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란 1 기란 3
비연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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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정말 후회하지 않을 선택, 역사로맨스를 즐겨 읽는 나로서는 간만에 제대로 된 역사로맨스를 만난 것 같다.
연록흔, 무휘의 비, 궁에는 개꽃이 산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등 흡족하게 읽었던 역사로맨스들...<기란>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소설이었다.

<기란>의 저자인 비연님의 <메두사>를 읽고 섬세하면서도 거친 야누스적인 필력에 감동해 다음 작품을 고대하고 있던 나로서는 근 4년만에 만나는 비연님의 작품인 <기란>이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전작과 달리 역사물에 도전한 비연님, 처음 도전하는 역사물임에도 불구하고, 플롯이나 스토리 자체가 아주 훌륭했다.

한 여자의 남자로 있을 수 없는 진(眞)의 황제 윤은 황국의 실세로 정국을 주도하는 효열태후와 자불태후 사이에서 흔들리는 황권을 바로잡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고군분투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황제라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윤은 결코평범한 남자의 삶을 살 수 없는, 그렇기에 내 마음을 너무도 아프게 했던,내가 어엿비 여긴 황제이다. 그런 그에게 한떨기 꽃보다 아름답고 청초하지만, 결코 쉬이 지지 않을 기란이 나타난다. 진(眞)의 복속국인 서촉과의 정략혼으로 윤의 후궁이 된 기란은 여느 황궁의 여인들과는 달리 권모술수에 능하지도 않고 겉으로는 연약한 척하나 속으로 음흉한 속셈을 지니고 있는 표리부동한 사람도 아니고 계산적이지도 않다.
아름다운 빛을 띠는 얼굴만큼이나 그 성품 또한 아름답다. 가식없고 진취적이다. 당당하고 강하지만 약자들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여린 심성 또한 지니고 있다. 그런 매력적인 기란에게 윤은 사랑을 느낀다.

한 여자의 남자로는 있을 수도 없고, 한 여자에게만 사랑을 맹세할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윤은 기란을 사랑하고만다. 하지만 황제라는 자리에 있는 자신은 기란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없다. 거기다 자신에게는 병권을 장악하기에 꼭 필요한 어린 정혼녀가 있다.자신이 원하지 않던 결혼이기에 윤이 반가울리 없던 기란 또한 잘생기고 기개넘치며 나라를 위해 열정적인 황제 윤을 보고 그를 사랑하게 된다. 결코 기란, 자신만의 남자가 될 수 없음에도 말이다.
두 사람은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함께할 수 있는 동안만이라도 열렬히 사랑을 하고자 한다. 서로를 한없이 은애하고 뜨겁게 보듬어주며 그렇게 사랑을 한다. 그런 두 사람의 사랑을 하늘이 시기한 것일까? 두 사람의 사랑을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제가 한 여자만을 마음에 품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는 황실의 음모속에서 기란은 죽을 고비에 처한다. 죽음을 피하기는 했지만, 자신을 시기하고 견제하는 황실에 의해 냉궁에 유페되기에 이른다.
기란은 그 차디찬 냉궁 속에서 세상과 차단돼 살며 가슴 져미는 그리움과 아픔을 홀로 감내해내야만 했다. 밖으로 내뱉지 못한 눈물이 안으로 흘러들어 가슴에 모이고 또 모여서 그랬을까, 그 눈물이 심장 안에서 차가운 강물을 이룬 것일까, 기란은 3년만에 돌아온 황궁에서 사랑따위가 다 뭐냐며, 예전의 자신은 잊어노라 말한다.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는 윤을 차갑게 대한다. 윤과 자신의 사랑을 부정한다. 하지만, 겉으로는 한없이 부정하려해봤자 두 사람의 사랑은 운명이었고, 잊혀질 수도 끊어질 수도 없는 숙명이었다. 기란은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결코 윤의 옆자리에 당당하게 설 수 없다 할 지라도 주어진 삶 속에서 후회없는 사랑을 하고자 한다. 치열하고 처절한 황궁의 암투속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두 사람의 사랑을 그 누구도 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시련을 이겨내고 함께 한다.

애절한 사랑과 긴박한 궁중암투 속에서 가슴 아파하기도 하고 손에 땀을 쥐기도 하며 책장을 한장 한장 소중히 넘기고 가슴에 담으며 읽어나갔다. 기란과 윤이 되어 같이 아파하고 힘들어하기도 했고, 때론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하기도 했다. 누구보다도 두 사람의 행복을 진정으로 바랬다. 그래서 행복한 사랑을 하는 두 사람의 끝나지 않을 엔딩이 더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욕심 없이 오로지 윤과의 사랑과 행복만을 바란 기란의 모습을 통해 윤과의 사랑이 더 진실하게 다가왔고 현실적이었다. 그리고 윤의 옆자리에서 기란이 언제까지나 함께 하며 아름다운 사랑을 해나가리라 바람을 가지며 세 권에 걸친 두 사람과의 여행을 끝마쳤다.
결코 짧지 않았던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을 느끼며...

역사로맨스만큼 작가의 기량을 드러내는 장르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열정 혹은 쓰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는 쓸 수 없는 장르라고나 할까, 그렇기에 철저한 조사가 없거나 기승전결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면 여느 로맨스소설보다 허점이 잘 드러날 수 있는 장르다.
결코 쉽게 쓸 수도 가벼이 여겨서도 안되는 역사로맨스는 배경으로 하는 역사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던, 작가가 재창조한 가상의 역사이던 간에 조그만 소재부터 시작해, 고어, 어투, 관직명, 황실의 생활 등 그 어느 것 하나 흐지부지하게 표현해서는 안된다. 하나라도 어색하거나 부족할 경우 스토리 전체의 완성도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어떠한 글이든 간에 작가가 쉽게 쓰지 않으며 나름의 노력과 심혈을 기울이겠지만 나는 이러한 이유로 역사로맨스를 시도한, 그리고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안긴 작가들을 존경한다. 물론, 여러 역사로맨스를 읽어본 나로서는 실망스러웠던 역사로맨스도 있었지만 한편의 영화를 읽은 것처럼 남는 것이 많았던 역사로맨스 또한 꽤 많았다. 아직도 가슴에 그 여운이 남아있는 것처럼...
<기란> 또한 그런 작품 중에 하나다.
역사와 로맨스의 결합이라고는 하나, 원체 로맨스소설이라는 장르를 표방하다보니 로맨스 쪽으로 치우치는 경우가 많은데 <기란>은 역사와 로맨스를 적절하게 비중을 둬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표현함으로써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게 없었던 소설이었다.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으로 끝나지 않고, 정치라는 게 무엇인지, 황제의 고뇌가 어떠한지, 황실내의 권력암투가 얼마나 처절한지를 느끼게 하는 소설이었다.
참 남는 것이 많았던,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 아프게도 했지만, 결국 책을 덮으면서 행복을 느끼게 했던 그런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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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앉다
연두 지음 / 가하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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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내게 있어 의자란 특별히 따로 생각해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그저 앉는 수단 혹은 사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였다. 디자인이 독특하고 예쁜 의자를 보면 ‘그저 예쁘구나!’하는 감상에서 끝나는…… 그렇게 의자에 별 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그런데 <의자에 앉다>를 읽고 나서 주변의 의자들을 다시 보게 되었고 의자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인터넷 서핑으로 디자인이 독특한 의자까지 찾아보게 될 정도로. 글 속의 챕터 중간 혹은 마지막에 등장했던 독특한 의자들의 드로잉 실물을 찾아보기도 하면서 의자의 신세계, 의자에 대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의자를 보고 만지고 만드는 그녀와  

의자를 평가하고 사고파는 그가 

앉고 싶은 의자를 만났다.  

 

문제는 그가 그녀에게, 그녀가 그에게 앉고 싶어 한다는 것  

문제가 그가 그녀를, 그녀가 그를 안고 싶어 한다는 것  

 

  가구에 대한 애착이 강한, 탁월한 재능 또한 지닌 가구디자인학도 ‘돌멩이’, 스물세 살의 유석과 전통을 지닌 가구 회사의 부사장으로 가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사업수완을 가진 ‘장군멍군’, 서른세 살의 우진.  

3년 전 유석이 신입생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던 때,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가에타 페세의 ‘뉴욕의 황혼’을 앞에 두고. 황혼의 느낌을 담은 의자를 보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새벽을 느꼈던, 그렇게 통했던 두 사람은 3년 뒤 다시 재회한다. 우진의 동생 우영이 좋아하는 동기이자 친구로, 우영의 형으로. 우진, 그를 자극하는 유석에게서 그는 3년 전의 그녀가 유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까 처음 만났던 장소를 맴돌게 만들었던 여자가…….  

 

  출중한 재능을 가졌음에도 가정형편이 어려워 가구 디자인을 하는 것도, 생활을 하는 것도 빠듯한 유석을 위해 형의 도움을 빌리려 했던 우영으로 인해 우진은 유석을 오해한다. 유석을 조롱하고 무시하면서도 유석에게 끌리는 우진과 못 오를 나무라는 것을 알기에 피하려 하지만 그럼에도 우진을 좋아하게 되고만 유석,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끌림에 굴복하고 만다.   

 

 

 “의자는 누군가가 앉아주었을 때 비로소 의자가 되죠.”  

  p10 中 유석. 

 

 

  유석을 향한 우진의 말에서, ‘앉고 싶다’라고 들리지만 ‘안고 싶다’라는 그의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있어 앉고 싶은, 안고 싶은 존재. 서로를 끊임없이 원하고 자극하는, 그로인해 살아있음을 더욱 느낄 수 있게 하는 존재의 의미. 위험하게 시작된 강렬한 사랑! 두 사람의 끝은 과연 어떨까?  

 

  의자를 하나의 욕망으로 표현한 것, 의자를 매개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 참 독특했다. 어느 하나 의자랑 관련 되지 않은 것이 없다. 모든 이야기가 의자에 연관되어 있다. 서로를 자극할 때도, 두 사람이 처음 하나가 되었을 때도 그들 사이에는 의자가 존재했다. 그들의 마음을, 욕망을 여러 의자에 빗대어 전하는 방법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녀의 키스를 빼앗듯이 가져간 우진에게 유석이 선물한 미니어처 의자, ‘혀 잘 쓰라’며 가시 박힌 메시지를 담은 ‘Tongue’와 우진을 도발한 ‘Odalisque’. 유석을 구속하고 싶다는 우진의 마음이 담긴 카라뱅 의자와 허무하게 가버리고 만 그들의 아이와 유석을 위로하긴 위한 의자 ‘둥지’ 등 두 사람이 주고받고 언급됐던 의자들은 전부 독특하고 인상적이었다. 글과 두 사람의 마음과 절묘하게 매치되어 참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너랑…… 엮이기 싫어.”  

“나랑 닮아서…… 싫어. 내가 아는 누구랑 닮아서…… 싫어.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고 하고, 욕심 부리고, 눈치보고, 급기야 다른 걸 희생시켜서라도 가지려 하는 그 탐욕스러움이 싫어.”  

“나는 그래서…… 당신이 이해되고 좋아졌는데.”  

“이해하려 들지도, 좋아하려 들지도 마. 그냥 내가 원할 때 안기기나 해줘.”  

  p147 中 우진과 유석.  

 

  우진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학업이나 아르바이트로 힘든 유석인데, 그런 그녀를 몰아붙이며 강탈해놓고 제 욕심을 채우려는 모습이.  

점점 유석을 사랑하게 되고 힘든 과정이 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그녀와의 미래를 생각했으면서 표현하지 않고 상처 줬던 그가.  

어쩌면 사랑에 있어서 그는 서툴렀는지도 모른다. 많은 것을 누리는 자리에서 군림하는 삶을 살아왔던 아버지와 술집에서 일했던 생모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아버지 없이 자라야 했던 아픔을 지닌 유년과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한 치열한 삶 아래, 그에게 있어 사랑이라는 것은 아름답지도, 진실 되지도 않은 것. 그래서 우진은 그와 비슷한 처지의, 생모를 떠올리게 하는 유석에게 잔인했다.  

그럼에도 그의 뜨겁고 서투른 사랑이 좋았다. 때때로 보여주는 부드러움이, 떠난 유석을 붙잡기 위해 그가 했던 방법이. 이런 섹시한 구애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유석에게 적나라하고 독특한 느낌의 의자를 주문하면서 그와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며 도발하는 우진, 유석의 주변 남자들을 질투하는 그. 강한 것 같으면서도 부드러운, 닳고 닳은 것 같으면서도 순수한 우진이 매력적이었다. 그를 자기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잔인한 방법과 협박을 서슴지 않는 아버지 장 회장에게 무릎 꿇지 않고 유석과 함께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놓고 과감하게 떠나는 그의 모습은 특히 믿음직스럽고 좋았다.  

유석 또한 매력적인 여자였다. 사물을 보는 센스도 좋고 그녀가 지향하는 삶도 좋았다. 적당히 자존심을 지킬 줄 알고, 자신에게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우진에게 지지 않는 그녀의 강함이 좋았다.  

가구를 좋아한다는 공통점, 비슷한 아픔을 지녔다는 것, 지지 않으려는 성격 등 두 사람은 닮은 점이 많은 만큼 잘 어울렸다.  

 

  뇌쇄적이고 강렬한 글이다. 어떻게 보면 전체적인 틀은 특별한 이야기가 아닌데 풀어간 방식이나 의자를 소재, 매개로 했다는 점이 독특했고, 캐릭터들이 매력적이었다는 점이 만족도를 높였다. 의자를 소재로 어설프게 글을 풀어 나가지 않았다는 게 확연히 보였다. 의자에 대한 작가의 해박한 지식과 감성이 잘 어울러졌고, 작가가 직접 드로잉한 독특한 의자 일러스트를 볼 수 있다는 점도 볼거리 중 하나. 정말 만족스러웠다. 사랑의 색깔과 구도는 로맨스소설의 전형성을 띠지만 작가의 특유의 필력과 재치로 감각적으로 참 잘 표현된 글이다.  

솔직히 로맨스소설들에서 비슷하고 전형적인 글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의자’라는 신선한 소재를 매개로 평범함을 특별함으로 만든 <의자에 앉다>처럼, 글의 구도는 전형성을 띠더라도 신선한 소재나 작가 고유의 필력을 통해서 글을 매력적으로 승화하는 글이라면 독자들도 식상하다고 비판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창작이라는 게 어렵다는 것을 안다. 러브스토리를 주(主)로 하는 로맨스소설의 범주 안에서 글의 틀이나 소재의 한정성은 작가나 독자들 사이에서 항상 대두되는 문제다. 하지만 <의자에 앉다>처럼 전형적인 로맨스소설이라도 표현의 방법에서 차이를 두고 작가만의 감각을 불어 넣는다면 독자들은 분명 그 속에서 작가가 의도한 특별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글 속의 다리 없는 두개의 의자를 서로 안긴 모양으로 겹쳐 설 수 있게 만든 것을 보면서 의자가 사람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완전하지만 함께 이기에, 서로를 의지하며 지탱하기에 땅을 딛고 일어서 살아갈 수 있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 흔들림 없이 지지되기 위해 다리가 긴 의자의 다리를 다른 의자의 짧은 다리에 맞추어 조금 자르듯, 때때로 자신을 희생하며 서로에게 맞추어 가는 사람. 상처가 있지만 상처가 있기에 하나가 될 수 있는 그런 사랑. 사람이 앉을 수 있게, 쉬어갈 수 있게 해주는 데 가장 의미를 두고 만들어진 의자처럼 누군가에게 쉬어갈 수 있는 존재가 되어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사랑을 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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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대전 1
스제펑 지음, 차혜정 옮김 / 북스토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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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스케일을 자랑하며 화제를 불어 모았던 영화 <적벽대전>의 원작 스제펑의 <적벽대전>.
영화때문에 관심이 간 책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누구나 한번쯤은 접했을 삼국지에서도 그 유명한 전투를 제목으로 한 만큼 나의 흥미를 더 끈 책이었다. 적벽대전은 18만대군을 이끌고 남하한 조조와 그에 맞서 유비와 손권 연합군이 적벽에서 벌인 전투이다. 적벽대전의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다. 삼국지를 읽어본 사람이나 아닌 사람들도 다 아는 결말. 조조의 패배, 유비와 손권 연합군의 승리. 분명 알고 보는 결말임에도 한장한장 읽어가면서 긴장감을 떨칠 수 없었다.

다시 만난 삼국지 영웅들과의 만남, 그들이 지략과 전술, 뒷 이야기들을 역사를 바탕으로 픽션화한 <적벽대전>은 읽으면서 참 화려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적벽에서의 화려하면서도 긴장감을 끌어오르게 하는 전투와 심리전도 그렇지만 각 인물들의 묘사와 로맨스 등을 보면서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명장들의 전술 대결과 로맨스가 재미를 더하는 볼거리였다고 생각된다.

어릴 적에 삼국지를 접했을 때는 언제나 주인공이었던 유비를 좋아했다면 다시 삼국지를 접했을 때는 여러 분야에 박학다식한 조조를 높이 샀었다. 그리고 스제펑의 <적벽대전>을 읽으면서는 평소 좋아했던 제갈량의 그 지략에 다시 한번 감탄했고, 주유에게 매료되었다. 연합군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18만대군에 맞서 그들의 펼친 전술과 지략은 참으로 감탄스러웠다. 특히 제갈량의 활 10만개를 얻어내는 그 전술은 다시 읽어도 참 인상적이고 놀랍다.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조금 당황할지도 모르겠다. 원작소설이라고는 하나 그 기본 틀은 같을 지라도 인물 구성이나 스토리의 전개가 조금씩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영화는 재미와 화려한 액션신, 로맨스에 비중을 뒀으니...

영화도 흥미로웠지만 개인적으로 원작소설이 더 좋았다. 좀 더 다양한 에피소드와 인물들의 이야기가 잘 다뤄졌고, 적절한 픽션 가미로 흥미를 더하고 탁월한 심리 묘사를 통해 등장인물들의 매력을 잘 살린 것 같다. 지루함을 느낄 새 없이 몰입하며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기에 비록 삼국지의 모든 이야기를 담고 있지는 못하지만 삼국지에서도 중국 역사상에서도 가장 위대하다 칭해지는 ’적벽대전’을 리얼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영화를 통해서는 화려한 영상미와 보다 비중 있는 로맨스를 통해 재미를 더했다면 원작소설을 통해서는 삼국지의 한 획을 그은 ’적벽대전’의 깊이를 경험할 수 있지 않을 까 생각된다. 이왕이면 원작소설을 먼저 읽은 다음에 영화를 보길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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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고 - 저주를 부르는 북
이문영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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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영 작가의 전작인 <숙세가>를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평이 좋고 작가가 사학과를 전공한 만큼 어느 정도 기대를 가지고 이 책을 읽었다. 우연찮게도 출간일과 동명의 드라마 방영이 엇비슷해 처음에는 드라마를 소설화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이 책에 관심이 있는 몇 몇 분 중 드라마 <자명고>의 원작 소설인 줄 알고 읽으실 분들도 계실 것 같은데 <자명고>는 드라마 <자명고>와는 소재만 동일할 뿐 전혀 다른 스토리의 소설이라는 것을 명심하길.    

뭐, 솔직히 드라마보다  구성력이나 재미도를 봤을 때 낫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문영 작가의 <자명고>는 자명고 설화와 역사, 그리고 판타지, 로맨스를 엮어 꽤 흥미롭게 이야기가 전개된다. 고구려의 왕자 호동과 낙랑의 공주 옥연, 표면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던 설화에 살을 덧붙이고 판타지를 가미해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었다. 끝나지 않은 자명고의 설화를 엿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가장 흥미진진했던 것은 역시나 자명고가 찢어지고 난 후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설화에 숨겨진 비밀과 또 다른 이야기의 서막을 열었다. 작가의 상상력이 날개를 다는 시간.   

로맨스가 주가 되는 만큼 역사적인 이야기보다는 로맨스에 치중했다. 물론 그렇다고 역사적인 것에 소홀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작가가 사학과를 전공한 만큼 그런 부분 또한 신경 쓴 점이 보인다. 글을 읽어가는 필요한 배경지식을 이해하고 몰입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대만큼의 만족도를 주지는 못한 책이었다.  
이 책을 보면서 역사적 고증에 충실하면서 로맨스를 자제한 <월성연화>와 가상국을 배경으로 로맨스를 부각한 <기란>이 떠올랐다. 스토리가 비슷해서가 아니라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 작가들의 구성력과 필력을 비교해보게 되었다고나 할까. <월성연화>는 마립간 눌지의 일대기와 로맨스를 다룬다. 역사적인 이야기에 비중을 두고 세심하게 표현해간 작품이다. 그 사이에서 펼쳐진 눌지의 로맨스는 상대적으로 부족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애틋함과 섬세함을 느낄 수 있었다. 혹자들은 로맨스가 부족해서 아쉽다고 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웠다. <기란>은 가상국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역사보다는 로맨스에 중점을 두었다. 시대적인 배경은 중국 황실을 차용한 만큼 소재나 묘사에서 그런 역사적인 느낌이 풍기기도 하고 황실의 권력을 둘러싼 암투가 벌어지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로맨스를 엮어가는 하나하나의 고리일 뿐이다. 가상을 다룬 역사소설이기는 하지만 로맨스를 최대한 즐길 수 있는 소설 중 하나이다.    

문영 작가의 <자명고>는 역사를 바탕으로 한 자명고 설화를 배경으로 하지만 로맨스에 더 많은 할애를 한 작품이었다. 판타지를 가미시킴으로써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낸 소설이었다. 나름대로 절충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가 조합되어 있는 것에 반해 각 요소들의 매력이 살아나지 못했다. 결론적으로는 어중간했다. 역사와 설화의 이야기에 매료되지도 호동과 옥연의 로맨스를 즐기기에도 뭔가 부족하고 아쉬움이 남았다. 재미도나 만족도면으로 따지자면 위 두 작품보다는 아래였다. 소재가 참신하고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이기는 했지만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스토리를 이끌어 가는 것에 있어서도 약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로맨스에 더 힘을 준 것이 오히려 인위적으로 보이며 자연스러운 몰입을 방해하기도 했다.    

아쉽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재밌게 읽었다. 연극이나 소설, 드라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조명되는 자명고 설화이지만 작가만의 색깔로 구상한 자명고의 재탄생과 작가가 의도한 결말로 닿기 위해 하나하나 놓았던 설정과 복선들이 신선했고 작가의 필력에 무게감을 실어줬다고 생각한다. 작가 나름대로의 고뇌와 노력이 엿보였다. 비극적으로 마감되었던 설화와는 다른 문영 작가의 <자명고>는 자명고의 슬픈 이야기에 안타까워했던 사람들에게 위안이 될 소설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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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홍
진소라 지음 / 파란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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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일홍>을 다 읽고 나서 가장 처음 한 일은 인터넷으로 백일홍을 검색해보는 것이었다. 갑자기 백일홍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백일홍에 관한 남훈의 말이 떠올라서 이기도 하다. 배롱나무, 간지럼나무……. 손가락을 가져다대는 시늉만 해도 간지럼을 타는 상진과 닮은 백일홍. 백남훈과 홍상진은 하나. 백일점의 홍상진.

남훈은 상진을 잊고 지냈노라 말했지만, 글쎄…… 내 생각에는 그는 한번도 상진을 잊은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상진의 집에서 세 들어 살던 유년시절이 가장 행복했다는 그가 상진과 헤어지고 나서도, 톱스타가 되어 경제력으로는 풍족해진 시간을 보내며 상진을 잊고 지냈다고 했던 순간도 그는……. 그의 메일 아이디 101hong이 그의 진심을 대변해준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면, 자신의 인생에서 옳은 결정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107p 中

 

책 구절 중 가장 와 닿았던 말이다. 인생이라는 항로에는 여러 갈림길을 만나고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도 온다. 비단 사랑에서만 아니라……. 그 선택 앞에서 혼란스러워하기도 하고 옳다고 선택한 길을 지나고 나서 후회하기도 한다. 어떤 게 옳은 결정인지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실패도 후회도 없지 않을까. 매니저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강 이사의 제안을 떠나, 상진과 남훈의 관계를 떠나 모든 삶에 적용되는 이 구절로 인해 상진의 심정이 더 포괄적으로 이해되었고 더 잘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할지, 그 선택의 결과가 어떨지 더 주목이 되었다.   


‘홍삼디가 너무 써서 꿀장수랑 다닌다.’ 상진과 남훈의 유년시절은 똑똑하고 야무진 상진이 어수룩하고 착하기만 한 남훈을 돌보아주는 것이 일상이었다. 과제를 하다가도 맛있는 것을 먹다가도 상진은 남훈을 떠올렸다. 어른이 되어서 만난 두 사람의 모습도 유년시절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여전히 너무 순수하고 착한, 조금은 모자란 듯한…… 그게 더 백남훈스런 남훈을 옆에서 챙겨주는 상진. 표면적으로만 보면 물론 달라진 것도 있다. 부자는 아니어도 안정된 삶을 누렸던 상진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장이 되어 집안을 돌봐야했고,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함께 부족하게 살았던 남훈은 톱스타가 되어 부러운 것는 화려한 삶을 살게 되었다. 남훈의 어머니가 상진을 향해 ‘감히 넘본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처럼 두 사람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상진이 남훈에게 부족하게 보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의 진면모와 진심을 엿보기 보다는 어느 사람이 부족하네, 아깝게 하고 비교하고 견주길 좋아하니깐. 달라진 처지. 상진이 남훈을 모른 척 하고 피했던 것도, 백짓장 남훈에게 친절했던 착하고 예쁜 유년의 상진만을 찾는 남훈에게 선을 긋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진심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남훈을 밀어내고 때때로 상처 주는 말을 하는 상진이 야속할 때도 있었지만 상진과 남훈이 함께 하지 못했던 시간 동안 변해버린 환경과 어른이 되어서 만난 후 느끼는 괴리감 같은 것에 혼란스럽기도 했을 것이고 과거의 상진만을 바라보는 남훈이 부담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지난 버린 시간만큼, 변해버린 환경만큼 자신 또한 예전의 착하고 남에게 베풀기 좋아했던 어린 소녀가 아닌데, 자신이 짊어진 것들을 이겨내기 위해 더 냉정해지고 이성적으로 변한 자신은 보지 않고 과거의 잔상에 맞추어 자신을 보는 남훈이 야속하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애매하게 걸쳐진 자신들의 관계를 애써 친구의 범주에 끼워두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친구에서 연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선을 긋는 상진과 연인과 뭐든 함께 나누고 싶은 남훈. 두 사람의 관계를 보면, 착하기만 한 남훈이 항상 참고 져주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더 알고 싶고 더 특별해지고 싶지만 때때로 더 이상은 넘어오지 말라는 듯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 밀어내는 듯한 상진에게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애써 참으려고 하는 남훈이나 자신의 여린 면을 보여주기 싫어, 부담 주기 싫어 욕심내기보다는 한 발짝 물러서있는 상진이나 솔직히 다 어리석고 불안해보였다. 제 삼자의 시선에서 바라보기에 이성적으로는 그렇다고 생각하면서도 감정적으로는 그들의 행동이나 심리가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과연, 그들은 어떻게 그 선을 넘어설까 하는…….  


<백일홍>에는 주인공을 제외하고도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주 배경이 연예계인 관계로 대다수가 그와 관련된 종사자이지만 다들 개성이 뚜렷하고 매력적이었다. 애정이 안 가는 인물이 없었다. 상진의 애제자로 힘을 주는 인영과 인영의 가족, 항상 미스터리였던 강 이사 영민, 발은호라 불리며 도도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알고 보면 진국인 은호, 바람둥이의 이미지지만 아픈 사랑의 상처를 간직한, 다시 기회가 찾아왔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용감하게 사랑을 쟁취한 민준. 저마다의 특별했던 사연과 사랑이야기를 통해 주인공뿐만 아니라 그 주인공들을 뒷받침해주는 조연들도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서 빛을 발하는 게 바로 진소라 작가의 특유의 필력. 모든 것을 내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 하나 단서를 던져주면서 독자들이 유추할 수 있게 함으로써 그 인물들을 탐구하고 이해하는 데 다가설 수 있었던 것 같다. 절묘했다고나 할까. 솔직히 전작인 <연애레시피>에서는 그런 부분이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그런 특색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궁금증을 가지고 인물 하나 하나를 알아가는 재미와 전개를 유추해가는 것에 재미를 느꼈다. 물론, 끝없이 터지는 사건들을 따라가다 숨이 차고 과부하가 될 뻔하기도 했지만. 쉴 새 없이 터지는 사건들 속에서도 어떠한 상황이든  당황하지 않고 허를 찌르며 이성적으로 침착하게 해결하는 상진의 두뇌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백일홍>은 인간미가 잘 드러난 소설이기도 했다.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그 인물들 각자가 개성이 강한 만큼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날 수 있었고 그 하나 하나의 단면들을 통해서 인간의 여러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상진의 집에 세 들어 살던 과거 때문에 더 상진을 매몰차게 대했던 속물근성의 남훈 모가 너무 하다 싶으면서도 이해가 됐고, 드러낼 수는 없는 사랑을 했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했던 영민이나 상처 받기 싫어서 모진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 한 꺼풀 벗어내고 성장한 은호나 오랜만에 다 함께 모인 가족들 속에서 이방인같이 느껴지는 상진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배신자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던 남훈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고 가까워질 수 있었다. <백일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 그리고 그들이 전하는 인간미는 우리들의 한 단면 단면들을 투영해준다. 그래서 그것이 악하든 선하든, 슬프든 결국은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무 힘들었어. 좋아하기만 할 때는 네가 밉지 않았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네가 미웠어. 나는 그 미움이 자꾸 마음에 걸렸어. 내가 너를 질투하고 있거나, 무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 그런데 이제 알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너무 사랑하면 미워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는 걸.”

“알아. 그렇게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나도 네가 미웠으니까.” 256p 中

 

미웠다는 말이 더 사랑스럽게 들려온다. ‘애증’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듯, 사랑과 미움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어떻게 보면 뒤집어보면 상통하는 감정이 아닐까. 두 사람의 대화를 읽으면서 분명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임에도 때때로 미워지는 감정이 들던 순간이 떠올랐다.

“사랑이 그렇게 시시한 거라면 하지도 않았어. 말해주지 않고 남들이 몰라준다고 해서 힘들거나 속상한 게 사랑이라면, 내가 차라리 안 하지.” 310p 中

 

여느 연예인들의 사랑이 그렇듯 일반인 홍상진과 연예인 백남훈, 두 사람의 사랑은 대중들에게 드러내기 힘들었다. 그런 상황이면 불안해하기도 할만한데 상진의 저 대사 정말 멋지고 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가 끄떡여졌던 순간. 맞아 맞아. 사랑이 시시할 일이 없잖아. 인간을 무엇보다 풍요롭게 하는 아름다운 감정. 남들이 몰라주면 어때? 사랑하는 두 사람이 사랑하고 행복하면 그만이지!  

 

“니가 날 왜, 얼마나 사랑하는지 민준이 같은 멍청이한테 전해 듣거나, 형한테 듣거나 은호에게 듣고 싶지 않아. 전화로 듣고 싶지도 않고.”

“내가 널 볼 때, 내가 니 손을 잡을 때, 마주 않아서 신발 끝이 닿아 있을 때, 그때마다 말했는데. 그리고 지금도 말하고 있는데.”

“난 바보 맞나봐. 소리 내서 말해주지 않으면 모르고, 이렇게 설명해주지 않으면 모르고.”

“그래서 니가 좋아. 니가 바보 같아서 좋고 니가 바보라서 좋고 계속 바보였으면 좋겠어.”  342p 中

 

두 사람은 정말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진을 착해지고 싶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남훈이나 어수룩하고 일일이 모든 것을 확인받고 싶은, 일명 바보 남훈을 사랑하는 상진이나…… 홍상진에게는 백남훈이, 백남훈에게는 홍상진이 가장 잘 어울린다.

 

“그냥 너는 홍상진이고 나는 백남훈 같아.”

“무슨 소리야?”

“백년이 지나고 천년이 지나도 니가 홍상진이고 내가 백남훈인건 변하지 않잖아. 우리가 늙어도 또 우리가 세상에서 사라져도.”

“그렇겠지.”

“그럼, 어디에 있든 어떻게 살든, 어떤 모습이든 내가 너를 사랑하고 니가 나를 사랑하는 건 변하지 않았을 거야.” 436p 中  

 

“이상해졌어. 너.”

“응. 난 이상해. 그런데 너도 이상해.” 438p 中

 

이성적이었던 상진이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고 , 어수룩해 표현을 잘 못했던 남훈이 또박또박 막힘없이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이별을 겪고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그 떨어져 있는 시간 조금 변하고 성장했다. 더 깊어지고 더 솔직해지고. 서로를 향해 이상하다고 표현하는 두 사람의 대화가 “사랑해”라고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변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홍상진스럽고, 백남훈스런 두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읽으면서 정말 따뜻했고 공감이 갔다. 상진과 남훈같은 상황을 겪어보지 못했음에도…….

상진이 오랜만에 만나 오빠를 차마 안아주지 못 하고 조카인 준을 안아주면서 전달했건 것처럼, 상진과 남훈이 서로의 손을 가슴에 대며 서로에 대한 진심을 전달한 것처럼 <백일홍>을 읽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아직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가 <백일홍>을 읽었을 때의 이 느낌을 전달해주고 싶다. 표현력이 부족해서 잘 전달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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