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하버드 스퀘어
안드레 애치먼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평점 :
「이집트 태생으로 하버드 대학원에서 졸업 논문을 준비하던 나는 여름 방학 기간에 칼라지라는 베르베르인을 만난다. 프랑스에 대한 동경이란 공통점으로 둘은 급속히 친해지고, 그렇게 계절은 지난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던가! 이들의 우정 역시 관계의 종말을 향해 가는데... 」
처음 접하는 안드레 애치먼의 소설이다.
작가들은 늘 자기가 쓰고 싶은 자전적인 이야기가 있기 마련인데, <하버드 스퀘어>는 안드레 애치먼 자신의 이야기가 상당 부분 원료에 배합돼 있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프랑스어를 쓰는 유대인 부모 밑에서 성장했고 반유대주의를 비롯한 정치적 문제로 이집트를 떠나 뉴욕에 정착했고 하버드에서 약 7년간 학업에 정진한 애치먼의 '하버드에서 보낸 여름날'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
소설의 핵심, 거친 택시 운전사 칼라지는 체 게바라 스타일의 외모에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영혼을 지닌 듯한 인물로 묘사된다. 인종의 용광로인 미국에서 어디 태생이고 하는 전사(前史)가 그다지 흥미를 끌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라지가 하버드가 위치한 케임브리지까지 흘러온 인생 유전은 간단하지 않다. 더군다나 그는 현재 택시를 몰긴 하지만 영주권 문제로 언제 추방될지 모르는 불안한 신분이다.
누구나 한 겹으로 포장돼 있는 간단명료한 인물은 없다. 이럴 땐 이렇게 반응하고 저럴 땐 저렇게 반응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면면을 지닌 게 사람이란 생물의 속성이기에, 몇 마디의 형용사로는 정의할 수 없는 다면적인 모습을 지닌 게 인간이다.
칼라지란 인물을 보자. 분명 주인공 나보다는 몇 살 많은 인물일 그는 다층적인 면모를 지녔다. 세상의 밑바닥을 경험한 듯한 거친 면모, 세상 모든 여자는 자기 침대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믿는 섹스 어필과 강한 마초 기질, 반사회적인 성향, 시시때때로 선을 넘는 안하무인한 태도...
소설의 상당 부분은 칼라지에 대한 묘사, 주인공 내 눈에 비친 그의 모습과 그 모습을 보는 내 태도의 변화에 바쳐진다. 입체적인 인물 칼라지가 변한 게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나'의 태도와 평가가 바뀐 것이다.
처음에 나와 완전히 다른 인물 칼라지는 신선한 매혹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이런저런 모습을 보는 동안 최초의 매혹은 선도(鮮度)를 잃고 만다. 여기에는 하버드 대학원생이라는 '지적 허영심'의 강력한 쉴드가 작동했음은 물론이다. 삶의 우물이 많은 아랍인 칼라지와 '비교적 바른 생활'인 유대인 나와는 애당초 우정이란 나무가 굳건히 뿌리를 내리기엔 토양이 연약했다. 결국 나는 그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이별의 순간마저 만들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었지만 타인은 절대로 나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없고, 결국에 그런 허상은 내 안에서 끄집어내 던져서 깨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197쪽

주인공인 '나'의 주위에도 몇 명의 여성들이 스쳐 지나가지만, <하버드 스퀘어>에서 그다지 큰 비중으로 그려지진 않는다. 칼라지 외에는 결국 다른 이들은 모두 소리 없이 스쳐가는 병풍들처럼 묘사된다.
'하버드의 뜨거운 여름날'은 애치먼의 정교하게 세공된 문장으로 사려 깊게 되살아난다. 소설의 뒷날개에는 애치먼을 '관계의 아득함을 그리는' 작가로 소개한다.
하버드란 단어에서 느껴지는 지적인 분위기나, 대학가의 낭만과 이 책은 거리가 있다. 또한 두 명의 남성이 뿜어내는 예상되는 서사로 흘러가지도 않는다. 다만 젊은 날의 우리는 얼마나 부족한 존재였고,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는지 깨닫게 만든다. '젊은 날의 초상'이 늘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