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0
막심 고리키 지음, 이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은둔자적 사랑

 

 

                                      카르마

 

 

밤새도록 들판을 헤매던 영혼

가엷고 어리석은 삶의 나날 다 지나고

오랫동안 찾고 있던 사람을 만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커다란 달로

탄생을 받아내는

고요한 아름다움을 보아라

 

얼마나 좋으면

색색의 넓은 점토층을 이루는 가파른 절벽

아직도 흐릿한 새벽 강물 푸른 상류로 

찬란하게 즐겁도록 

팔딱팔딱 차고 오르는

저 날씬하고 여린 

빛의 파편을 

 

하아, 오랜 감정 북받쳐

숙명같은 몸서림 칠 은둔자의

동물적 생존의 단순한 형식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번식이 아니더라도 

영육의 소중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작은 먼지로 사라질

기절하는 세상

 

누군가 이 세상을 만든 사람도

하찮은 작은 먼지들에서 시작하지 않았을까? (P. 163)

 

2014. 09. 10.

 

(일상의 모든 소리)...이 모든 소리는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하루의 노동이라는 음악 속에 뒤섞인다. 이 모든 소리는 격렬하고 불온하게 떠올라 항구 위 하늘을 나지막이 덮고 있고, 주변의 모든 것을 가차없이 뒤흔들며 둔중하게 울어대는 소리와 먼지에 쩔어버린 무더운 대기를 찢는 날카로운 굉음 따위가 새로운 소리의 파도를 일으키며 대지 위로 거듭 솟아오른다.... 먼지 투성이 누더기를 걸치고 등에 짊어진 무거운 짐 때문에 허리가 꺾인 왜소한 군상들이 무더위와 소음 속에서 구름 같은 먼지 사이로 분주하게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P. 24)

  

첼카시는 도둑이지만 돈을 뺏으려고 자신을 공격한 가브릴라에게 오히려 돈을 던져주며 아무런 응징도 가하지 않는다. 먼지에서 시작하여 나름의 세계관을 갖게되는 방향, 인간이라고 하는 한낱 먼지만도 못한 인간이 강렬하게 거칠게 살아가는 방식에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짐작하게하는 부분이다.

 

"그런 어부들이요? 물론이죠! 제멋대로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이죠,"

" 네게 자유가 뭔데? 그래, 넌 자유를 좋아하나보지? 

"...자기가 자기 주인이 되는 거잖아요. 가고 싶은대로 가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그보다 좋은 게 어디 있어요! 그저 어디 매이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게 최고죠! 아무 생각 없이 맘대로 사는 거죠. 하느님만 잊어버리지 않느다면야..."(p. 33)

 

이렇듯 먼지처럼 사는 하찮은 인간이지만 '자신보다 형편없이 못하다고 생각했던 자가 자신과 흡사하거나 자신과 똑같은 애증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불쾌해한다. 서로 질투하고, 갈등하고, 다투고, 무시하고 그리고나서는 자연에서 고요한 자유를 얻는다. 

 

그는 이렇게 어둡고 광활한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그 끝없이 펼쳐지는 자유롭고 힘찬 모습에 결코 질리는 법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좋아하는 바다의 아름다움에 대해 그따위로 대답하는 것에 화가 났다. 선미에 앉아 배의 키를 잡고 있으면 그는 비로드 같은 바다를 따라 멀리멀리로 나아가고만 싶은 마음에 말없이 앞을 바라보았다.

  바다에만 나오면 그의 마음은 넉넉하고 따뜻해졌다. 바다는 영혼을 사로잡아 일상의 비루함을 다소나마 깨끗하게 정화시켜주는 것만 같았다. 그는 이런 느낌을 훌륭하다 여기며 바다에 나와 있기를 좋아했다. 바다에 나와 숨을 쉬면 삶에 대한 생각과 삶 자체를 대하는 마음이 우선 너그러워지고 그다음에는 모든게 다 부질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밤이되면 바다 위에는 바다의 잠든 숨결이 부드럽게 유영하듯 떠다녔고 그 다함없는 소리에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 사악한 욕망을 온화하게 가라앉히며 강력한 희망의 꿈을 불러일으켰다....(p. 43)

 

자연에서 그와 같은 평화를 얻고도 삶으로 돌아온 첼카시는 먼지같은 도둑질을 하고 가브릴라는 그것에 얻은 이익을 나꿔채고 첼카시를 죽인다. 그리고 "첼카시가 쓰러졌던 자리의 붉은 핏자국도 첼카시와 젊은이가 서 있던 흔적도 금세 비와 파도에 씻겨나갔다. 그리하여 그 황량한 해변에 두 사람 사이의 작은 드라마를 추억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르길 노파의 추억에서도 그렇다. 활달한 한 사내와의 사랑도 그가 멀리 도망가자고 하자, " 하지만 난 이미 그때쯤 싫증이 나기 시작했어. 노래 부르고 키스하고 그런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이미 지겨워졌던 거야." 라고 하게 된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 그리고 또 터키 사람하고도 사랑했지. 스크타리에 있는 그자의 집에서 일주일을 살았는데 별게 없더라고. 그냥 지루했지....여기도 여자, 저기도 여자. 온통 여자였어...여덟 명의 여자가 있었어..."

 

하나의 커다란 형식을 향해 인생이 향해가지 않는다면, 어떤 거대한 목표가 내게 주어졌으리라고 생각하고 나아가지 않는다면, 인생은 아마 이렇게 먼지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어떤 방향을 가지고 살고 악전고투 한다고 해도 인생은 그렇게 결국 먼지 만도 못한 것일까? 노파가 하찮게 살았던 그렇지 않았던, 나이들면 지혜가 생긴다고 착각하듯이, 삶에 대한 관조의 능력이라고 생긴 것일까. 노파는 "요즘 사람들은 진짜 사는 게 아니라고 그냥 흉내만 내고 있어. 그저 흉내만 내느라 허송세월을 보내고 말지. 세월을 다 보낸 다음 더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으면 운명을 탓하며 징징대고 운명이란 게 대체 뭐야. 제 운명은 제가 만드는 거야! 요즘엔 아무리 봐도 진짜 강한 사람이 없어!" 라고 한다.

 

사실 무엇이든 아름다운 것은 우리같이 거친 사람들에게도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아니 그 보다도, 아무리 우리가 바보같이 거세된 황소처럼 강제 노동같은 일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역시 여전히 인간이며,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뭐가 됐든 그 무언가에 경배를 올리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P. 121)

 

인간의 본질에는 누군가를 숭배하고 싶어하고 사랑하고 싶어하는 속성이 있나보다. 그리고 그것은 존경심과는 분명히 다르다.

 

인간은 때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짓밟고 더럽히면서도 언제나 자신의 사랑을 쏟아부을 대상을 필요로한다. 때로 인간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까운 사람의 삶을 질식시키기도 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알다시피 존경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냐를 사랑해야만 했다. 그녀 외에는 그 누구도 사랑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p. 122)

 

축축한 지하실 크렌델리 제빵소에서 빵을 만드는 스물 여섯명의 죄수들조차 누군가를 사랑해야 했고 숭배해야했던 것이다. (여기서 고리끼는 분명히 '존경심'은 다른 목록에 넣어 구분하였다.) 어쩌면 우리가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에서 나온 어떤 속성을 발현하기 위한 통로일 뿐이며 어쩌면 더 깊이에는 다른 목적조차 있는지도 모른다. 고리끼의 인간에 대한 통찰은 아프기까지하다.

 

진실은 투박한 생각들에 더 많은 법이다. ...(생략)...물론 사람들은 경제의 사슬에 묶여 있다. 경제 유물론은 명확한 학설이고 다른 어떤 반론도 허용하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외부로부터 강제된 기계적인 관계이다. 자신에게 유리할 때에는 이런 관계를 참아내지만 불리해지면 발톱을 드러내고 이제 안녕. 친구여! 하는 것이다. (생략) 본질적으로 타인에 대한 염려는 그들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을 자신 주변에 두어서 그들의 도움으로, 그들의 힘으로 자신의 이념과 지위와 명예를 세우려는데서 나오는 것이다. 나는 젊은 지식인들이 정말로 민중을 사랑하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건 사랑이 아니라 하나의 기계 공학이고 대중에게로 이끌려들어가는 힘일 뿐이다.(p. 245)   

 

인간이 경제의 사슬에 묶여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나 젊은 지성인에 대한 통찰에 더 나아가서 텅빈 영혼의 인간에 대해서 고리끼는 절망적이다. 그리고 그런 영혼으로 종교에 의존하려고 하는 인간에 대해서는 잘 읽어 볼만하다.

 

영혼은 절망적으로 텅 비어서 그 공허를 종교라는 솜으로 채워넣으려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마치 자기가 알고 있던 어떤 여자처럼 (자신을 속이고 배신했지만 그녀에게 너무 익숙해져 다른 여자에게는 아무 느낌도 가질 수 없게 만드는, 그래서 이제 버릴 수 없는 그런 여자처렴) 생각한다. 하지만 신은 없다. 신이 있다면 왜 사람들이 저런 꼴이겠는가. (p. 251)

 

고리끼가 바라보는 혁명가에 대한 관점은 혁명가에 대한 충언에 가깝다.

 

혁명가에게 필요한 것은 단시 열광과 자신에 대한 믿음뿐이다. 내적 삶의 다양함에 대한 관심은 어떤 면에서 혁명가에게 해로운 것이다. 이 다양함 속에서는 길을 잃기 쉽다. 그것은 가시덤불 속에 갖힌 어린아이와 같은 꼴이다. 분열된 사람의 삶은 조급하게 날아오르는 제비와 같다. 물론 총체적인 사람이 더욱 유용하지만 나는 두번째 유형에 가깝다. (p. 257)

 

누구나 혁명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인생에서 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혁명가가 될 수 있을지라도 모든 인간이 저토록 오랜동안 집중하여 열광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있더라도 너무나 드물어 그런 사람은 그 분야에서 분명 추앙받아 마땅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먼지같이 살고 먼지같이 죽어간다. 그러므로 누구나 혁명가가 될 수도 없는 운명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 속에서 고리끼의 쓰기에 대한 혜안은 모든 인간에 대한 해답지를 제공하는 것처럼 들렸다. 모든 인간이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정작 행하지는 않을지라도..

 

아니다. 글을 쓰는 것은 매력적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세상에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느낌을 준다. 내게 소중한 누군가가,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 날 잘 이해하고 모욕하지 않으며 불쌍하게 여겨주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거다. 글을 쓰게 되면 자신이 좀더 현명해지고 더 훌륭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스스로 도취시키는 일이다. 도스토옙스키를 읽었을 때와 같다. 이 작가는 정말이지 자기 자신에게 흠뻑 도취한 작가이다. (그뿐만 아니라 내 생각에는 독자까지 도취하게 한다.) 광적이며 눈보라 같은, 초이성적인 자기 상상력의 놀음에도 도취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자기 자신 속에 집어넣고 장난하는 놀음에 도취한 작가다...(생략) 그는 자신을 불태울 수 있었고 자기 영혼의 뜨거운 즙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완전히 짜낼 수 있었다. 작가가 갑자기 자신의 책상 위에, 원고 더위 위에서 쓰러져 죽는 경우는 없을까? 틀림없이 있었으니라. 작가는 마지막까지, 삶의 마지막 불꽃까지 자신을 다 써내고 사라지는 존재다. 내가 이전에 이런 도취할 만한 일에 매달려보지 못한 것은 유감이다. (p.268)

 

 

그러므로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하는 행위는 분명히 고상한 일로 여겨지는 것임에 틀림없고 책을 사서 책장에 주욱 꼽아두는 일이나, 이 책을 읽었노라 저 책을 읽었노라 자랑질하는 것도 지적인 행위로 여겨질 것임에 틀림없다. 무조건 동의할 일임에도 고리끼는 다른 관점을 다시 제시한다.

 

영혼의 갈증을 책으로 틀어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게다가 그 갈증을 더욱 넓고 깊게 만드는 사악한 책들도 있지 않은가. 세상의 모든 것은 그림자를 갖고 있으며 모든 진실과 진리 역시 그에 덧붙은 부가물을 -당연히 인여인- 벗어버리지 못한다는 점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바로 이 그림자들은 진리의 순결함에 대해 의심을 품게한다. 금지되거나 아니면 부끄러운 것, 말하자만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그런 의심 말이다. 의심을 품은 사람은 항상 미심쩍게 그래, 여기 이 진실에는 그림자가 없단 말이지, 라고 생각한다. (p, 279)

 

그러므로 얼마나 바빠지는가, 책도 읽어야 하지, 사람도 만나야하지, 글도 써야하지, 기타등등 기타등등...이 모든 행위와 더불어 사랑도 해야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최초로 우리에게 주어진 그 사랑이라는 느낌, 영혼이 생명으로 타오르기 시작하는 그 황홀한 경이로움을 끊임없이 다시 경험하고 싶어하고, 그러한 추구나 그와같은 유사 경험을 하는 것이야말로 삶을 빛나게 하지 않는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게 삶은 얼마나 즐거운가? 얼마나 창의적이며, 작은 것이나 사소한 것에도 얼마나 커다란 행복감에 빠지는가? 고리끼에게 사랑은 (작고 사소한) 감각에 대한 감성적인 리얼리티, 내면과 감각에 대한 포착이다.  

 

아주 어린 시절 언젠가, 현실의 경계 저 너머 아득한 곳에서 아주 강렬한 영혼의 폭발을, 달콤한 전율의 감각을 체험한 적이 있었다. 아니, 그것은 어떤 조화의 예감 같은 것이라고 해야 더 옳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아침에 아주 환하게 떠오르는 태양과도 같은 기쁨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어머니의 신경 에너지의 행복한 폭발이 뜨거운 충격으로 내게 전해지면서 나의 영혼이 창조되고 나의 영혼이 생명을 향해 최초로 불타오르기 시작했을 때의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평생 여자에 대해 어떤 특별한 것을 고대해마지 않았던 까닭은 어쩌면 어머니와 관련되어 이 황홀한 행복의 느낌과 기억 탓이었을 것이다.

 

고리끼를 읽으면서 삶의 지혜를 보는 하나의 안경을 얻는듯한 느낌을 받는다면, 이것은 각각의 단편이 한 마을 또는 한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웃한 누군가의 경험을 독자가 간접경험해보면서 생겨나는 성취일 것이다. 각각의 단편이 주는 경험을 올바르게 느끼고, 삶의 느낌과 자유롭게 정직하게 연결하여 삶을 통찰할 수 있다면, 무엇인가에 정열을 가지고 꾸준히 나아가되 눈멀지 않는 자신만의 영혼의 시각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 고리끼를 읽으면서 생각해 낸 그나마 간단한 결론이라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