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나 수행을 하다 보면 하기 싫고 꾀가 날 때가 있다. 그렇게 몸뚱이 하나 꼼짝하기 싫을 때 그 마음을 누르고 기도를 하면 기도에 힘이 생긴다. 어렵고 힘들다고 한 번 물러서면 두 번 물러서게 되는 것이고 오늘 할 일을 못하면 내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영원히 못하게 되는 것이다.
기도를 하다 어려운 고비가 생기는 것을 불교에서는 마장이라고 한다. 그런데 돌아보면 마장은 결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무너지는 건 내 마음이다. 세상을 속이기 전에 자신을 먼저 속이고 세상과 타협하기 전에 자신과 먼저 타협하는 것이다. 기도의 성취가 나 자신에게 달린 것처럼 마장을 극복하는 것도 고스란히 나 자신에게 달렸다.
드디어 천일기도를 시작한지 오백 일이 되던 날, 기도를 마치고 신도들을 향해 삼배를 했다. 내가 절을 하자 당황한 신도들이 황급히 일어나 절을 했다. '여러분이 있어서 여기까지 왔다'는 내 말에 신도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스님은 사춘기> 236쪽, 명진 스님, 이솔출판
100일을 기약하고 시작한 이 글쓰기가 오늘로 50일이 되었다. 이 책의 위 글은, 그 중에서 마지막 문단은, 내가 이 글쓰기를 중단하지 않고 50일이 되면 옮겨 보려고 생각한 글이었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막상 나의 마음을 울리는 것은 그 위의 문단들이다.
나는 이 글쓰기를 언제나 진지하게 해 왔는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기꺼이 예, 라고 대답할 수는 없다. 때로는 무성의하게, 때로는 다른 마음을 가지고, 때로는 전전긍긍하면서 써 온 적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매일매일 꾸준하게 쓰기'라는 목적은 지켜오려고 애써왔고, 지금 일단 반 오는 동안 그 목적에는 어긋남 없이 해 왔다.
나는 이 글쓰기를 언제나 진지하게 해 왔는가? 다시 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아니오, 라고 답한다. 나는 한 번이라도 이 글쓰기를 진지하게 한 적이 있는가?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나는 적어도 이 질문만큼은 당당히 예, 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남은 50일 동안은, 더욱 더 당당하게 예! 라고 대답할 수 있는 기간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