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캉티뉴쓰 호텔
리보칭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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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법이 난해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도무지 살해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고차 방정식.

마침 호텔에 묵고 있던 조류학자 푸얼타이 교수는 부캐가 명탐정으로 오리무중에 빠진 경찰 사건들의 해결사로 이름이 드높다. 실마리를 찾기 힘든 이번 사건조차 그는 놀랍도록 간단명료하게 해결하는 데... 」

 

하나의 진실을 두고 보통 4명 정도의 핵심 주변 인물들이 각자의 진실을 밝힘으로써 입체적인 진실에 다가가는 '라쇼몽'식 구성을 미칠 듯이 좋아한다. 추미스 계열로는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이나 박설미의 <사소한 거짓말> 같은 소설들이다.

대만 작가 리보칭이 쓴 <그랜드 캉티뉴쓰 호텔>은 4명의 화자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흡사하긴 하지만, 분위기와 궤적은 사뭇 다르다. 다중시점이 선사하는 매력이 넘치는 이 소설은 뛰어난 선수들로 구성된 계주 팀 같다.

첫 번째 주자는 앞서 말한 푸얼타이 교수, 두 번째는 전직 '형사 콜롬보'급 베테랑 경관 뤄밍싱, 세 번째는 여성 변호사 거레이(그녀는 뤄밍싱의 전처이기도 하다), 마지막 주자는 왕년의 괴도 인텔 선생이다. 푸얼타이 교수부터 본인 선에서 사건은 해결된 듯 보이나, 그게 끝이 아니었음은 뤄밍싱에 가서 곧바로 드러난다. 바통이 이어지면서 과거가 소환되기도 하고, CIA나 훈련된 킬러, 재계의 카르텔까지 등장하면서 사건은 확대되고 판은 커진다. 별 연관성이 없어 보였던 다른 사건과의 연결 고리도 발견되고, 주자가 바뀌면 앞 주자의 가설이 일부 뒤집히기도 하면서 점층적으로 사건의 결론에 다가가는 방식이다. 묵직한 한 방이나 강렬한 반전이 있기보다는 잔펀치가 소나기처럼 계속 쏟아진다고 표현해야 할까. 계속 펀치를 맞다 보니 후두부의 타격감은 면역이 되어 오히려 약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소설의 분위기가 비장하거나 리얼하진 않다. 이중인격을 지닌 인텔 선생이나 차이궈안의 희화화한 최후에서 보듯 코믹한 요소가 양념처럼 소설에 배어있어서 사체의 숫자에 비해 분위기는 밝다. 소설의 제목이나 표지에서 보듯 마치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연상시킨다.

작법이나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방식 모두 흥미진진하고 새롭다. 타이완 · 홍콩 미스터리 소설 1위에 오른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중화권 미스터리의 일정 수준은 종합선물세트인 <쾌:젓가락 괴담 경연>을 통해 익히 알았지만, 리보칭의 <그랜드 캉티뉴쓰 호텔>은 적어도 대만의 추미스 팬들이 자국 작품의 질적 수준에 불만이 생기진 않으리란 사실을 증명한다. 굳이 찬호께이의 헌사를 띠지에 두르지 않아도 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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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스퀘어
안드레 애치먼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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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태생으로 하버드 대학원에서 졸업 논문을 준비하던 나는 여름 방학 기간에 칼라지라는 베르베르인을 만난다. 프랑스에 대한 동경이란 공통점으로 둘은 급속히 친해지고, 그렇게 계절은 지난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던가! 이들의 우정 역시 관계의 종말을 향해 가는데... 」


처음 접하는 안드레 애치먼의 소설이다.

작가들은 늘 자기가 쓰고 싶은 자전적인 이야기가 있기 마련인데, <하버드 스퀘어>는 안드레 애치먼 자신의 이야기가 상당 부분 원료에 배합돼 있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프랑스어를 쓰는 유대인 부모 밑에서 성장했고 반유대주의를 비롯한 정치적 문제로 이집트를 떠나 뉴욕에 정착했고 하버드에서 약 7년간 학업에 정진한 애치먼의 '하버드에서 보낸 여름날'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

소설의 핵심, 거친 택시 운전사 칼라지는 체 게바라 스타일의 외모에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영혼을 지닌 듯한 인물로 묘사된다. 인종의 용광로인 미국에서 어디 태생이고 하는 전사(前史)가 그다지 흥미를 끌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라지가 하버드가 위치한 케임브리지까지 흘러온 인생 유전은 간단하지 않다. 더군다나 그는 현재 택시를 몰긴 하지만 영주권 문제로 언제 추방될지 모르는 불안한 신분이다.

누구나 한 겹으로 포장돼 있는 간단명료한 인물은 없다. 이럴 땐 이렇게 반응하고 저럴 땐 저렇게 반응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면면을 지닌 게 사람이란 생물의 속성이기에, 몇 마디의 형용사로는 정의할 수 없는 다면적인 모습을 지닌 게 인간이다.

칼라지란 인물을 보자. 분명 주인공 나보다는 몇 살 많은 인물일 그는 다층적인 면모를 지녔다. 세상의 밑바닥을 경험한 듯한 거친 면모, 세상 모든 여자는 자기 침대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믿는 섹스 어필과 강한 마초 기질, 반사회적인 성향, 시시때때로 선을 넘는 안하무인한 태도...

소설의 상당 부분은 칼라지에 대한 묘사, 주인공 내 눈에 비친 그의 모습과 그 모습을 보는 내 태도의 변화에 바쳐진다. 입체적인 인물 칼라지가 변한 게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나'의 태도와 평가가 바뀐 것이다.

처음에 나와 완전히 다른 인물 칼라지는 신선한 매혹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이런저런 모습을 보는 동안 최초의 매혹은 선도(鮮度)를 잃고 만다. 여기에는 하버드 대학원생이라는 '지적 허영심'의 강력한 쉴드가 작동했음은 물론이다. 삶의 우물이 많은 아랍인 칼라지와 '비교적 바른 생활'인 유대인 나와는 애당초 우정이란 나무가 굳건히 뿌리를 내리기엔 토양이 연약했다. 결국 나는 그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이별의 순간마저 만들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었지만 타인은 절대로 나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없고, 결국에 그런 허상은 내 안에서 끄집어내 던져서 깨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197쪽

주인공인 '나'의 주위에도 몇 명의 여성들이 스쳐 지나가지만, <하버드 스퀘어>에서 그다지 큰 비중으로 그려지진 않는다. 칼라지 외에는 결국 다른 이들은 모두 소리 없이 스쳐가는 병풍들처럼 묘사된다.

'하버드의 뜨거운 여름날'은 애치먼의 정교하게 세공된 문장으로 사려 깊게 되살아난다. 소설의 뒷날개에는 애치먼을 '관계의 아득함을 그리는' 작가로 소개한다.

하버드란 단어에서 느껴지는 지적인 분위기나, 대학가의 낭만과 이 책은 거리가 있다. 또한 두 명의 남성이 뿜어내는 예상되는 서사로 흘러가지도 않는다. 다만 젊은 날의 우리는 얼마나 부족한 존재였고,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는지 깨닫게 만든다. '젊은 날의 초상'이 늘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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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한 선진국 - 대한민국의 불평등을 통계로 보다
박재용 지음 / 북루덴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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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주문


흔히 한 나라의 경제 수준을 평가하는 지표인 GDP 기준으로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이고, OECD 내 국제적인 위상도 그 정도 회의에 초대받을 만큼 올라섰다. IT 강국답게 노동자 1만 명당 산업용 로봇 사용량으로 따지는 로봇 밀집도는 세계 1위다.(107쪽) 비단 경제력뿐 아니라 최근에는 BTS, 오징어 게임, 기생충 등 한국 대중문화의 인기도 전 세계를 강타하여 국민의 자부심을 높였다. 숫자로 드러나지 않는 사회 전반적인 도덕 지수는 그만큼은 아니라고 보지만, 어쨌든 전쟁의 포화속에서 탄생한 분단국인 점을 감안하면 분명 대단한 성취라 하겠다.

박재용이 쓴 <불평등한 선진국>(부제 : 대한민국의 불평등을 통계로 보다)은 그러한 경제 성장의 어둠을 통계로 톺아보는 책이다. 통계는 가장 객관적인 잣대로 활용되어야 마땅하지만,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제시하느냐에 따라 오차도 많을 수 있다. 정치적으로 악용될 여지가 있단 이야기다.

이 책에 제시된 통계의 오류 몇 가지를 살펴보자.

1) 업무상 사고 재해율 0.5% - 우리나라는 산재보험에 따라 보상을 신청하고 승인을 받은 사람을 기준으로 통계를 낸다. 따라서 특수고용 노동자처럼 애초에 산재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노동자는 여기에서 누락된다.

2) 2020년 제외하고 지난 5년간 자영업 폐업률 11% 내외 - 폐업률은 가동사업자 수로 폐업사업자 수를 나눈 것인데, 비교적 오래 자영업을 하는 이들은 계속 버티고 있으니 전체 폐업률은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확연히 낮게 나타난다.

3) 장애 출현율(장애인 수/전체 인구) 5.39% - OECD 국가 중 가장 작은 편.

이는 장애 판정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으로, OECD 대부분의 국가 기준으로는 장애로 판정받아 공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많은 이들이 우리나라에선 장애를 인정받지 못한다.

실업률은 말할 필요도 없고, 이쯤 되면 '눈 뜨고 코 베어 가는' 통계라고 할만하다.

 

우리는 악명 높은 통계를 익히 알고 있다. 낮은 출산율과 높은 자살률.

이 책을 통해, 보다 세부적으로 OECD 불명예 1위가 속출한다.

노인 자살률, 노령층의 상대적 빈곤율, 내국인 노동자와 외국인 노동자의 임금 격차, 국회의원 중 여성의원의 비율(이건 일본이 1위), GDP 대비 장애인에 대한 공적 지출, 낮은 조세 부담률...

'아! 대한민국'이란 유행가가 허망하고, 세계 10위권 국가라는 한국의 민낯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책을 정독할수록 읽기가 곤혹스러울 지경이다.

저자는 기밀이 아닌,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통계청 통계포털사이트를 비롯한 정부 자료에 근거해 <불평등한 선진국>을 완성했다. 여기 적시된 통계에도 오차가 생길 수 있음은 앞서 언급했고, 저자는 이런 통계만 잘 살펴봐도 대한민국의 현재 문제점을 적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취지로 이 책을 집필했다.

저자가 보기에 이미 대한민국은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전 세계 어디나 소득 불평등 심화가 화두긴 하지만 대한민국은 거기에 대한 정책적인 대비가 매우 부족하다.

박재용의 시선이 머무는 항목인 노동 / 청년 / 가족 해체 · 노인 · 지방 소멸 / 소수자(이주 노동자와 이주 여성, 장애인, 여성차별 등)로 나누어 본문을 구성하고 안타까운 통계를 제시하고 거기에 대한 설명을 이어간다. 특이하게 매 챕터나 부(部)가 끝날 때 '팩트 토론을 위한 간단 퀴즈'를 넣어 내용을 되새김질하는데, 무슨 교재도 아니고 왜 이런 편집을 했는지 좀 의아하다.

구성된 내용이 5부로 구분은 되어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모두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부모의 부는 자식에게 당연히 이전된다. 어렸을 때부터 좋은 주거환경에서 남보다 앞선 교육의 기회를 제공받아 야구로 보면 이미 2, 3루에 위치해 있다. 좋은 대학교를 거쳐, (부모 찬스를 쓰든 안 쓰든) 좋은 직장을 잡고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이어 나간다. 계약금이 없어 당첨된 분양권마저 포기해야 하는 서민들과는 다르게, 내 집 마련을 할 때도 든든한 부모의 지원을 받는다.

부가 세습된다면 같은 논리로 가난도 대물림된다. 이들이 상대적으로 고소득 일자리를 차지할 확률은 드물다. 오죽하면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는 지났다'라는 말을 하겠나. 치열한 취업 전쟁에 나서야 하고, 설사 일자리를 구한다 한들 임금 격차는 피할 수 없고, 열심히 살아도 나이 들면 노인 빈곤이란 현실에 처한다.

여기에 대한 부수적인 작용으로 1인 가구 증가와 출산율 저하는 운명이다.」

"이들의 노동은 경력이 되지 못하고 그저 소비될 뿐입니다." - 163쪽

너무 비관적인가?

책에 나온 무수히 많은 통계가 이런 라이프 사이클을 반영한다.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많이 알려진 핵심적인 팩트(소득 불평등, 외국인 증가, 지방 소멸, 노인 빈곤, 청년 실업 등)를 입증하는 무수히 많은 통계를 반복해서 확인하고, 그 숫자들을 나열하며 설명하는 내용이 다소 지루하고, 중언부언의 느낌이 강하게 들기도 했다. 너무 많은 통계가 제시되다 보니 오히려 '뭣이 중한디?'란 생각도 들고.

방식을 살짝 달리해서 각 챕터의 가장 핵심적인 지표를 보여주는 대표 통계 A를 설정해 설명하고, 필요하면 A1, A2 정도 예시하는 방식이면 어땠을까? '팩트 토론을 위한 간단 퀴즈'보다는 간결하게 독자의 기억에 어필하지 않을까.

 

저자의 취지는 잘 알겠다. 그래서 이 나라의 선장을 뽑는 대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단 생각이다. 대한민국의 불평등을 통계로 보면서 수치스럽다 느끼기보다는 실행 가능한 개선책을 찾아야 한다. 아마도 이런 정책은 포퓰리즘이 아닌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행위가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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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의 무덤 모중석 스릴러 클럽 50
로버트 두고니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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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참 작가는 많다. 한국에 연간 대략 250여 권 내외의 추미스 계열 책이 출간되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미처 소개되지 못하는 세계 각국에 존재하는 유수(有數)의 작가들이 많다. 이번에 <내 동생의 무덤>으로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로버트 두고니'라는 미국 작가도 그렇다. 보통 작가들은 뚜렷한 한 명의 캐릭터 시리즈도 성공적으로 이어가기 쉽지 않은 레드 오션이 장르물 시장이건만, 두고니는 '데이비드 슬로언' 시리즈, '찰스 젠킨슨' 시리즈를 인기리에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내 동생의 무덤>은 '데이비드 슬로언' 시리즈에 잠시 등장한 시애틀 최초의 여성 강력계 형사 트레이시 크로스로드를 독립시킨 또 다른 '형사 트레이시' 시리즈의 서막이다. 형사 트레이시의 전사(前史)를 밝히는 시리즈의 기원인 것.

「우애가 너무 좋은 트레이시와 세라 자매. 트레이시가 벤에게 청혼을 받은 세상에서 가장 기쁜 날 세라는 행방불명이 돼버리고,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정황 증거만으로 성범죄 전과자 에드먼드는 1급 살인 유죄를 받아 무기징역에 처해진다. 짜 맞춘 듯한 증거와 믿을 수 없는 지각 목격자, 석연치 않은 재판 과정에 강한 의구심을 가진 트레이시는 결국 고등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그날의 진실을 몸소 밝히기 위해서 경찰에 투신한다. 20년의 세월이 흘러 동생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닫혀 있던 진실의 문은 열리는데... 」

490쪽의 책에서 354쪽에 이르러, 과거의 미심쩍은 판결이 뒤집히면서 누명을 쓴 에드먼드가 석방되는 과정이 그려진다. 첫 번째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면, 남은 140쪽에서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 새로운 인물이 갑자기 튀어나올 수는 없고, 그렇다면 앞서 진술된 인물들 중에 누군가는 결정적인 카드 한 장을 들고 있단 소리인데, 트레이시가 추적을 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자매의 아빠로 밝혀지는데...

소설의 결말을 중반 이후까지 종잡지 못했다. 중간중간 작가가 흘리는 떡밥에 투척되어 나만의 시나리오를 그리기도 했건만, 결말은 나의 그것과는 달랐다. 미스터리를 읽다 보면 독자의 짐작과 결말이 동일할 때 생기는 자긍심도 있지만, 그보다는 역시 짐작을 배반하는 결말이 짜릿하다. 짐작과 간격이 크면 클수록 묵직한 타격감이 크다. 흔히 말하는 반전의 쾌감이다.

최근 무수히 쏟아지는 반전을 위한 작품으로 <내 동생의 무덤>은 쓰이지 않았지만, 소설의 결말에서 다시 한번 만나는 뜨거운 가족애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미스터리에서 만나는 이런 감동은 사뭇 신선하다.


두 개의 축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하나는 트레이시의 친구 변호사 댄의 활약으로 과거 재판의 불합리를 뒤집는 법정 스릴러이고, 다른 하나는 형사 트레이시의 수사 과정이다. 13년간 변호사 생활을 한 로버트 두고니가 그려내는 법정 신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자신감이 넘친다.

시체가 발견되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데, 여기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건 과학수사다. 과거엔 의미를 밝혀낼 수 없던 증거물들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고, 이는 에드먼드의 무죄 입증에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법정 스릴러로도, 형사물로도 흠잡을 데 없는 완성도를 보여주는 잘 쓰인 깔끔한 스릴러다. 미국에서 그리 큰 사랑을 받았다는 두고니의 작품이 왜 이제서야 소개되었는지 한탄하기 보다, 2014년 작품이지만 이제라도 선을 보이게 돼서 다행이란 생각이다. 이미 '형사 트레이시' 시리즈는 8권이 출간되었고, 현재도 집필 중이라고 전한다. '형사 트레이시'의 다른 작품, 아니면 두고니의 다른 작품을 또 만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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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니아 - 전면개정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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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탐정소설에는 반드시 시체가 등장해야 한다. 시체는 많을수록 좋다. 살인보다 가벼운 범죄는 독자가 300페이지 가까운 책을 읽게 할 동기로는 부족하다. 끝까지 읽는 독자의 노력은 보상받아야 한다."

미스터리 황금기를 대표하는 미국 작가 S.S. 밴 다인의 '20칙'중 7번째 원칙이다.

소설이 시작하고 몇 페이지 지나지 않아 일가족은 물론, 집안 경사에 놀러 온 이웃까지 무려 17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더 놀라운 건 조금 지나 범인이 범행 일체를 자백하고 자살한다는 전개다.

보통 미스터리는 세 가지 중 하나에 천착하기 마련이다. 누가(후더닛) 어떻게(하우더닛) 왜(와이더닛) 범행을 저질렀는가 밝히는 과정이 책을 읽는 재미다. '누가'는 고전기와 일본 (신)본격물에서 최고의 재미 '범인 찾기'를 선사했고, '어떻게'는 대표적으로 밀실이란 소장르에서 위세를 떨쳤으며, '왜'는 사회파 작가들의 화두라 간단히 정리해 볼 수 있겠다. '누가, 어떻게'가 소설 초반에 한여름 땡볕처럼 명백하게 밝혀진 온다 리쿠의 <유지니아>에서 남는 수수께끼는 '왜'뿐이다. 도대체 왜?

해당 독살사건(나카오가키 사건)이 일어나고 20년이 지난 시점, 누군가(!)가 당시 사건의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며 다시 과거의 기억을 헤집는다. 도대체 왜 2?

라쇼몽식 구성으로 관련자들의 진술은 이어지는데, 놀랍게도 사건을 담당한 경찰을 비롯한 몇몇 인물은 당시 유일한 생존자인 앞 못 보는 명문가 소녀가 희생자가 아닌 진범일지 모른다는 강한 의구심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앞서 밝혀진 사건의 전모는 '도서(倒敍) 미스터리'였단 말인가! 독자들은 황급히 앞서 철석같이 믿었던 '누가'와 '어떻게'를 재확인해야만 한다. 근본이 흔들리는 상황, 그럼에도 여전히 '왜'라는 숙제는 풀리지 않는다. 도대체 왜 3?

정통 미스터리에서 범인은 밝혀지고, 사건의 모든 정황이라 할 범행 동기, 수법 등은 속시원히 드러난다. 제59회 일본 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유지니아>는 그런 뻔한 길을 가지 않는, 별미를 제공하는 소설이다. 온다 리쿠는 의도적으로 곳곳에 여백을 남겨 놓아, 그곳을 독자의 상상력으로 채우게 한다. 딱 들어맞는 퍼즐이 아니라, 독자만의 퍼즐을 만들어낼 수 있는 'DIY'형이라고나 할까.

정말 아오사와 히사코는 진범인가? 헌책방 화재는? 마키코의 사망은 단지 일사병 때문일까?

<유지니아>는 비채의 일본 문학선 '블랙&화이트'의 3번째 책으로 2007년 처음 출간되었다, 14년이 지난 2021년 전면 개정판으로 우리 앞에 다시 섰다. 17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소설을 '아름답다'라고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 좋지만, 여전히 <유지니아>는 몽환적이며 탐미적인 명작이다. '온다 월드'를 탐사하기 위해선 <유지니아>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며, 여러 번 읽으면 처음 읽었을 때 몰랐던 비밀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매력덩어리다. '범인 찾기'에 다소 물린 독자라면 마땅히 <유지니아>를 펼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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