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홍
진소라 지음 / 파란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백일홍>을 다 읽고 나서 가장 처음 한 일은 인터넷으로 백일홍을 검색해보는 것이었다. 갑자기 백일홍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백일홍에 관한 남훈의 말이 떠올라서 이기도 하다. 배롱나무, 간지럼나무……. 손가락을 가져다대는 시늉만 해도 간지럼을 타는 상진과 닮은 백일홍. 백남훈과 홍상진은 하나. 백일점의 홍상진.

남훈은 상진을 잊고 지냈노라 말했지만, 글쎄…… 내 생각에는 그는 한번도 상진을 잊은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상진의 집에서 세 들어 살던 유년시절이 가장 행복했다는 그가 상진과 헤어지고 나서도, 톱스타가 되어 경제력으로는 풍족해진 시간을 보내며 상진을 잊고 지냈다고 했던 순간도 그는……. 그의 메일 아이디 101hong이 그의 진심을 대변해준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면, 자신의 인생에서 옳은 결정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107p 中

 

책 구절 중 가장 와 닿았던 말이다. 인생이라는 항로에는 여러 갈림길을 만나고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도 온다. 비단 사랑에서만 아니라……. 그 선택 앞에서 혼란스러워하기도 하고 옳다고 선택한 길을 지나고 나서 후회하기도 한다. 어떤 게 옳은 결정인지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실패도 후회도 없지 않을까. 매니저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강 이사의 제안을 떠나, 상진과 남훈의 관계를 떠나 모든 삶에 적용되는 이 구절로 인해 상진의 심정이 더 포괄적으로 이해되었고 더 잘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할지, 그 선택의 결과가 어떨지 더 주목이 되었다.   


‘홍삼디가 너무 써서 꿀장수랑 다닌다.’ 상진과 남훈의 유년시절은 똑똑하고 야무진 상진이 어수룩하고 착하기만 한 남훈을 돌보아주는 것이 일상이었다. 과제를 하다가도 맛있는 것을 먹다가도 상진은 남훈을 떠올렸다. 어른이 되어서 만난 두 사람의 모습도 유년시절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여전히 너무 순수하고 착한, 조금은 모자란 듯한…… 그게 더 백남훈스런 남훈을 옆에서 챙겨주는 상진. 표면적으로만 보면 물론 달라진 것도 있다. 부자는 아니어도 안정된 삶을 누렸던 상진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장이 되어 집안을 돌봐야했고,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함께 부족하게 살았던 남훈은 톱스타가 되어 부러운 것는 화려한 삶을 살게 되었다. 남훈의 어머니가 상진을 향해 ‘감히 넘본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처럼 두 사람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상진이 남훈에게 부족하게 보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의 진면모와 진심을 엿보기 보다는 어느 사람이 부족하네, 아깝게 하고 비교하고 견주길 좋아하니깐. 달라진 처지. 상진이 남훈을 모른 척 하고 피했던 것도, 백짓장 남훈에게 친절했던 착하고 예쁜 유년의 상진만을 찾는 남훈에게 선을 긋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진심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남훈을 밀어내고 때때로 상처 주는 말을 하는 상진이 야속할 때도 있었지만 상진과 남훈이 함께 하지 못했던 시간 동안 변해버린 환경과 어른이 되어서 만난 후 느끼는 괴리감 같은 것에 혼란스럽기도 했을 것이고 과거의 상진만을 바라보는 남훈이 부담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지난 버린 시간만큼, 변해버린 환경만큼 자신 또한 예전의 착하고 남에게 베풀기 좋아했던 어린 소녀가 아닌데, 자신이 짊어진 것들을 이겨내기 위해 더 냉정해지고 이성적으로 변한 자신은 보지 않고 과거의 잔상에 맞추어 자신을 보는 남훈이 야속하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애매하게 걸쳐진 자신들의 관계를 애써 친구의 범주에 끼워두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친구에서 연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선을 긋는 상진과 연인과 뭐든 함께 나누고 싶은 남훈. 두 사람의 관계를 보면, 착하기만 한 남훈이 항상 참고 져주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더 알고 싶고 더 특별해지고 싶지만 때때로 더 이상은 넘어오지 말라는 듯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 밀어내는 듯한 상진에게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애써 참으려고 하는 남훈이나 자신의 여린 면을 보여주기 싫어, 부담 주기 싫어 욕심내기보다는 한 발짝 물러서있는 상진이나 솔직히 다 어리석고 불안해보였다. 제 삼자의 시선에서 바라보기에 이성적으로는 그렇다고 생각하면서도 감정적으로는 그들의 행동이나 심리가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과연, 그들은 어떻게 그 선을 넘어설까 하는…….  


<백일홍>에는 주인공을 제외하고도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주 배경이 연예계인 관계로 대다수가 그와 관련된 종사자이지만 다들 개성이 뚜렷하고 매력적이었다. 애정이 안 가는 인물이 없었다. 상진의 애제자로 힘을 주는 인영과 인영의 가족, 항상 미스터리였던 강 이사 영민, 발은호라 불리며 도도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알고 보면 진국인 은호, 바람둥이의 이미지지만 아픈 사랑의 상처를 간직한, 다시 기회가 찾아왔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용감하게 사랑을 쟁취한 민준. 저마다의 특별했던 사연과 사랑이야기를 통해 주인공뿐만 아니라 그 주인공들을 뒷받침해주는 조연들도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서 빛을 발하는 게 바로 진소라 작가의 특유의 필력. 모든 것을 내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 하나 단서를 던져주면서 독자들이 유추할 수 있게 함으로써 그 인물들을 탐구하고 이해하는 데 다가설 수 있었던 것 같다. 절묘했다고나 할까. 솔직히 전작인 <연애레시피>에서는 그런 부분이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그런 특색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궁금증을 가지고 인물 하나 하나를 알아가는 재미와 전개를 유추해가는 것에 재미를 느꼈다. 물론, 끝없이 터지는 사건들을 따라가다 숨이 차고 과부하가 될 뻔하기도 했지만. 쉴 새 없이 터지는 사건들 속에서도 어떠한 상황이든  당황하지 않고 허를 찌르며 이성적으로 침착하게 해결하는 상진의 두뇌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백일홍>은 인간미가 잘 드러난 소설이기도 했다.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그 인물들 각자가 개성이 강한 만큼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날 수 있었고 그 하나 하나의 단면들을 통해서 인간의 여러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상진의 집에 세 들어 살던 과거 때문에 더 상진을 매몰차게 대했던 속물근성의 남훈 모가 너무 하다 싶으면서도 이해가 됐고, 드러낼 수는 없는 사랑을 했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했던 영민이나 상처 받기 싫어서 모진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 한 꺼풀 벗어내고 성장한 은호나 오랜만에 다 함께 모인 가족들 속에서 이방인같이 느껴지는 상진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배신자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던 남훈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고 가까워질 수 있었다. <백일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 그리고 그들이 전하는 인간미는 우리들의 한 단면 단면들을 투영해준다. 그래서 그것이 악하든 선하든, 슬프든 결국은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무 힘들었어. 좋아하기만 할 때는 네가 밉지 않았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네가 미웠어. 나는 그 미움이 자꾸 마음에 걸렸어. 내가 너를 질투하고 있거나, 무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 그런데 이제 알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너무 사랑하면 미워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는 걸.”

“알아. 그렇게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나도 네가 미웠으니까.” 256p 中

 

미웠다는 말이 더 사랑스럽게 들려온다. ‘애증’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듯, 사랑과 미움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어떻게 보면 뒤집어보면 상통하는 감정이 아닐까. 두 사람의 대화를 읽으면서 분명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임에도 때때로 미워지는 감정이 들던 순간이 떠올랐다.

“사랑이 그렇게 시시한 거라면 하지도 않았어. 말해주지 않고 남들이 몰라준다고 해서 힘들거나 속상한 게 사랑이라면, 내가 차라리 안 하지.” 310p 中

 

여느 연예인들의 사랑이 그렇듯 일반인 홍상진과 연예인 백남훈, 두 사람의 사랑은 대중들에게 드러내기 힘들었다. 그런 상황이면 불안해하기도 할만한데 상진의 저 대사 정말 멋지고 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가 끄떡여졌던 순간. 맞아 맞아. 사랑이 시시할 일이 없잖아. 인간을 무엇보다 풍요롭게 하는 아름다운 감정. 남들이 몰라주면 어때? 사랑하는 두 사람이 사랑하고 행복하면 그만이지!  

 

“니가 날 왜, 얼마나 사랑하는지 민준이 같은 멍청이한테 전해 듣거나, 형한테 듣거나 은호에게 듣고 싶지 않아. 전화로 듣고 싶지도 않고.”

“내가 널 볼 때, 내가 니 손을 잡을 때, 마주 않아서 신발 끝이 닿아 있을 때, 그때마다 말했는데. 그리고 지금도 말하고 있는데.”

“난 바보 맞나봐. 소리 내서 말해주지 않으면 모르고, 이렇게 설명해주지 않으면 모르고.”

“그래서 니가 좋아. 니가 바보 같아서 좋고 니가 바보라서 좋고 계속 바보였으면 좋겠어.”  342p 中

 

두 사람은 정말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진을 착해지고 싶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남훈이나 어수룩하고 일일이 모든 것을 확인받고 싶은, 일명 바보 남훈을 사랑하는 상진이나…… 홍상진에게는 백남훈이, 백남훈에게는 홍상진이 가장 잘 어울린다.

 

“그냥 너는 홍상진이고 나는 백남훈 같아.”

“무슨 소리야?”

“백년이 지나고 천년이 지나도 니가 홍상진이고 내가 백남훈인건 변하지 않잖아. 우리가 늙어도 또 우리가 세상에서 사라져도.”

“그렇겠지.”

“그럼, 어디에 있든 어떻게 살든, 어떤 모습이든 내가 너를 사랑하고 니가 나를 사랑하는 건 변하지 않았을 거야.” 436p 中  

 

“이상해졌어. 너.”

“응. 난 이상해. 그런데 너도 이상해.” 438p 中

 

이성적이었던 상진이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고 , 어수룩해 표현을 잘 못했던 남훈이 또박또박 막힘없이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이별을 겪고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그 떨어져 있는 시간 조금 변하고 성장했다. 더 깊어지고 더 솔직해지고. 서로를 향해 이상하다고 표현하는 두 사람의 대화가 “사랑해”라고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변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홍상진스럽고, 백남훈스런 두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읽으면서 정말 따뜻했고 공감이 갔다. 상진과 남훈같은 상황을 겪어보지 못했음에도…….

상진이 오랜만에 만나 오빠를 차마 안아주지 못 하고 조카인 준을 안아주면서 전달했건 것처럼, 상진과 남훈이 서로의 손을 가슴에 대며 서로에 대한 진심을 전달한 것처럼 <백일홍>을 읽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아직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가 <백일홍>을 읽었을 때의 이 느낌을 전달해주고 싶다. 표현력이 부족해서 잘 전달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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