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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간 ㅣ 사계절 1318 문고 61
지크프리트 렌츠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침묵의 시간’제목과 함께 책의 겉표지에 실려 있는 작가의 사진 속 시선을 마주하며 나는 가슴 속의 두근거림이 잔잔해지는 것을 느꼈다. 안경 너머로 나를 바라보는 눈빛 속에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니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그 시간 곳에 담겨 있는 사랑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서로의 눈빛으로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일렁이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처럼.......
이 이야기는 슈델라 페테르첸 선생님의 추모식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추모식 중에 크리스티안이 예전의 일들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남들은 모르고 있는 둘만의 비밀을 털어놓는, 그래서 이 시간이, 이 책 자체가 침묵의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그리고 마치 추모식을 배경으로 예전의 일들이 한 장, 한 장의 사진을 보는 것처럼 되어 있어 읽는 이에게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신선함도 갖게 해주고 있다.
슈델라 선생님은 김나지움에서 5년 동안 영어 교사로 봉직했고 동료교사들에게는 높은 평가를 받고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특히 크리스티안에게 선생님은 특별한 존재였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크리스티안은 13학년으로 학교에서는 학급대표를 맡았고 집안에서는 카타리나호 화물선에 설치된 기중기를 이용해 방파제 수리하는 아버지 일을 도왔는데 주로 떨어진 돌의 위치를 정정하기 위해 물속으로 들어가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돌을 캐는 사람으로 바다 밑 돌밭에서 올린 돌들로 일을 하고 있었다.
해변 축제가 있던 날, 슈델라 선생님이 묶고 있던 호텔 방에서, 그리고 해저 돌밭을 구경하러 가다가 돌풍으로 물새섬에 새지기 영감의 오두막에서 둘만이 있게 되었을 때,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누었고 그 이후로 크리스티안은 선생님이라는 호칭 대신 이름을 불렀고 교실에서는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하는 은밀한 방식으로 소통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기대와는 달리 선생님은 크리스티안에게 오히려 무심하게 대했다.
나는 슈델라 선생님과 크리스티안, 두 사람이 선생님과 제자로서 사랑하는 연인이 되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가슴이 떨렸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들처럼 선생님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이나 혼자만의 짝사랑이 아닌, 사랑을 나누는 연인이라는 사실에 부러움 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크리스티안의 13학년 생활이 지금의 우리 학창시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학교 내에서의 수업시간에도, 그 외의 시간에도 선생님과 제자 사이에 자연스러운 만남은 물론 가벼운 스킨십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상황에서는 그럴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크리스티안 보다는 슈델라 선생님이 그들의 관계에 대해 더 많은 시간과 생각을 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슈델라 선생님은 연인이 된 크리스티안에게 마음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시골출신으로 전기기술자였는데 전쟁이 나자 전투기 무전병으로 첫 공격에서 격추당해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 그 때 하워드 윌슨씨 농장에서 노동을 하며 윌슨씨 가족과 함께 생활하며 기쁨을 느꼈다는 것, 그래서 자신이 영어선생님이 되었다는 것도.
크리스티안은 어느 날 갑자기 학교에 오지 않은 슈델라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무작정 집으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말로만 들었던 선생님의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슈델라 선생님이 자신과의 관계로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 후로 크리스티안은 선생님과의 약속을 잡을 엄두가 나지 않아 일요일을 택해 친구 아버지의 차를 빌려 선생님을 기다렸다. 그리고 정말 선생님이 나오자 차에 태우고 사진도 찍고,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도 하고, 해변으로 가서 나란히 누워 이야기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는 선생님의 집 앞에서 이별의 입맞춤 후에 선생님은 자신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배를 타고 떠났다.
그 후로 크리스티안은 선생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무료한 날들을 보냈다. 그리고 처음으로 선생님과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고 선생님을 조금이라도 가깝게 느끼고 싶어 선생님의 집을 찾아가고 싶기도 했었다. 그러던 중, 선생님으로부터 온 편지를 받게 되었고 크리스티안은 행복감에 젖었으며 훗날, 이 편지로 선생님과 함께 추억을 떠올리는 것을 상상하며 영어문법책 사이에 편지를 보관했다. 그리고는 선생님이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러면서 선생님의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그리움을 달랬고 급기야는 선생님에게 편지를 썼고 그 편지 역시 훗날을 위해 영어문법책 사이에 끼워 두었다.
나는 크리스티안의 슈델라 선생님에 대한 사랑을 보며 행복해졌다. 학교에서는 나이 어린 제자이지만 밖에서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 싶고, 어떤 일이든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보다는 훗날을 상상하며 행복해 하는 순수한 모습은 안타까움을 갖게 했다. 아마도 슈델라 선생님은 배를 타고 여행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결정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결정이 궁금해진다.
크리스티안은 오후가 되면 바다풍경 호텔 손님들을 카타리나호에 태우고 물새섬 관광에 나섰다. 그러는 동안 부모님은 크리스티안과 슈델라 선생님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둘의 관계를 아는 눈치였고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다. 특히 아버지는 크리스티안이 일을 돕는 것에 대해 고정임금제를 요구했을 때도, 창고 안 은신처에 몰래 모아 놓은 물건들을 본 후에도 크리스티안을 나무라거나 추궁하지 않았다. 다만 빙그레 웃을 뿐, 아마도 아버지는 크리스티안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식의 일이 어떤 때는 무방비 상태로 받아들이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크리스티안에 대한 믿음이 컸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갑자기 바다에 돌풍이 일면서 날씨가 심상치 않자 모든 어선들이 안전한 항구로 신속히 대피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멀리서 항구로 들어오는 북극성호를 발견했다. 범선이 거의 항구에 들어오는 것 같더니 이내 배가 떠오르고, 뱃머리가 물에 잠기고 다시 돌벽에 부딪히더니 다시 충돌했다. 그러는 사이 갚판 위에 있던 두 사람d l돌벽과 선체 사이로 빠져버렸다. 그 중 한 사람이 슈델라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크리스티안은 비보를 선생님의 아버지께 전해주기 위해, 선생님이 살았던 곳에 들르고 싶은 욕구에 선생님의 집으로 찾아갔다. 노인은 이미 딸의 죽음을 알고 있었고 크리스티안에게 선생님의 카드를 전해주었다. 그 카드를 사진 옆에 두고 틈나는 대로 반복해서 읽으며 선생님을 기억했다. 선생님의 장례는 생전에 바랬던 것처럼 바다 장례로 치르게 되었고 크리스티안은 장례선을 뒤따라가며 선생님의 유골이 물새섬 근처의 바다에 뿌려지는 것을 보며 이별을 실감했다.
나는 슈델라 선생님의 죽음으로 두 사람의 사랑도 끝이 났다는 사실에 안타까워졌다. ‘사랑은 따스함을 머금은 물결이야.’라는 슈델라 선생님이 카드에 쓴 문장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는 크리스티안, 그것이 곧 자신을 향한 고백으로, 훗날에 대한 약속으로 받아들이며 설레던 그에게 지금은, 아니 앞으로는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는 절망감으로 바뀌었으니....... 크리스티안이 선생님의 죽음이후, 선생님 집을 찾아간 것은 사람은 살면서 중요한 순간에 있었던 곳을 꼭 다시 한 번 찾게 된다는 말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슈델라에 관한한 작은 것 하나라도, 될 수 있으면 오랫동안 느끼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선생님과 제자와의 사랑, 즉 금지된 사랑이 주는 애틋함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금지된 사랑으로 사랑 이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순수함에 마음이 개운해지기도 했다. 바위들 중에도 화석 속에 영원히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는 존재가 있는 것처럼 크리스티안의 가슴 속에 슈델라와의 사랑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랑은, 우리가 바라는 사랑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사랑, 우리에게 다가올 사랑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