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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그동안 수없이 들은 책이다. '무슨 책 제목이 이렇게 길어'하면서 어깃장을 놓기도 했다. 일반 소설을 자주 읽지 않는다는 핑계를 내세워 요리조리 피해왔다. 불순한 의도를 품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은 닳아 없어질 정도로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발행일을 보니 초판본이다. 한 권의 책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손을 지나온 것일까. 도서관에 새 책으로 사달라고 하면 '예산이 부족하다'고 하겠지. 흠
프로야구 원년, 1982년 중학생이 된 주인공은 자연스럽게 삼미 슈퍼스타즈의 어린이 회원이 된다. 기업이 운영하지만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프로야구이니 당연한 수순이다. 내가 부모를 고를 수 없듯, 응원하는 프로야구팀 역시 고를 수 없다. 인연을 만나는 것처럼 프로야구팀을 만나는 것도 마치 운명 같다. 그게 왜 운명이냐고? 그건 야구를 좋아하면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각설하고,
1983년의 한때를 제외하고 항상 지기만 했던 삼미 슈퍼스타즈는 1985년 청보 기업에 매각되면서 세상에 사라진 별이 되었다. 소년은 고등학생이 되었고, 결국 소속이 문제라는 깨달음(?)을 얻고 공부에 매진한다. 일류대에 진학해 대기업에 들어갔지만 1998년 실직과 이혼을 겪는다. 그리고 두 줄의 문장을 남기고 떠난 친구가 돌아온다. 친구가 돌아오자 어쩐 일인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창단된다.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는 삼미가 완성한 '자신의 야구'를 하는 팬클럽이 말이다.(사실 이 문장은 조롱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별로다. 당시 뛰었던 선수에게나 그들을 좋아했던 팬에게도 말이다)
가벼움과 무거움을 동시에 지닌 글이다. 다른 이의 말을 빌리자면 '떠벌떠벌한 문체'에 가벼움이 지나친 게 아닐까 싶다가도, 시대의 단면을 뚫을 정도로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글이다. 야구를 좋아하는 소년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소년이 살았던 당시의 시대도, 현재는 중년이 됐을 그에게 시대는 한순간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가 아니라 나를 대입해도 다르지 않을 이야기다.
프로야구팀의 어린이 회원까지는 아니었지만, 유년기 주말의 대부분을 야구 시청으로 보냈던 터라 삼미 슈퍼스타즈의 고별전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내가 사랑하고 욕하고 그래도 징글징글하다며 보듬어줄 수밖에 없는 그 팀이 사라진다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나도 한때 야구를 좋아했었는데, 하며 돌아볼 자신이 없다.
10번의 기회 중 한두 번의 안타를 칠까 말까 한 모두의 평범한 인생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1할 2푼의 승률을 숙명처럼 끌어안고 사는 소년들이 있었다. (중략)
프로야구 원년. 우리의 슈퍼스타즈는 마치 지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온 패배의 화신과도 같았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 오늘도 지고, 내일도 지고, 2연전을 했으니 하루를 푹 쉬고, 그 다음 날도 지는 것이다. 또 다르게는 일관되게 진다고도 말할 수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용의주도하게 진다고도 말할 수 있겠으나, 더 정확한 표현을 빌리자면 주도면밀하게 진다고도 말할 수 있고, 쉽게 말하자면 거의 진다고 할 수 있겠다. 아무튼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크기 때문일까. 프로야구가 개막되고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났을 때 유니세프의 철저한 외면 속에서 인천의 소년들은 점차 늙어가고 있었다. - 60~61p.
생각해보니, 내 인생은 과연 별 볼일 없는 것이었다. 평범하고 평범한 가문의 외동아들이었고, 거의 이대로 평범하고 평범한 가문의 아버지가 될 확률이 높은 인생이었다. 타율로 치면 2할 2푼 7리 정도이고, 뚜렷한 안타를 친 적도, 그렇다고 모두의 기억에 남을 만한 홈런을 친 적도 없다. 발이 빠른 것도 아니다. 도루를 하거나 심판을 폭행해 퇴장을 당할 만큼의 배짱도 없다. 이대로 간다면..... 맙소사, 이건 흡사 삼미 슈퍼스타즈가 아닌가.
(중략)
그것은, 이제는 세상에서 사라진 별 삼미 슈퍼스타즈였다.
그날 밤 나는 새로운 사실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 그저 평범하다고 생각해온 내 인생이 알게 모르게 삼미 슈퍼스타즈와 흡사했던 것처럼, 삼미의 야구 역시 평범하다면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야구였단 사실이다. 분명 연습도 할 만큼 했고, 안타도 칠 만큼 쳤다. 가끔 홈런도 치고, 삼진도 잡을 만큼 잡았던 야구였다. 즉 지지리도 못하는 야구라기보다는, 그저 평범한 야구를 했다는 쪽이 확실히 더 정확한 표현이다. - 124~125p.
마치 쉬지 않고 달리는 전철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느낌이었다. 간혹 그 흔들리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쉴 적이면, 어김없이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주치는 전철의 창가에 선 누군가의 얼굴처럼, 그 희고 아름다웠던 얼굴은 휙 하고 다가왔다 사라져버렸다. 헤어진다는 것은 - 서로 다른 노선의 전철에 각자의 몸을 싣는 것이다. 스칠 수는 있어도, 만날 수는 없다. - 205p.
그 <자신의 야구>가 뭔데?
그건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야. 그것이 바로 삼미가 완성한 <자신의 야구>지. 우승을 목표로 한 다른 팀들로선 절대 완성할 수 없는 - 끊임없고 부단한 <야구를 통한 자기 수양>의 결과야.
뭐야, 너무 쉽잖아?
틀렸어! 그건 그래서 가장 힘든 <야구>야. 이 <프로의 세계>에서 가장 하기 힘든 <야구>인 것이지. 왜? 이 세계는 언제나 선수들을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야. - 25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