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馬화 문학과지성 시인선 250
유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하의 『천일馬화』는 전작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에 비해 일단 말이 지나치게 많다. 말(言)을 찾기 위해서 말(馬)의 무리 속으로 뛰어들어간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질식할 듯 넘치는 말(馬)의 무리 속에서 진정한 말(言)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생을 '나아감'이라는 범주로 상정하고, 시집의 1부처럼 거침없는 말들의 질주를 노래하는 '천일馬화'와 2부 '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로 이분해 노래하고 있다. 현재의 욕망들이 모여서 부딪치고 결국은 쓸쓸히 퇴행하는 공간인 '경마장'과 은빛의 바퀴를 무(無)로 승화시키는 '자전거'로써, 현대의 욕망을 까발리고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을 시인은 이 한 권의 시집 안에 고스란히 담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너무 많은 말을 남발해버린 몇 편의 시에서 그 싱싱한 경주마의 역동성은 죽어버리고, 나른하면서도 꾸준한 자전거의 원운동마저도 힘을 잃고 있다. 게다가 유럽을 비롯한 곳곳의 명소 앞에서 지은 듯한 시들은 단지 멋있어 보이려는 장식효과를 알게 모르게 의식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물론 스포츠신문에 연재되는 만화의 제목으로 연작시를 만들어내는 유하의 키치적 상상력은 아직 건재하다고 판단되지만 초창기 '무림일기'에 서려있던 그 검의 독기, 광기들엔 미치지 않다고 보는 게 솔직한 표현일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시인 유하에게는 미처 다 만나지 못한 욕망들의 뒤를 쫓는 것보다는 하루살이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 광대무변의 축제에 동참하기도 하는 그런 마음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질주하는 말들의 순간을 포착하기보다는 느리게 걸어가는 코끼리 떼의 걸음을 오래도록 음미하듯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