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니아 - 전면개정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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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탐정소설에는 반드시 시체가 등장해야 한다. 시체는 많을수록 좋다. 살인보다 가벼운 범죄는 독자가 300페이지 가까운 책을 읽게 할 동기로는 부족하다. 끝까지 읽는 독자의 노력은 보상받아야 한다."

미스터리 황금기를 대표하는 미국 작가 S.S. 밴 다인의 '20칙'중 7번째 원칙이다.

소설이 시작하고 몇 페이지 지나지 않아 일가족은 물론, 집안 경사에 놀러 온 이웃까지 무려 17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더 놀라운 건 조금 지나 범인이 범행 일체를 자백하고 자살한다는 전개다.

보통 미스터리는 세 가지 중 하나에 천착하기 마련이다. 누가(후더닛) 어떻게(하우더닛) 왜(와이더닛) 범행을 저질렀는가 밝히는 과정이 책을 읽는 재미다. '누가'는 고전기와 일본 (신)본격물에서 최고의 재미 '범인 찾기'를 선사했고, '어떻게'는 대표적으로 밀실이란 소장르에서 위세를 떨쳤으며, '왜'는 사회파 작가들의 화두라 간단히 정리해 볼 수 있겠다. '누가, 어떻게'가 소설 초반에 한여름 땡볕처럼 명백하게 밝혀진 온다 리쿠의 <유지니아>에서 남는 수수께끼는 '왜'뿐이다. 도대체 왜?

해당 독살사건(나카오가키 사건)이 일어나고 20년이 지난 시점, 누군가(!)가 당시 사건의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며 다시 과거의 기억을 헤집는다. 도대체 왜 2?

라쇼몽식 구성으로 관련자들의 진술은 이어지는데, 놀랍게도 사건을 담당한 경찰을 비롯한 몇몇 인물은 당시 유일한 생존자인 앞 못 보는 명문가 소녀가 희생자가 아닌 진범일지 모른다는 강한 의구심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앞서 밝혀진 사건의 전모는 '도서(倒敍) 미스터리'였단 말인가! 독자들은 황급히 앞서 철석같이 믿었던 '누가'와 '어떻게'를 재확인해야만 한다. 근본이 흔들리는 상황, 그럼에도 여전히 '왜'라는 숙제는 풀리지 않는다. 도대체 왜 3?

정통 미스터리에서 범인은 밝혀지고, 사건의 모든 정황이라 할 범행 동기, 수법 등은 속시원히 드러난다. 제59회 일본 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유지니아>는 그런 뻔한 길을 가지 않는, 별미를 제공하는 소설이다. 온다 리쿠는 의도적으로 곳곳에 여백을 남겨 놓아, 그곳을 독자의 상상력으로 채우게 한다. 딱 들어맞는 퍼즐이 아니라, 독자만의 퍼즐을 만들어낼 수 있는 'DIY'형이라고나 할까.

정말 아오사와 히사코는 진범인가? 헌책방 화재는? 마키코의 사망은 단지 일사병 때문일까?

<유지니아>는 비채의 일본 문학선 '블랙&화이트'의 3번째 책으로 2007년 처음 출간되었다, 14년이 지난 2021년 전면 개정판으로 우리 앞에 다시 섰다. 17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소설을 '아름답다'라고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 좋지만, 여전히 <유지니아>는 몽환적이며 탐미적인 명작이다. '온다 월드'를 탐사하기 위해선 <유지니아>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며, 여러 번 읽으면 처음 읽었을 때 몰랐던 비밀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매력덩어리다. '범인 찾기'에 다소 물린 독자라면 마땅히 <유지니아>를 펼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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