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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한 권의 책속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검은 활자들이 나열해 만든 문장, 그 문장들이 이루는 구절, 그것들이 어우러져 펼쳐내는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다. 우리는 그 다양한 모습 속에서 자신을 찾아내어 위안을 받기도 하고, 용기를 갖기도 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도 갖게 되는 것이다.
‘노인과 바다.’ 누구나 한 번쯤 읽어보았을 이 책 속에서 내가 찾은 것은 가치 있는 삶을 위한 용기이다. 가치 있는 삶이란 바로 늙은 어부 산티아고의 삶이다.
산티아고는 인생의 황금기를 지난, 늙고 가난한 어부로 아내는 세상을 떠났고, 아들도 없으며 많은 고난을 겪으며 살았다. 미미한 존재로서의 의미, 마을사람들의 존경심, 어부로서의 자긍심이 모두 고기잡이라는 그의 일에 달려있음에도 불구하고 84 일 동안이나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다. 그 때문에 다섯 살 때부터 고기잡이를 가르쳐 함께 배를 타던 아들 같은 소년마저 부모의 성화로 다른 배로 옮겨 간다.
그는 단지 돈을 벌거나 먹고 살기 위해 고기잡이에 매달리지 않고 고기잡이를 천직으로 알고 헌신한다. 고기잡이 자체를 모든 생명체가 서로 먹고 먹히는 순환관계에서 자연의 질서에 순응한다는 삶의 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산티아고는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고기를 잡으려 한다. 단지 먹고 살게 해줄 고기가 아니라 자신의 솜씨를 보일 수 있고, 어부로서의 자긍심을 확인시켜주고, 소년으로 하여금 자신을 정신적 지주로 만들어줄 엄청난 물고기를 잡으려 한다. 그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믿음에 따라 열정적으로 살고, 평생 하는 일 속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에 맞서고 이겨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구원하고 자신의 소중한 것을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것이다. 그는 매일 바다에서 맞이하는 아침 해가 눈을 상하게 했듯이 그렇게 한 평생 고난을 겪으며 살았지만 그의 눈빛은 살아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어려움에 맞서 희망을 품고 꿈을 간직하고, 믿음을 지키고, 결의를 다질 수 있도록 용기를 갖게 해준다.
지금까지 나의 바다는 거친 파도를 일으켜 사정없이 나를 휘몰아쳤다. 재수에 삼수, 사수까지 네 번의 수능을 치루는 동안 나는 몰아치는 파도에 휩쓸리며 더 이상 가라앉지 않기만을 바랬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나는 파도에 몸을 실어 위로 솟구쳐 오를 수 있었다. 그러자 파도도 잠잠하여 지금의 나는 조심히 노를 저어가고 있다. 또 다시 파도가 휘몰아칠까 두렵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이번에는 파도와 당당히 맞설 용기도 갖고 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며 훌륭한 어부가 된 카산드라처럼.......
마놀린은 산티아고에게 마지막 남은 가장 소중한 관계이다. 산티아고가 자신의 고기 잡는 솜씨는 물론 자시의 기억까지도 물려주고 싶어 하는 젊은이다. 산티아고와 소년은 마치 아버지와 아들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마놀린은 산티아고를 사랑하고 돌봐준다. 비록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다른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았지만 산티아고에 대한 그의 믿음은 절대적이다. 산티아고가 잡아온 청새치가 뼈만 남았지만 청새치의 부리코를 받고서는 산티아고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확실하게 이어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전해준다.
산티아고가 잡은 청새치는 산티아고에 비해 모자를 것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청새치와 중단할 수 없는 싸움을 벌이는 사흘 동안 산티아고와 청새치는 긴밀한 관계가 된다. 처음에는 청새치를 동정하다가 곧 이어 칭찬하고, 청새치의 느낌을 공감하고 결국에는 일체감을 갖게 된다. 산티아고가 청새치를 잡은 것은 승리이지만 다음에는 상어 떼들의 공격으로 청새치의 살점이 뜯겨 나가 뼈만 남게 되는, 산티아고에게는 패배를 안겨 준다. 그렇게함으로써 자연의 순환을 완성시키고, 거대한 생명체로부터 무언가를 얻는 것이다. 목숨을 지키기 위해 용감하지만
부질없는 저항을 하고 청새치의 모습이 상어로부터 청새치를 지키기 위해 소용없는 싸움을 했던 산티아고의 모습과 같다는 것을 통해 둘은 또 다른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이이야기의 배경인 바다는 좀 더 깊게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고 카산드라는 그에 맞서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카산드라에게 있어 바다는 삶의 터전으로 그 누구보다 바다를 잘 알고 있지만 바다는 깊은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다. 카산드라는 바다의 승자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라지는 존재인 것이다. 그의 손에는 이미 굳어버린 상처뿐, 게다가 84일 동안 이어지던 불운에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먼 바다에 나가 거대한 청새치 한 마리를 낚는다. 그 승리감도 잠깐, 바다는 카산드라가 애써 찾은 의미마저도 빼앗아버린다.
결국 바다라는 거대한 힘 앞에 우리는 늙어가고, 배반당하고, 실패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열심히 살 수 있는 것은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 희망으로 힘을 얻게 되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맞이하게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카산드라가 뼈만 남은 고기를 끌고 집으로 돌아온 후, 곁을 지키는 마놀린이 흘리는 눈물은 카산드라의 뒤를 이어 세상과 맞서 싸우리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그리고 내 가슴 속에도 똑같은 용기를 갖게 해준다. 그 용기로 나는 새로운 희망을 품고 당당하게 노를 저어나간다. 끝없이 펼쳐진 나의 바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