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광기 그리고 웃음
슬라보예 지젝.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음, 임규정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칸트는 계몽된 주체, 자율적 주체가 ‘주인이 필요 없는 주체’라고 선언하며 근대를 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자율적 주체에게 무제한적인 자유를 주는 것을 꺼리며 훈육과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지젝은 칸트의 이 모순적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칸트적 자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헤겔을 경유해 보자. 애초에 자유로운 주체를 통제하기 위해 법과 금지가 필요했던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장애물이라고 여기는 법 질서(억압)가 자유를 낳은 뒤에, 다시 그것을 통제해야 했던 것일까. 헤겔에게는 자유보다 법이 먼저이다. 법적 규범을 알아야 인간은 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도 있는 것이다. 문법을 알아야 자유롭게 말을 할 수 있듯이. 

 이 책에서 지젝은 칸트적 자유 개념의 애매성을 넘어 헤겔을 따라 지배와 예속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헤겔에세 그 둘은 대립적이지 않다. 자유는 무엇이고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자유로운 행위들은 있을지언정 그 어디에도 보편적 ‘자유’는 없다. 이 논리를 극단화 시켜보면 그 곳에는 오직 ‘예속’만 있을 뿐이다. 헤겔에게 존재는 없다. 존재자들만이 있을 뿐이고 그런 의미에서 존재는 ‘무’인 것이다. 지젝은 헤겔을 통해서 이분법의 해체와 대립의 일치를 보여주고 있다. 지배가 예속으로, 존재가 ‘무’로 이행하는 것이다. 그 둘은 대립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는 관계이며 서로 같은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뫼비우스 띠이다. 

 억압적 법이 외부의 장애물인가. 아니면 인간이 필요로 하는 장치인가. 법은 그 자신을 따라가다 보면 자신의 대립인 위반, 범죄와 맞딱뜨리게 된다. 법 그 자신이 최초에 세워질 때 바로 위법, 위반적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감추고 은폐하기 위해 자신의 대립자로서 범죄와 위반을 필요로 하는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외부의 장애물이라고 여기는 억압적 제도, 장치들, 혹은 가부장적 아버지, 남성 등이 없다면 인간 세상은 어떻게 될까. 이 질문은 그 억압적 장치들을 옹호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 자체의 불가능성을 고집하는 것이 중요하다. 법 그자체의 불가능성을 인식하기. 그 불가능성에 대항해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을 드러내기. 저항하는 것은 오히려 그 체제를 정당화해 줄 뿐이다.

 문제는 그렇다면 그 불가능한 체제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젝은 어쩌면 랑시에르적 의미에서 무위, 곧 행동하지 않기를 역설하고 있다. 벤야민도 라캉도 중심을 갖지 않기, 행위하지 않기의 철학을 내세운 적 있다. 이러한 사유는 동양의 불교적인 사상과도 맞물린다. 불교는 모든 것을 비어 있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그 텅 비어있음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하나의 힘이기도 하다. 항아리는 비어 있기 때문에 물을 담을 수 있는 것이다. 지젝에게도 주체는 텅 비어 있다. 알튀세르에게도 주체는 없다. 그의 이름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며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으로 분류되는 것 뿐이다. 그들에게 특정한 위치에서 ‘나’는 존재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주체의 자기 동일성 개념은 여기서 무너져 버린다. ‘나’는 나를 외부에 이렇듯 객관화 시키고 거리를 둠으로써만 ‘나’일 수 있다. 나는 직접적으로 ‘나’에 도달할 수 없다. 이 객관화는 단순히 나에 대해 외부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 철학적 성찰들이 재미있는데 제 3항 즉 아버지, 법, 금지, 억압적 제도 등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내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은 오늘날 포스트모던이 삭제한 ‘억압’, ‘아버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행위하지 않기는 허무주의적이라기 보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기존의 체제를 변화시켜 보려는 의지로 읽어야 한다.

 지젝은 관념론으로써 유물론을 대체하자고 제안하는데 기존의 유물론이 물질, 외부의 실재에 고착되어 있었다면 지젝은 그 물질이라는 것이 우연적 산물이며 그 자체 공백, 텅 비어 있음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 과제는 무엇보다 어려운데 관념론적 우회를 통해서 시도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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