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관계는 없다 - 성적 차이에 관한 라캉주의적 탐구 바리에테 3
브루스 핑크 외 지음, 신형철 외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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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관계는 없다>

지젝-‘코기토와 성적 차이’

지젝에 의하면 라캉은 성차란 살아 있는 존재의 궁지(상징계에 진입함으로써 발생하는 궁지)가 그 존재에게 가하는 작용의 결과하고 주장했다.  

 알튀세르적 호명 주체는 주체의 곤궁(욕망의 불가능성)을 피해서 타자가 무엇을 원하는지(케보이?)에 대한 불확실성을 피한다. 
‘당신은 내 아내야’를 통해서 나는 당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나의 근본적 불확실성을 회피한다.

상징적 질서의 공백, 불일치, 불완전함은 대상 a를 필요로 한다. 대상 a는 틈을 채워 넣는 환상. 도시 문명의 불완전함은 스스로 농촌이라는 대립물을 구성함으로써 즉 상실한, 우리가 잃어버린 대상(a)을 참조함으로써 완전해진다. 주체가 자유롭게 농촌을 욕망하는 순간 주체는 바로 그 행위를 통해서 농촌을 단념한다. 우리는 이미 농촌의 상실을 인정하고 완성해 버린 것이다. 결국 도시 문명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그 문명 자체의 불완전함을 감추고 완전한 것으로 만들어 놓는다.

-‘성적 차이의 실재’
부르주아 대 노동계급으로 구분하는 순간 하나의 잉여, 이 대립에 맞지 ‘않는’ 제 3의 요소가 존재하게 된다.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예가 그렇다. 마찬가지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순간 ‘성도착’이라는 잉여가 존재하게 된다.
민족이라는 근대적 개념은 직접적 가족이나 전통적 유대관계가 해체되면서 출현한 텅빈 기표이다. 민족적 정체성은 자연적인 것(전근대적인 것)으로서 인공적인 것과 대립된다. 제도가 사회적 인공물로 지각된 순간(근대에 들어 오직 인간 관계가 계약관계에 들어섰을 때) 중립적인 공통 토대의 역할을 하게 될 무언가(계약을 공고하게 할)가 필요했다. 근대는 전근대적인 무엇인가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라캉에 의하면 상징적 질서의 아버지, 법은 상징적 구조의 비일관성을 은폐하는 하나의 속임수, 가상이다.
포스트모던이 다양성을 들여오는 순간 근본적 적대는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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