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날 미국과 이스라엘에서 사회와 정치의 군사화는 '아버지'의 지배가 끝났다면서도 '진정한' 아버지를 투사함으로써 아버지의 권위를 유지하는 페티시적인 정치를 세운다. 조르쥬 아감벤이 주장하듯 이런 정치는 예외를 규범으로 바꿔치기 하고 권력의 모든 과잉들을 정당화하는 영구적인 위급 상황을 만든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금지의 중지 속에서 즐기는 한편 감시와 통제의 훨씬 더 정교한 체계에 구속된다. 자유주의와 정치의 군사화가 보여주는 금욕주의는 결국 동전의 양면이다. 라캉에 의하면 진정한 자율성의 위치는 '내가 모든 것에 책임을 진다'가 아니라 '나는 전부를 책임지지 않는다'이다. 제젝은 자율적인 칸트적 주체를 비판하면서 대타자가 기능하지 않는다면 이웃이 괴물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상상적 이자 관계를 넘어서 제 3항, 객관성, 보편성, 상징계의 필요를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거세된 주체는 향락을 포기하면서 금지와 억압이 없다면 향락이 가능할 것이라는 환영을 유지한다. 이 환상은 금지에 대한 위반을 발생시킨다. 하지만 주체의 욕망(향락)은 도달 불가능한 것으로서 상징적 법과 질서는 단지 불가능한 것을 금지할 수 있을 뿐이다. 불가능한 것을 금지하는 속임수를 씀으로써 위반을 조장하고 유발한다. 이 위반을 통해서 상징적 제도는 공고해지는데 이 위반의 과정에서 상징적 제도 자체는 이제 분열되거나 틈새를 가진 것이 아니라 완전체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애초에 불가능한 것을 주체가 인식한다면 위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주체는 자신의 불가능성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환상을 만들어 그 안에 안주하고자 한다. 이 위반을 통해 주체는 향락(불가능한 것을 완전한 무엇으로 만듦으로써, 이때 동원되는 것이 라깡의 대상a이다-대상a는 그 자신 보다 더한 무엇, 잉여이다)을 얻을 수 있고, 상징계는 그러한 위반과 저항으로써만 완전해지기 때문에 위반을 필요로 한다.
지젝은 우리가 말하는 '주체' 자체를 불가능한 것으로 본다. 상징적 질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이 불가능성, 부정성을 은폐하고 회피하는 대신 그 부정성과 함께 머물 것을 주장한다. 진정한 유물론은 물질의 공백(우연성, 부정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캉은 코페르니쿠스보다 케플러가 더 혁명적이라고 보았다. 중심을 옮겨 놓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심의 공백을 주장하는 것이 더 혁신적이라고 본 것이다.
지젝은 상징적 질서, 억압적 법과 제도를 폐기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질서 자체의 부정성,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면서 분명히 제 3항, 상징계가 필요하다고 본다. 문제는 이 상징계의 '불완전성'을 드러내고 '완전한 무엇'이라고 상상하는 것과 단절하는 것이다. 상징계가 부재한 채 상상적 관계만 있는 사회에는 정치는 없고 전쟁만 존재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의자 뺏기'게임은 끊임없이 승자를 만들어 내고 승자 독식 사회를 창출한다. 그 게임에서 탈락한 자는 루저가 되고 잉여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 전쟁 상태, 야만 상태를 이제 우리는 거부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