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온 세상에 밝은 덕을 밝히고자 한 사람은 먼저 자신의 나라를 다스렸다. 그리고 자신의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집안을 반듯하게 하였다. 자신의 집안을 반듯하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몸을 닦았다. 자신의 몸을 닦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았다.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의지를 성실하게 하였다. 자신의 의지를 성실하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앎을 극한까지 확충시켰다. 그와 같은 앎의 확충은 사물을 탐구하는 데 있다.


<대학·중용> 61쪽, 주희 엮음, 김미영 옮김, 홍익출판사

  위 글은 <대학>의 경1장의 내용 중 일부이다. 흔히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알려진 내용을 조금 더 구체화시켰다. 다시 말해 수신, 즉 자기 몸을 닦는 방법에 대한 내용이 있는 것이다. 그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사물을 탐구하여 알아 나가고 그렇게 의지를 쌓아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다. 이것은 '사물에 대한 앎이 자신을 지탱하는 모양새'이다. 여기서의 앎은 결국 사물의 본모습에 대한 자신의 가치부여가 아닐까? 나와 사물의 관계,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 이러한 관계 사이에서의 나의 모습. 이러한 생각들이 이어져 나가 마침내 분명한 답에 닿을 때 자기 몸이 닦이고, 그걸로 세상을 바꾸는 시작이 진행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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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道의 옳고 그름(是非), 일의 이익과 손해(利害)는 병립할 수 없습니다. 이해만 따지고 시비를 중시하지 않으면 일을 옳게 처리할 수 없고, 시비만 따지고 이해의 소재를 강구하지 않으면 변고에 대응할 수 없습니다. 권이란 중도를 얻는 것이 중요하고 의란 마땅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니, 중도를 얻고 마땅하게 한다면 하는 일이 모두 옳고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시비도 명백하지 않고 이해도 분별하게 어려운 것이어서 선택하기 어렵다면, 일의 경중輕重과 완급緩急을 살피면 됩니다. 나라는 근본에 힘써야 하며, 일은 요령을 알아야 합니다. 근본에 힘쓴다는 것은 안을 중요시 여기고 밖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고, 요령을 안다는 것은 두 가지 중에서 중도를 쓰는 것을 말합니다. 일곱 가지 일은 이쪽이 옳으면 저쪽이 그르고, 한편이 유리하면 다른 한편이 해롭지만, 거기에 경중과 완급이 있을 것입니다.


<율곡문답> 115~116쪽, 김태완, 역사비평사

  위 글은 율곡 이이가 책문으로 제시한 글의 일부이다. 책문은 일종의 과거시험 답안지이다. 주어진 문제에 대한 자신의 지식과 견해를 드러내는 글인 것이다. 이 책문의 문제는 간단히 요약하자면, '나라 안의 일곱 가지 큰 현안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라'는 것이었다. 율곡은 책문의 서두에 위와 같은 말을 했다.
  이 글을 단지 답안의 일부로만 볼 필요는 없을 듯 하다. 이는 일을 처리하는 보편적인 처리 기준을 제시하는 것으로 봐도 될 것이다. 처리 기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판단의 핵심이 되는 생각, 다시 말해 이념일 것이다. 이념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무엇이 가장 근본적이고 무엇이 가장 시급한 것인가에 대한 가치 판단이라고 하면 될까?
  결국 나에게 무엇이 가볍고 무엇이 무거우며, 무엇이 느슨하고 무엇이 급한가를 세우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워지고 난 뒤에, 세상을 향한 일을 시작함에 오점을 크게 남기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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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나무는 완전히 멸종된 줄 알았던 라무스 마니아Ramus mania라는 야생 커피나무의 일종이었다.
(중략)
  그 나무는 왕래가 많은 길가에 있었고, 로드리게스에서는 모든 나무를 땔감으로 여겼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베어가지 못하도록 주변에 울타리를 쳤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게 특별한 나무인 모양'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울타리를 넘어가 가지를 잘라내고 잎을 따고 나무껍질을 벗겨갔다. 이런 대우를 받는 걸 보면 특별한 나무인 게 틀림없었고, 그러니 특별한 효험이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조금씩 떼어갔다. 숙취가 사라진대, 임질에 특효약이래. 로드리게스에서는 집에서 뒹구는 것 외에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기 때문에 다들 이 나무를 보러왔고, 그렇게 조금씩 잘라가고 꺾어가다 보니 금세 시름시름 죽어갔다.
  첫 번째 울타리가 소용이 없다고 판명되자 이번엔 주변에 가시철망을 둘렀다. 그리고 첫 번째 철망 주변에 두 번째 철망을 두르고, 두 번째 주변에 세 번째 철망을 두르면서 울타리가 반 에이커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나무를 지킬 관리인도 임명했다.
  큐 왕립식물원에서는 하나 남은 나무에서 잘라낸 부분으로 뿌리를 내려 두 그루를 새로 육성한 후 야생에 다시 옮겨 심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 노력이 성공을 거두기 전까지는 철망 바리케이드를 두른 이 한 그루만이 지구상에서 자신의 종을 대표하는 유일한 나무로 남을 것이며, 한 조각을 떼어 갖겠다고 나무를 죽이려드는 사람들로부터 계속 보호해야 할 것이다. 도도가 멸종한 탓에 우리는 더 슬프고 더 현명해졌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단지 더 슬프고 정보만 많아졌을 뿐이라는 증거들도 산적하다.


<마지막 기회라니?> 329~330쪽, 더글러스 애덤스, 마크 카워다인, 홍시

  "환경이 밥 먹여주나?"라는 논리(혹은 주장)를 듣곤 한다. 조금 세련되게 말해 보자면, "환경의 파괴로 발생하는 비용보다 그 파괴의 산물로 얻을 수 있는 편익이 크다면 환경 파괴도 나쁜 것은 아니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어떤 이들은 환경 파괴라는 것이 과대평가된 위험이라고 주장한다. 환경 파괴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지구 온난화의 피해는 실제보다 과장되어 있고, 그 피해조차도 발전한 과학의 힘으로 수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부끄럽지만 나는 과학에 대한 앎이 부족한지라 어느 쪽의 말이 맞을지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고작 나무 한 그루 가지고?"라는 말로 위 글을 평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나 남은 나무를 재생시키려는 시도는 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저 한 그루 남은 나무를 재생시키려는 시도는 우리 인류의 삶이 좀 더 다양해지기 위한 의미가 있다. 모두가 판검사나 의사가 되는 세상보다는 다양한 직업이 있는 세상이 훨씬 더 살기 좋은 세상일 것이다.
  어떤 현상을 설명하고 추정하는 공식에서 잔차(residual) 항목이 있는 걸 볼 수 있다. 공식과 실제 데이터 사이의 차이가 바로 이 잔차이다. 이 잔차의 존재는 어쩌면 추상화된 공식과 실제 현실이 다름을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단순화는 생각을 간결하게 정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단순하게 만든 세상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조금은 더 다양하고 '현실같기' 위해서, 나는 저 한 그루 남은 나무가 처한 운명을 슬퍼하고, 나무의 번식이 성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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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엄(峻嚴)한 마음으로 고고(孤高)하게 행동하고 세상에서 떠나 속습(俗習)에 등을 돌린 채 고상한 논의(論議)를 하며 세상을 원망하고 헐뜯는다 함은 거만한 태도를 해 보이는 것일 뿐이다. 이는 산골짜기에 숨어 사는 사람, 세상을 비난하는 사람, 지칠 대로 지쳐서 깊은 못에 몸을 던지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다.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을 말하고 공손하게 겸양(謙讓)한다 함은 [자기 자신의] 수양(修養)을 하는 것일 뿐이다. 이는 평온한 세상에 사는 사람, 교육을 일삼는 사람, 한가하게 사는 학자가 좋아하는 것이다. 뛰어난 공적을 말하고 큰 공명(功名)을 세워 군신(君臣)의 예(禮)를 정하고 상하[의 질서]를 바로잡는다 함은 정치를 하는 일일 뿐이다. 이는 조정(朝廷)에서 일하는 사람, 군주를 존중하고 나라를 강하게 하는 사람, 공적을 세워 적국을 병합(倂合)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다. 인적이 드문 시골에서 지내거나 조용하고 넓은 곳에 있으며 낚시나 하고 한가하게 산다 함은 도피하는 것일 뿐이다. 이는 강해(江海)에 노니는 사람, 세상을 피하는 은둔자(隱遁者), 하릴없이 한가한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다.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하여 심호흡을 하며 곰이 나뭇가지에 매달리듯 새가 목을 길게 늘이듯 체조를 한다 함은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일 뿐이다. 이는 장생법(長生法)의 수행자, 육체를 단련하는 사람, 팽조(彭祖) 같은 장수자(長壽者)가 좋아하는 것이다.


<장자> 397쪽, 안동림 역주, 현암사

  지금까지 해 온 것이 단지 거만한 태도를 해 보이는 것일 뿐이며, 내가 숨어 살며 세상을 비난하며 지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못에 몸이라도 던져야 한단 말인가? 장자는 정신을 잘 지켜 고요하고 순수함, 거짓됨 없는 자연스런 행동을 통해 얽매이지 않는 것으로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순수 소박하라는 것이다.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아니, 굳이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인가? 과연 이 글쓰기가 나의 때를 벗겨내는 것일까, 오히려 더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하지만 계속 쓸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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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茶를 몇 순배 돌린 뒤에 반선은 소리를 내어 조선 사신이 온 이유를 물었다. 그 목소리가 전각 안을 울려 마치 항아리 안에서 외쳐 부르는 것 같았다. 엷은 미소를 띠며 머리를 구부려 좌우를 둘러보는데, 눈썹 사이에 주름이 생기며 동자가 반쯤 튀어나왔다. 눈을 얇게 뜨고 깊이 이리저리 굴리는 품이 흡사 근시안처럼 보였으며, 눈알 아래는 더욱 하얘지고 흐르멍덩해져서 더더욱 정채가 없었다.
  라마가 말을 받아서 몽고 왕에게 전하고, 몽고 왕이 군기대신에게 전하고, 군기대신이 오림포에게 전해서 우리 통역관에게 전하게 했으니, 대개 다섯 차례나 통역을 거쳤다. 상판사 조달동趙達東이 일어나 팔뚝을 휘저으며,
  "만고에 흉악한 놈일세. 반드시 뒤끝이 좋지 않아 개죽음을 하고 말 거야."
라고 말하기에 내가 눈짓으로 말렸다.


<열하일기 2> 250쪽, 박지원, 김혈조 옮김, 돌베개

  유가의 선비 된 입장에서는 이단인 티벳 불교의 판첸 라마를 보았으니, 일어나 팔뚝을 휘저으며 욕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욕을 하게 되기까지의 정황은 어떠한가? 조선 사신이 청나라에 오자, 청나라 황제는 사신들을 귀히 여겨 자신의 스승인 판첸 라마를 만나게 한 것이다. 판첸 라마 역시 조선 사신의 안부를 물었으니, 이는 국가의 사신을 대하는 예법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단이 한 짓이다. 국가의 예법이나 공공의 안녕과는 무관한, 이는 대의로 한 욕설이다. 이 행실이 열하일기에 기록되어서, 나중에 이 책을 본 선비들은 상판사의 높은 의기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했을 것이다.
  문득 책을 덮고 생각해 보니, 우리 주위에도 대의를 위해 광장에서 각목을 들고 가스통을 열어 불을 붙이며, 죽은 이의 영정을 뺏고 태워 부수고 욕하며, 그들의 대의를 따르지 않는 자를 보면 그게 죽은 자건 산 자건 가리지 않고 비웃고 욕하고 조롱하기를 서슴치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아, 높은 의기여! 아, 법률과 공공질서조차 염두에 두지 않는 꼿꼿함이여! 나라의 법률이 지엄하여 그 큰 선비들의 이름을 차마 여기에 기록하지 못함을 한스러이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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