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의 공동체
장 뤽 낭시 지음, 박준상 옮김 / 인간사랑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무위의 공동체>

 

공동체는 비-행동(무위)으로서 가능하다. 비 행동이란 비등가적인 것을 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자유주의적 교환 체계에 대한 대안으로 기능할 수 있다.

 

공동체는 주체들 사이에 어떤 보다 상위의 삶으로 엮이지 않는다. 공동체는 이루어야 할 과제가 아니다. 그것은 조국, 피, 민족, 해방된 인간성, 팔랑스테르, 가족 등으로 변형시키는 과정을 실현시키지 않는다.  공동체는 실행 불가능한 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죽음에 의해 질서지워져 있다. 따라서 공도체는 언제나 타인에게 드러난다.

 

공동체는 융합을 위한 계획의 대상이 아니다. 생산이나 실현을 위한 대상도 아니다. 나치 독일은 '아리안 족' 공동체에서 순수한 내재성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자들을 희생시켰다. 그 결과는 독일 민족 자체의 자멸이었다. 그들은 연합의 공동체를 상상했다. 하지만 공동체는 특정 목적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에 탈존, 외존한다. 주체도 마찬가지다. 주체가 주체 안에 있다면 타자와 소통할 수 없다. 주체는 관건이 아니다. 주체 자체가 이미 타자이며 주체는 자기 바깥에 존재한다. 외존한다.

 

서양의 경우 연합은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신성은 외부에 있었고 그래서 공동체의 신성한 본질은 불가능한 것 그 자체였다.

 

교환과 계약의 체계인 근대는 그 무너지기 쉬운 시스템을 보존하기 위해 인간을 공도에로 악착스럽게 묶어 고정시켜 놓았다.

 

바타유는 공산주의가 그 원리에서 인간의 최고 주권을 부정, 인간에게 인간 내재성으로 환원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데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동체, 그리고 주체는 그 자체로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이 그 자체 하나의 연합을 이룬다. 공동체라는 단일체, 실체는 없다. 그것은 완성될 수 없고 미완성이다. 미완성만이 그 원리이다. 미완성을 결핍이나 불충분이 아니라 역동성으로 받아들이자. 그 안에서 단수의 주체들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 안에서 자리잡지 않고 움직이기.

 

낭시는 어쩌면 모나드들이 움직이는 그런 유목적 공동체를 상정하고 있는 것 같다. 들뢰즈와 닮아있다고 할까.

 

단수의 주체라는 개념이 그렇다. 중앙에 집중될 필요없는 공동체. 중심에 대한 반발. 그러나 반발에 앞서 그는 중심 자체를 해체하고 있는가. 중심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라면 그에 반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혹시 중심이 가능하다고 전제하고 그에 대해 반발하는 것은 아닌가.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반발할 필요가 없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행동하지 않기'를 들고 나왔다. 중심, 상징적 질서를 무효화 하기. 벤야민, 지젝의 생각도 같다. 행위하지 말자. 제도에 저항하지 말자. 저항한다는 것은 제도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제도  자체가 불가능한 구성이다. 그것을 알아차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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