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 영토, 인구 -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7~78년
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옮김 / 난장 / 201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국가’라는 거짓말

-우울한 오늘, 길 잃은 양이여 푸코를 읽어라

 

국가는 무엇일까. 그것은 실체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푸코가 말하는 것처럼 실체 없는 추상뿐일까. 푸코에 따르면 근대 국가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인구를 관리하고 조절하는 통치의 과정 그 자체이며 절차이다. ‘인구를 통치한다’는 관념은 바로 이 근대라는 시기에 나타났는데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통치 개념은 사용되지 않았다. 근대 국가는 단순히 이전 시대처럼 억압과 공포로 사람들을 통치하지 않는다. 단순히 ‘살인하지 말라, 절도하지 말라’라고 명령하는 대신 실제로 살인이나 절도를 저지르기 ‘전’에 항시적으로 감시하고 통제하며 주시한다. 그 과정에서 규율 장치를 비롯한 경찰, 감옥 등의 근대적 안전 장치들이 발달했다. 시민들의 생명과 보건 등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도시는 나병 환자들을 추방했고 18세기부터는 예방 접종을 실시했다. 이로써 ‘인구’가 ‘관리와 조절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일종의 자연성인 인구를 국가 권력이 개입해서 인공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8세기 초부터 무역과 교역을 통해 국력을 키워야했던 근대 국가는 도시를 공간적, 법률적, 행정적, 경제적으로 틀에 갇힌 상태에서 해방시켜야 했다. 도시의 성벽을 허물지 않을 수 없었고 때문에 거지, 부랑자, 건달, 범죄자, 도둑, 살인마 등 온갖 떠돌이들이 도시로 대거 유입되었다. 도시는 더 이상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도시에서는 감시와 규율 체계가 확대되었고 보건과 위생 관련 장치들도 발달했다.

 

그렇다면 과연 근대의 도시는 진정 사람들에게 사회적, 경제적으로 안전하고 평화로운 공간이었을까. 일례로 도시는 식량난과 같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처했을까. 근대 국가는 사법적, 규율 체계 등을 통해서 풍작과 가격하락, 흉작과 가격 상승 사이의 변동을 예방하거나 막지 않는다. 예전에는 이런 변동을 피하려고 어떤 것을 막거나 강제했다. 근대 국가는 가격이 상승하는 경향이 있는 곳에서는 그 상승을 가만 놔두면 자연스럽게 가격이 하락한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가격 폭등, 식량 부족 이라는 현상이 일어나고 전개되도록 방치하고 방임하자는 것이다. 이 현상 자체가 틀림없이 스스로를 억제하고 규제하리라는 것이었다. 단, 거기에는 하나의 조건이 있었다. 시장의 계역 전체 안에는 일정한 가격 폭등, 일정한 식량 부족, 일정한 기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일부 사람들은 굶주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구는 이제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굶주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알아서 처신해야 하는 주체이자 관리되는 대상이 되었다. 국가는 인구를 ‘방임하면서 동시에 관리’하는 것이다. 이제 국가는 과거처럼 금지하고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놔두고 방임하지만 그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사람들을 방임하고 사건을 일어나는 대로 놔둔다는 식의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적 형식이 발전할 수 있게 해 준 중요한 요건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이제 인간을 통치하려면 인간의 자유, 인간이 하고 싶어 하는 것, 인간에게 득이 되는 것, 인간이 행하고자 하는 것, 즉 인간의 욕망을 우선적으로 사유해야 한다는 관념이 지배적이 되었다.

 

각자의 자유에 의거하고 그 자유를 통해서만 조절하고 작동할 수 있는 권력, 바로 이것이 근대 국가에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것이었다. 근대 국가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주권자의 의지에 복종해야만 하는 온순한 의지들의 집합이 아니었다. 모든 개인은 욕망을 통해 행동하고 국가는 최대의 이윤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거주하기를 갈망하는 곳에 사람들이 이주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근대 이전에는 인간의 자유를 감시하고 통제했다면 이제는 모든 것을 허락하면서 개인의 일상 생활에까지 개입하여 감시했던 것이다. 근대 인간이 왕권을 무너뜨리고 모든 권력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그들에게 자유는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도시에서 욕구와 열망의 주체인 동시에 통치의 대상이 되었다. 근대 국가는 자기애의 한계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기애의 확대를 통해 이로운 효과를 창출할 수 있을지를 관심 가져야 했는데 이것은 공리주의 철학의 모태가 되었다. 근대 국가 이전에 왕이나 군주는 군림했지만 통치하지는 않았는데 통치는 베스트팔렌 조약(독일 30년 전쟁을 끝마치기 위해 1648년에 체결된 평화조약으로 가톨릭 제국으로서의 신성로마제국을 사실상 붕괴시키고, 주권 국가들의 공동체인 근대 유럽의 정치구조가 나타나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위키피디아) 이후에 성립한 근대 국가에서 두드러진 형식이다. 사람들을 자유롭게 내버려 두면서(욕망하게 하면서) 그들의 안전과 생명을 관리, 조절, 통치한다는 개념은 근대 국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다.

 

왕은 신민들을 통치하고 관리한 것이 아니라 지배했을 뿐이다. 죄인을 다루는 방식도 근대에 와서 달라졌는데 감옥과 같은 공간은 근대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중세에는 죄를 지으면 추방하거나 사형시켰지만 근대 국가는 그들을 교화하고 훈육하기 위해 감금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법을 내면화하는 양심을 길러 내었고 이러한 방식은 효과적이고 경제적이었다. 이제 시민들은 스스로 법을 지키고 자기 내면에 법과 규범을 지닌 채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푸코가 말한 근대의 통치술인데 그는 이것의 유래를 그리스도의 ‘사목(목자) 권력’과 ‘양심지도(나 영혼 지도)’의 차원에서 찾고 있다.

 

사목 권력의 특징은 움직이고 있는 무리(도시의 무리)에게 행사되고 그 목표는 선행을 통한 무리의 구제이다. 그리고 개인화 하는 권력이었다. 양을 돌보는 목자는 불침번 서면서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지 개별적으로 감시하고 경계했다. 목자의 배려는 모두 타인을 위한 배려이지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한 배려는 아니었고 전체를 위해 한 마리의 양은 희생시킬 수도 있었지만 동시에 양들은 전체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됐다. 서구의 인간은 자신을 양떼 속의 한 마리 양으로 여기는 법을 수천년 동안 배워왔고 자신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줄 목자의 구원을 갈구하도록 수천 년 동안 배워왔던 것이다.

 

이러한 사목 권력은 푸코에 따르면 그리스 로마의 사유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것이었다. 이 사목 관념이 서구 세계에 도입된 것은 그리스도교 교회를 매개로 해서였다. 그리스도교는 인류 차원에서 구원을 이룬다는 구실로 현실의 삶에서 인간들을 일상적으로 통치한다고 주장하는 종교이다. 목자로서 그리스도는 길 잃은 무리를 신에게 데려가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자이며 무리 전체 뿐 아니라 각각의 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자이다. 또 사목은 무리를 떠난 양들이 참회를 통해 무리에 재통합하는 권력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목은 인간을 통치하는 기술이었고 통치성이 16세기말과 18세기에 정치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 근대 국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사목은 개인과 공동체를 구원의 길로 안내하는 것이었고 자기 양의 선행과 악행에 함께 동일시하며 기뻐하기도 했고 참회하기도 했다. 목자는 자신의 양을 구원하기 위해 죽음도 받아들였고 바로 이 메커니즘을 통해서 타인의 양심까지도 지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양들에게 늘 완전한 공덕이 있다면 목자가 필요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목자는 양들의 일탈을 통해서 자신을 정당화했다.’ 목자는 자신이 올바른 삶을 통해 모범을 보임으로써 타인을 가르쳤고 그들이 미혼자인지 기혼자인지 부자인지 빈민인지에 따라 다른 가르침을 주었다. 억압적으로 단 하나의 가르침을 주었던 것이 아니었다. 목자에게는 이제 가족이나 가정의 번영과 부 뿐 아니라 ‘만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문제였다. 사목은 인간의 품행 일거수일투족을 대상으로 하는 매우 특이하고 새로운 권력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목 권력에 반대하는 세력들도 끊임없이 공존하고 있었다. 가령 성서로의 회귀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들은 성서가 사목의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 목자가 아니라 ‘신’만이 무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16세기 종교의 대대적 위기, 즉 종교 개혁은 바로 이러한 배경을 지니고 등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그리스도 국가들은 목자처럼 교육의 차원에서, 일상의 차원에서 영혼을 인도하고 지도하기 시작했다. 공적인 것의 통치화, 그것은 분명 하나의 권력이었고 그 ‘이상’ 이었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에 근대 국가는 국가 자체 이외에는 아무것도 참조하지 않았다. 신의 질서도 따르지 않게 되었고 국가는 국가 자체로서만 의미가 있고 정당하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 이유로 국가는 언제나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반란이나 혁명, 즉 인간의 나약함과 인간들의 악의가 그것이었다. 그래서 근대 국가의 통치자들은 언제나 사람들을 감시하고 통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는 시민을 구원하고 관리하고 보살피지만 동시에 그들이 ‘악’할 때, 그들을 희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근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개인들은 왕이나 군주 같은 절대 권력이 무너지면서 예외 없이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서로 경쟁하는 사이가 되었다. 근대 국가 또한 마찬가지로 평등하게 공존하는 이웃 근대 국가들과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로마 제국이 무너지면서 보편성은 해체되었고 국가는 상호간에 일체의 종속관계와 의존 관계가 없는 절대적 단위들이었다. 각 국가는 스스로를 긍정해야 했고 스스로 보존해야했기 때문에 국력을 키워야만 했다. 국가들이 서로 균형을 유지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각국이 그만큼의 군사 장치를 가져야 했다. 바로 이 역설을 두고 푸코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군사력이 필수적’이었다고 말한다. 결국 전쟁은 근대 국가들의 공존에 근본적이고 구성적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국력은 어떻게 강화될 수 있을까. 근대 국가는 우선 국가를 부강하고 건강하게 만들어야 했다. 보건, 위생, 노동, 교역을 원활하게 해줄 도로, 운하 등의 모든 부문에 개입하고 통치해야 했다. 도시의 발달은 사람들이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 ‘잘’ 살기를 원하게 했다. 이제 국가는 개인들의 행복, 이익까지 증진하고 조절해야 했다. 국가는 더 이상 초월적이고 종합적인 원칙으로서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 안에 있었고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근대의 시민사회였다.

 

시민사회는 개인들의 자유와 자발성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안전과 치안이라는 명목으로 경찰제도를 탄생시켰다. 이 사회에서는 감시와 통제 아래, 충성이라는 봉건적 형식이 아니라 품행에 있어서 국가의 온갖 명령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사회였다. 사회의 진리, 국가의 진리는 이미 국가 자체가 독점하고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시민 전체)가 그 보유자가 되어야 했다.

 

푸코는 이 강의에서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사용되지 않았던 근대적 의미에서의 ‘통치’ 개념에 주목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이 ‘통치’ 개념이 서구에 퍼졌는데 목자의 권력이 바로 그것의 토대였다. 목자 권력은 이동하는 무리에 대해, 개개인에게 행사되었고 이러한 목자의 통치 방식은 정확히 유동하고 개인적인 시민 사회를 통치하기에 적합했다.

 

근대 국가 이전의 통치가 덕이나 지혜, 정의 등에 따라 이루어졌다면 이제는 철저하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원칙에 따라 통치했다. 근대 국가에서 ‘옳고 그름’은 더 이상 문제되지 않았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근대의 개별 국가들은 서로 경쟁 상태에 놓이게 되면서 국력을 키울 필요가 있었는데 이때 고려되었던 것이 인구, 생산, 수출, 군대 등의 요소였다. 자연적인 인구의 출생, 사망률까지 합리적으로 관리하고 분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때 발달한 것이 ‘통계학’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