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아버지(금지)에 의해 억압된다. 그때 어머니는 대상a로서 주체가 욕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어머니에게 직접 다가갈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끔찍함만 있을 것이다. 이 끔찍함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해 주는 것이 법이 아닐까. 법과 금지는 불가능한 것을(어머니) 금지함으로써 인간이 자유롭게 (어머니를)욕망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라캉은 이 환상이 없다면 실재(어머니)를 직접 대면해야 하는 끔찍함이 우리를 기다린다고 말한다. 법이 억압이 아니라 인간 주체를 자유롭게 욕망할 수 있는 주체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금지가 없었다면 어머니에게 다가가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향락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주체는 금지를 위반하고자 한다. 대상a는 일종의 잉여이다. 내가 욕망하는 대상은 대상 그 자체보다 더한 무엇이 된다. 내가 부여한 이 잉여는 환상이다. 마르크스의 잉여가치 개념에서 라캉은 잉여 향락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잉여가치의 발생 근거는 한마디로 노동력의 상품화에 있다. 노동력은 화폐로 표시되어야 하고 교환되어야 한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차이에서 잉여 가치를 읽어내는 마르크스를 쫓아 라캉은 잉여향락을 찾아낸다. 아이는 엄마가 없는 사이 실패를 던지며 갔다, 왔다(포르트 다) 라고 말하면서(언어를 통해) 엄마의 부재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인다. 노동력이 화폐라는 상징적 질서(공허한, 텅빈)에서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듯이 아이는 언어 질서에서 잉여향락을 얻어낸다. 오늘날은 법과 금지, 아버지가 억압적 기제라고 저항하고 위반하고자 한다. 다원주의적, 상대주의적 포스트모던한 제스쳐가 풍미하는 시대이다. 이미 라캉이나 지젝 이전에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다원주의, 상대주의, 회의주의에 맞서 고민했다. 모두가 리더이고 모두가 주권자라면 누가 리더를 따르고자 할 것인가. 그야말로 난장판인 것이다. 지금 우리는 다시 이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라캉의 관점은 흥미롭다. 인간은 환상을 통해 살고 법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날것 그대로의 실재의 끔직함을 인간은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명 아니겠는가. 문명 속에는 예술도 있고 법도 있고 금지도 있다. 이 모든 것을 부정한다면 언어적 존재로서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며 인간이길 포기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그렇게 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