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茶를 몇 순배 돌린 뒤에 반선은 소리를 내어 조선 사신이 온 이유를 물었다. 그 목소리가 전각 안을 울려 마치 항아리 안에서 외쳐 부르는 것 같았다. 엷은 미소를 띠며 머리를 구부려 좌우를 둘러보는데, 눈썹 사이에 주름이 생기며 동자가 반쯤 튀어나왔다. 눈을 얇게 뜨고 깊이 이리저리 굴리는 품이 흡사 근시안처럼 보였으며, 눈알 아래는 더욱 하얘지고 흐르멍덩해져서 더더욱 정채가 없었다.
라마가 말을 받아서 몽고 왕에게 전하고, 몽고 왕이 군기대신에게 전하고, 군기대신이 오림포에게 전해서 우리 통역관에게 전하게 했으니, 대개 다섯 차례나 통역을 거쳤다. 상판사 조달동趙達東이 일어나 팔뚝을 휘저으며,
"만고에 흉악한 놈일세. 반드시 뒤끝이 좋지 않아 개죽음을 하고 말 거야."
라고 말하기에 내가 눈짓으로 말렸다.
<열하일기 2> 250쪽, 박지원, 김혈조 옮김, 돌베개
유가의 선비 된 입장에서는 이단인 티벳 불교의 판첸 라마를 보았으니, 일어나 팔뚝을 휘저으며 욕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욕을 하게 되기까지의 정황은 어떠한가? 조선 사신이 청나라에 오자, 청나라 황제는 사신들을 귀히 여겨 자신의 스승인 판첸 라마를 만나게 한 것이다. 판첸 라마 역시 조선 사신의 안부를 물었으니, 이는 국가의 사신을 대하는 예법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단이 한 짓이다. 국가의 예법이나 공공의 안녕과는 무관한, 이는 대의로 한 욕설이다. 이 행실이 열하일기에 기록되어서, 나중에 이 책을 본 선비들은 상판사의 높은 의기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했을 것이다.
문득 책을 덮고 생각해 보니, 우리 주위에도 대의를 위해 광장에서 각목을 들고 가스통을 열어 불을 붙이며, 죽은 이의 영정을 뺏고 태워 부수고 욕하며, 그들의 대의를 따르지 않는 자를 보면 그게 죽은 자건 산 자건 가리지 않고 비웃고 욕하고 조롱하기를 서슴치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아, 높은 의기여! 아, 법률과 공공질서조차 염두에 두지 않는 꼿꼿함이여! 나라의 법률이 지엄하여 그 큰 선비들의 이름을 차마 여기에 기록하지 못함을 한스러이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