보거나 플라톤과 언쟁을 하거나 춤을 추거나 연설을 하거나 아이의 생일 잔치를 준비하는 것 등 자기 충족적인 활동 일체’를 포괄한다. 자본주의에서 임노동은 인간을 노동에서 소외시키고 있을 뿐이다. 노동자는 자신이 쓰려고 의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얼굴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수백 개의 의자를 만들어내야 한다. 자본주의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생산과 소비의 불일치 말이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가 자본주의에서는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자본주의에서는 개미처럼 열심히 일한 노동자는 점점 더 궁핍해 질뿐이다. 2011년 7월 한 조사에 따르면 택시 기사의 월급은 101만 5천원인데 그가 실제로 번 돈은 200만원이 넘는다. 임금 이외의 돈은 회사가 가져간 것이다. 또 최근에는 4대강 사업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무리한 야간 작업 일정에 쫓겨 쉬지도 못하고 일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한 국회의원의 조사에 따르면, 하루에 17시간을 노동하는 경우도 발견됐으며 2011년 1월~4월에만 무려 11명이 사망했다고 한다(『마르크스의 자본』, 강신준, 사계절, 2012). 이처럼 노동자들의 생활은 도무지 나아지지가 않는다.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노동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임금만을 주기 때문이다(노동자들이 자본가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

 

자본주의는 이윤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토지는 지대와 아무 상관이 없다. 또 기계도 이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 박정호 외 옮김, 거름, 2005, p. 192).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된다면, 이득이 된다면 윤리도 도덕도 폐기처분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아직 이윤보다 중요한 것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소크 박사는 특허를 포기하고 전세계에 백신을 보급했다. 그는 ‘이윤보다 생명’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도 에이즈는 약값이 없어서 치료 받지 못하고 1년에 300만명이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거꾸로 생각해봐』, 홍세와 외, 낮은산, 2008). 이 끔찍한 홀로코스트 앞에서도 제약회사는 이윤만을 따지고 있다.

 

과연 자본주의가 옳은 것인가. 감상적 휴머니즘에 빠지자는 얘기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결국 승리할 것인지 우린 아직 모른다. 양극화는 날로 심해지고 있고 2011년 월스트리트 시위를 비롯해서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시위들이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에 멕시코 억만장자는 그 나라 1천 7백만 명의 수입과 맞먹는다고 한다. 그들은 흑인도 있고 백인도 있는 것처럼 부자도 있고 빈자도 있다고 말하지만 이글턴은 빈자가 ‘있기 때문에’ 부자가 있다는 진실을 흐리지 말라고 일침을 가한다.

 

이러한 불평등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계급 없는 사회’는 그저 하나의 유토피아에 불과한 것일까.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계급이 없는 원시공동체가 존재했고 이 공동체 내부에서 생산력의 발전에 기초하여 생산수단을 독점하는 인간집단이 출현, 이들이 다른 인간 집단을 착취ㆍ지배할 수 있게 되어 계급이 발생하고 계급사회가 형성’(출처, 네이버 지식백과)되었다면 우선은 다시 코뮨으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없을 것 같다. 작은 마을 공동체를 생각해보자. 자본주의에서처럼 상품을 무정부적으로 생산해서 이윤을 추구하고, 재고가 쌓여 낭비하는 일 없이(『금융자본론』, 루돌프 힐퍼딩, 김수행 역, 비르투, 2011) 공동체 구성원의 필요에 따라 계획적으로 생산해서 쓸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을 어떻게 생산할지가 사적 이윤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에 따라 결정’되는 사회 말이다.

 

또 우리는 진정, 토지와 같은 공통적인 것으로부터 나온 수익(불로소득, 투기소득, 지대소득 등)을 개인이 취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화하거나 국유화 할 수는 없을까. 이글턴은 이것은 ‘의지의 문제’라고 분명히 말한다. 네그리와 하트도 물, 은행, 교육 같은 것을 공통적 재화로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선언』, 조정환 역, 갈무리, 2012)한다. 공통적인 것에는 당연히 생산 수단도 포함될 것이다. 비행기나 기차도 인류가 생산해낸 공통적인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공통적인 것을 ‘재설정하고 확대’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본다.

 

이러한 일은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다. 마오주의와 스탈린주의는 ‘서투르고 잔혹한 실험’이었다. 마르크스도 이들과 다르지 않은 유토피아주의자 아니냐는 비난에 이글턴은 이렇게 대답한다. 마르크스에게 중요한 것은 ‘이상적인 미래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가 실현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현재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덧붙인다. 자본주의 실험의 잔혹성에 대해서 말이다. 이미 서구의 실업 인구는 수백만 명에 이르고 우울증과 자살은 감기처럼 번지고 있다고. 유감이지만 우리 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이글턴에 의하면 자유주의 사회는 난감한 문제를 하나 가지고 있는데 이 사회에서 개인들은 자유롭다고 되어 있지만(푸코식으로 근대 국가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놔두면서 통치한다. 『안전 영토 인구』, 오트르망 역, 난장, 2011) 이 자유는 끊임없이 ‘서로의 목을 겨눌 자유’에 다름 아니다. 그야말로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 상황이다. 고립된 개인들의 끊임없는 경쟁, 자기 계발, 정규직을 향한 싸움들. 사회를 유지하고 매개하는 관계들 즉 유대, 인간 관계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자본주의는 보편적 상품 형식 아래 인간의 질적 노동을 삭제하고 소외 시킨다. 그리고 사회와 그 구성원들은 병들어 간다. 하지만 공산주의에서는 ‘개인들이 다른 사람들의 자기 실현 속에 그리고 이를 통해서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삶을 조직’한다. 흔히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가 개인의 삶을 묵살한다고 여겨왔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게 이글턴의 지적이다. 오히려 ‘개인의 자유로운 번영이 마르크스의 정치적 사상이 갖는 목표’였다.

 

이글턴이 보기에 자본주의, 자유주의 시장이 인간 본성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주장은 터무니 없다. 그들은 인간 본성을 자본주의와 동일시하고 있는데 ‘사하라 중부 투아레그 족 사람들도 본심에서는 자본주의적 기업가들이며 투자은행을 세우고 싶어한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투자 은행이라는 개념조차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한 발언에 불과하다. 자본주의자들은 매사에 그들의 이런 생각을 보편화하고 획일화하려고 시도해 왔다. 전체주의와 닮은 것은 바로 이 자본주의이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완전한 전체, 완벽함을 구상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우연성, 온갖 우발적인 충돌과 사건, 비극, 예측 불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었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 질서를 만드는 것도 그에겐 가능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획일성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는 평등을 ‘부르주아적 가치’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의 상품이 다른 상품과 가치에서 균등해지는 교환가치가 정치 영역에 반영된 것이 평등’이라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이 평등 개념을 중간 계급 민주주의의 추상적 평등과 연관시켰는데 이것은 ‘시민으로서의 형식적 평등이 부와 계급의 실질적 불평등을 흐리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에게 평등은 ‘차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모두가 똑같아지자는 게 아니다. 그는 ‘모두의 서로 다른 필요를 고르게 돌보아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평등을 중요시 했을 뿐이다. 이처럼 마르크스는 누구도 현실에서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현실은 ‘우리 자신이 만든 세계’여야 한다. 현실이 자신의 노동과 무관하게 될 때 우리는 ‘소외’된다. 그의 변증법에서는 사유와 실천의 분리, 육체와 정신의 분리도 용납되지 않았다. 우리의 생각이 실천에 토대를 둔다는 점을 망각하는 것은 ‘관념론’의 무지일 뿐이다.

 

흔히 사람들은 그가 토대와 상부 구조라는 모델을 통해 현실을 두 조각으로 분리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글턴은 마르크스에게 이들 간에 ‘쌍방향의 소통’이 중요했다고 본다. 마르크스는 ‘인류가 물질적 생산을 통해 자신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를 매개, 규제, 통제하며 이는, 오만한 지배가 아니라 쌍방향의 소통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역사가 자연 역사의 일부’라고 믿었다. 이러한 점을 무시한 자본 축적의 충동은 자연 파괴로 이어지며 결국 생태적 균형도 파괴할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공산주의는 최초의 생태주의였고 더불어 여성주의의 정치 프로그램이었다. ‘부르주아지는 자기 부인을 단순한 생산 도구로 밖에 보지 못한다. 그래서 생산 도구를 공동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분개한다. 한낱 생산 도구에 불과한 여성의 지위를 타파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지향하는 바이다. 부르주아적 결혼은 사실상 부인을 공유하는 제도이다. 현재의 생산관계가 철폐된다면 그 생산 관계에서 비롯된 부인 공유제, 즉 공식적, 비공식적 매춘도 사라질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낸시 홈스트롬 엮음, 유강은 역, 메이데이, 2012).'

 

물론 이글턴은 계급에서 벗어난 오늘날의 페미니즘, 젠더, 인종, 탈식민주의로의 이동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는데 그들이 ‘계급이 죽었다’고 본다면 이글턴은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이글턴은 지배층이 말하는 것처럼 여성이 약한 게 본능이라고 한다면 더 이상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아도르노 또한 ‘여성다움’이라는 것이 기존 체제를 재생산하는 반동이라고 이미 오래전에 언급한 바 있다. 남성이 여성을 통해 자기를 정당화하고 연약한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필요로 한다면 그러한 요구에 스스로 복무하는 여성이야말로 끔찍한 순응주의자로서 이 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는 것 아닌가(『미니마모랄리아』, 김유동 역, 길, 2005). 쥬디스 버틀러도 여성이라는 ‘구성된 젠더의 허구성’을 폭로한 바 있다(『젠더 트러블』, 조현준, 문학동네, 2008). 이글턴은 ‘계급’과 함께 이러한 문제들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만일 계급을 이야기하지 않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은 루카치 식으로 표현하면 허위이고 가상이다. 그리고 우리는 동시에 변증법적으로 계급을 이야기하면서 계급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마르크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는 일시적인 것이었으며 그저 ‘다수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글턴에 따르면 그는 권력을 ‘물화(物化)하는 태도 즉, 그것을 사회적 환경에서 떼어내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처럼 다루기를 거부’했다.

 

이글턴은 이번 저작에서 마르크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현재적’이라고 발하고 있다. 마르크스에 대한 오해와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명쾌하게 간추리고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이글턴의 지적은 내가 종종 대답하기 난감했거나 애써 외면했던 것들을 정확히 다시 바라보게 했다. 그의 특유의 날카로움과 유머 감각은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는 것 같았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이 충분했는지 모르겠지만 이글턴은 마르크스주의가 끝났다는 사람들이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얼마나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었는지 환기시키면서 자본주의의 오류와 범죄에 대해 소상히 밝히고 있다. 마지막까지 그의 재치는 빛난다. 피로 얼룩진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잔인했다며 마르크스주의에 등을 돌린 사람들은 히로시마 폭격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어야 할 것이다!

 

1990년 초,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동유럽과 소련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예리하게 통찰하면서 “역사는 종언하였다”고 말했다. 그에 대해 이글턴(은 이 책에서 직접 다루진 않았지만)도 동의할 거라 믿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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